고양이는 어쩌면 이렇게 단번에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걸까. 무리 도리와 함께 살면서 점차 두 녀석들이 내 마음과 생활을 차지해가는 속도를 깨닫고 깜짝 놀랐다. 이렇게 되면, '고양이는 외계인들의 지구 정복을 위한 전략의 일부'라는 설에 신빙성을 느끼게 된다.-82쪽
러시아어를 배우기 시작한 사람은 반드시 러시아어 단어의 어미 변화에 쩔쩔 맨다. 그리고 나같은 러시아어 통역사가 페레스트로이카 시작 전후부터 최근 15년동안 진땀을 빼는 일이 하나 있다. 바로 러시아의 윗사람과 학자들의 '사상적 입장'이 눈이 핑핑 돌 정도로 어지럽게 변하는 점이다.-121쪽
실컷 주인의 시중을 들다가 헌신짝처럼 버려진 맹인안내견들은 하나같이 머리가 멍해진다고 한다. 지나치게 자신을 억제하고 스트레스가 많은 반평생을 보냈기 때문에 해방되어 편안한 생활을 하게 된 순간, 긴장이 풀려서 늙어버린다.-167쪽
이렇게 집념이 강한 자명종이 세상천지 어디에 또 있을까. 당연히 훈련을 시킨 적은 없다. 언제나 정해진 시간에 녀석들의 배가 고파지는 덕이다.-278쪽
영원히 계속되는 허무한 일, 이만큼 절망적인 운명은 없다. 사람을 절망시키는 아이디어에는 천재성을 발휘한 나치스도 강제 수용소에서 시시포스의 신화를 차용하고 있다. 매일같이 A지점에서 B지점까지 벽돌을 운반시키고 다음에 같은 벽돌을 다시 B지점에서 A지점까지 운반시킨다. 미치는 사람이 속출했다고 하니, 어떠한 고문보다 더 괴로운 것 같다.-284쪽
"두자릿수의 남자를 겪어보고 '내 인생에 남자는 필요없다'는 결론을 얻었어." 마리는 큰소리친다. 그 수가 열인지 아흔아홉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명석한 두뇌, 목수일도 마다않는 체력, 월등한 재력, 이 세가지를 겸비한 그녀에게 필적할 남자가 쉽게 눈에 띌 리 없다. 또 생각한 바를 솔직하게 털어놓는 그녀의 독설을 흘려들을 포용력을 지닌 남자도 적을 것이다. 그녀의 사전에 영합이라는 단어는 없다. 상대의 지위는 상관하지 않고 모두에게 생각한 바를 솔직하게 말하기에 일본 남성의 섬세한 신경은 갈기갈기 찢긴다. "바보하고는 상종 안 해." 마리가 하는 공언 중 하나다. 그런데 그녀는 일반적으로 사람보다 바보라는 동물들에게 가장 자상하다.-3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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