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하건데 나는 이 영화가 에로 영화인줄 알았다. 극장에 걸렸으니 에로물이 아니라면 적어도 에로틱을 표방하기는 하겠지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Sex라는 글자로 인한 선입견이자 한국에서 한 택도아닌 저 영화의 마케팅에 속은 것이었다. 영화의 제목을 조금만 더 주의깊게 보면 better then 이라는 단어도 보였을텐데 말이다.
이 영화에는 남녀가 주인공이다. 그들은 어찌 어찌 해서 하루밤을 함께 보내게 된다. 서로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고 알 필요도 없는 그냥 원나잇 스텐드 였다. 아침에 눈을 뜬 곳이 호텔이었다면 '니가 먼저 나갈래 내가 먼저 나갈까?' 했을법한 이 남녀. 허나, 마침 여자의 집에서 밤을 보낸지라 조금 더 여유가 있다. 적어도 나갈 순서를 정하지 않아도 되는 여유 정도는 있는 것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남녀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다. 나이도 먹을만큼 먹어서 Sex라는 단어만 들어도 얼굴을 붉힌다던가 '그게 뭐에요'따위의 촌스러운 순진한척도 필요 없다. 그들은 서로를 만나기 전에도 즐길만큼 즐겼고 또 진지할 만큼 진지했던 사람들이다. 그리고 아침에 잠깐의 밍기적이 서로에 대해 좀 더 알아보고 싶은 호기심으로 발전을 하게 된다.
남녀가 만나고 외모에 호감을 가지고 대화를 좀 나누다가 관심을 가지게 되고 다음번 만날 약속을 하고, 늘어가는 만남 속에 조금씩 사랑이 싹트고, 손을 잡고, 키스를 하고, 사랑을 하고 제일 마지막에는 Sex로 자신들의 사랑을 정신적 육체적으로 완전한 것을 만드는 것이 보통 평범한 수순일 것이다. 그러나 이 두 남녀는 거꾸로 간다. 만나자 마자 Sex를 시작하고 그 이후에 서로에 대해 알아간다. 그리고 영화는 말 한다. 거꾸로 간다고 해서 세상이 뒤집히진 않는다고
내 생각이지만 이 영화는 Sex에 대한 경험이 전무후무 하거나 남녀 관계에 대해 환상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산전수전에 공중전 까지는 아니더라도 남자? 만날만큼 만나봤지. 여자? 겪을만큼 겪어봤지 정도의 관록이 있어야 유쾌하게 볼 수 있는 영화이다. 그리고 유쾌를 넘어서 고개를 끄덕이는 이해까지 하고 나면 더욱 재밌는 영화이다.
영화는 단 하루이다. 이들이 Sex를 하고 서로에 대해 호감을 가지게 되는 기간이 좀 짧다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영화의 러닝타임을 모두 단 하루에 소비해서인지 2시간만에(영화의 최대 러닝타임) 만나고 사랑에 빠지고 때로는 죽기도 하는 다른 영화들 보다는 아이러니 하게도 더 긴 시간의 무게를 지닌다.
영화를 보면 서로의 생각이 독백으로 흘러 나온다. 그건 남녀의 차이를, 개인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맘속과 다른 얘기를 입으로 꺼내는지도 보여준다. 사실 우리가 머리속으로 하는 생각들이 전부 글이나 말로 쏟아진다면 정말 정신 없을 것이다. 온종일 여자의 집에서 둘이 뒹구는 것만 보여주는 영화임에도 단조롭지 않은 것은 바로 그들의 생각이 독백으로 바로바로 쏟아져 나오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내용과 상관이 없는 소릴 하나 하자면. 여자 주인공은 백인 특유의 얼룩덜룩한 피부를 가졌는데 클로즈업 할때 정말 깜짝 놀란다. 특히 피아노 치는 장면에서 압권이다. 비디오로 보면 좀 덜한데 영화관에서는 모두 탄성을 지를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