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다니엘 글라타우어 지음, 김라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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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저에게도 당신은 여느 누구가 아닙니다. 당신은 제 안에 있으면서 저와 늘 동행하는 제 2의 목소리 같은 존재입니다. 당신은 저의 독백을 대화로 바꿔놓았습니다. 당신은 제 내면을 풍부하게 해주는 존재입니다. 당신은 꼬치꼬치 캐묻고,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고, 신랄하게 아유하고, 저와 맞서 싸웁니다. -132쪽

당신 생각을 많이 해요. 아침에도, 낮에도, 저녁에도, 밤에도, 그리고 그 사이의 시간과 그 바로 앞, 바로 뒤 시간에도. 다정한 인사를 보냅니다.-145쪽

어떻게 해야 마들레네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그 여자는 냉장고예요. 그런데 그 여자에게 손을 대면 제가 뜨거워져요. 그 여자랑 나란히 암스테르담 거리를 걸으면 폐렴에 걸리지만 그 여자가 밤에 손으로 제 이마를 짚으면 저는 활활 타오르기 시작해요.-179쪽

가깝다는 것은 거리를 줄이는 게 아니라 거리를 극복하는 거예요. 긴장이라는 것은 완전함에 하자가 있어서 생기는 게 아니라 완전함을 향해 꾸준히 나아가고 완전함을 유지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데서 생기는 거예요, 레오.-184쪽

'우리'에게서 과연 무엇이 남을까요? 아무것도 없습니다. 단지 공동의 거짓 과거를 지닌, 서로 낯선 두 사람만이 남게 되겠지요. 그토록 오랫동안 그토록 부끄러운 줄 모르고 자기기만에 빠져있던 두 사람만이.-279쪽

지나간 시절을 되풀이할 수는 없어요. 지나간 시절은 어디까지나 지나간 시절이고, 새로운 시절은 지나간 시절과 같을 수 없어요. 자나간 시절은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늙고 쇠잔해요. 지나간 시절을 아쉬워해서는 안되죠. 지나간 시절을 아쉬워하는 사람은 늙고 불행한 사람이에요. -292쪽

레오, 제 입장에서 생각해보세요. 솔직히 고백하건데, 저는 오랫동안 그 누구와도, 당신과 그랬던 것처럼 격렬하게 감정을 나눠본 적이 없어요. 이런 식의 감정교류가 가능하다는 사실에 저 스스로도 놀랐답니다. 당신에게 보낸 이메일들에서 저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에미다운 에미가 될 수 있었어요. '현실의 삶'에서는 무난하게 버텨나가려면 끊임없이 자기 감정과 타협을 해야해요. 이럴 땐 과잉반응을 해선 안 돼! 이건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어! 이 상황에서는 그걸 못 본 척해야 해!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자기의 감정을 주위 사람들에게 맞추고,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아량을 베풀고, 일상에서 오만 가지 자질구레한 역할을 떠맡고, 구조 전체를 위태롭게 하지 않으려면 균형을 잘 잡아 평형을 유지해야 해요. 저 또한 그 구조의 일부니까요.-169쪽

그런데 레오, 당신을 대할 때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꾸밈없이 드러내는 게 조금도 망설여지지 않아요. 당신에게 이건 기대해도 된다, 이건 안된다...그런 걸 깊이 생각하지 않아요. 그냥 거리낌없이 저돌적으로 글을 쓰는 거죠. 저는 그게 너무 좋아요!!! 사실 이건 다 당신 덕이에요, 레오. 그래서 당신은 포기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어요. 당신은 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줘요. 물론 더러는 제동을 걸기도 하고, 어떤 건 무시하기도 하고, 터무니없는 오해를 하기도 하지만, 그러면서도 끈기 있게 제 곁에 남아있는 당신을 보면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도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면, 실제 에미가 현실에서 어떤 사람이든 간에 메일에서의 에미는 굳이 착하게 굴려 애쓰지 않고 평소에 억눌려왔던 약점들을 그대로 드러낸다는 거에요. 자기가 병적 보따리든 모순덩어리든, 그걸 받아줄 만한 사람에게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도 괜찮다는 걸 알기 때문이죠.-170쪽

하지만 나 자신만이 문제가 되는 건 아니에요, 레오. 저는 끊임없이 당신에게 몰두해요. 당신은 제 대뇌(인지 소뇌인지 뇌하수체인지, 당신을 생각할 때 뇌의 어떤 부분이 쓰이는지 모르겠네요)의 1제곱센티미터를 점령했어요. 당신은 거기에 확실하게 천막을 치고 있어요.-171쪽

2008.08.3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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