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그녀의 내면에서는 아주 끔찍한 것,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어, 단지 그것과 일상을 병행한다는 것만으로 힘에 부친 것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일상에서는 호기심을 갖거나 탐색하거나 일일히 반응할 만한 에너지가 남아있지 않은 건지도 몰랐다. 그런 짐작을 하게 되는 것은, 이따금 그녀의 눈이 단지 수동적이거나 백치스러운 담담함이 아니라 어떤 격렬함을, 동시에 그것을 자제하는 힘을 머금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105쪽
그것은 구석구석 일체의 군더더기가 제거된 육체였다. 그는 그런 육체를, 육체만으로 그토록 많은 말을 하는 육체를 처음 보았다.-106쪽
이즈음처럼 무수한 색채들이 그의 안에서 터져나온 적은 없었다. 마치 몸의 내부가 힘찬 색채들로 가득 차올라, 그 격렬함이 더 견디지 못해 분출되어 나오는 것 같았다. 매우 격렬하게 그는 존재하고 있었다.-122쪽
나는 어두웠다고 그는 느낄때가 있었다. 그는 어두웠다. 어두운 곳에 그가 있었다. 그가 이즈음 경험하는 색채들이 부재했던 그 흑백의 세계는 아름답고 고즈넉했으나 그로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곳이었다. 그 잔잔한 평화가 주는 행복을 그는 잃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상실삼 따위를 느낄 수 없었다. 지금 이순간 이 격렬한 세계가 주는 자극과 고통을 견디기에도 그의 에너지는 벅찼다.-122쪽
문득 이 세상을 살아본 적이 없다는 느낌이 드는 것에 그녀는 놀랐다. 사실이었다. 그녀는 살아본 적이 없었다. 기억할 수 있는 오래 전의 어린 시절부터, 다만 견뎌왔을 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선량한 인간임을 믿었으며 그 믿음대로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았다. 성실했고, 나름대로 성공했으며, 언제까지나 그럴 것이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후락한 가건물과 웃자란 풀들 앞에서 그녀는 단 한번도 살아본 적 없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다.-1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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