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덕 성령충만기
이기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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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성질은 더러웠으나 제대로 된 반항한번 못해봤던 중고딩 시절. 나는 고모의 손에 이끌려 싫어 죽겠는 교회를 억지로 다녀야 했던 경험이 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영접할 좋은 기회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의 나는 그저 방언을 하는 옆에 아저씨가 무서웠고, 박수치며 동시에 우는 아줌마들이 섬찟했으며, 주님을 조우님 이라고 발음하는 목사님이 괴상할 뿐이었다. 그러나 집안에서 꽤 큰 파워를 가지고 있던 고모를 상대로 감히 '교회 가기 싫은데요?' 그 한마디를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꽤나 많은 일요일. 또 꽤나 많은 방학동안 교회의 이런저런 행사에 불려다녔다. 그 속에서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싹텄느냐 하면? 그렇다면 내가 지금처럼 일요일마다 오후 한시까지 퍼 자는 일은 언감생심 꿈도 못 꿨을 것이다.

특정 종교를 비하할 생각은 없다. 뭐 내가 불교에는 어지간히 두터운 신임을 가지고 있거나 몰몬교, 남묘호랭계교 (이게 맞나?) 힌두교, 사이언톨로지교 등에는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나처럼 종교가 없는 인간의 관점에서 보는 종교란 전부 약간씩은 웃긴 (우습다는 얘기가 아니라 말 그대로 웃긴) 구석들이 있다. 짧은 내 생각에는 그렇다. 신이 있긴 있어도 뭐 우리가 거기다 대고 경배하고 찬양한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것 없는. 종교인들이 들으면 입맛을 다시며 나를 전도하려고 난리를 칠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내 생각은 신은 신들의 세상에서 인간은 인간의 세상에서 각자 잘 먹고 잘 살면 그만 아닌가 싶다.

이런 종교에 대한 약간의 할랑함과 그나마 중고딩때의 경험으로 나는 교회. 즉 기독교에 대해서는 다른 종교들 보다는 좀 더 가벼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딴건 몰라서라도 가벼울수가 없다.) 근데 이 가벼운 마음을 이기호가 간질간질 간지려 준다. 최순덕 성령충만기를 통해서 말이다. 기독교에 심취한이들이 읽으면 상당히 불경스러울지 모르겠지만 딱 나같은 인간은 정말 생각없이 뒹굴며 웃을 수 있었다. 물론 이 책은 최순덕 성령충만기 이외에도 일곱가지의 단편들이 더 있지만 이 최순덕 성령충만기가 워낙에 출중한지라 사실 다른건 생각도 안난다.  

일단 최순덕의 성령충만기는 전부 성경책과 같은 문체로 또 같은 포멧으로 짜여져있다. 몇장 몇절 말씀이라 부를 수 있도록 장과 절이 매겨져 있으며 어투또한 가라사대 이르매 하였더라 하는지라 등등 성경을 그대로 패러디하고 있다. 그러나 단지 이 두가지가 전부였다면 그리 기발하다 할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 속에 담긴 내용이다. 정말이지 '배짼다'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의 포복절도할 내용들로 가득차다. 어떤 느낌이냐면 웃기려고 작정하고 웃기는게 아닌. 본인은 웃길 생각이 거의 없는데도 불구하고(오히려 내용은 진지하고 심각하다.) 읽는 사람을 구르게 만든다. 이건 자기 자신도 남을 웃기는지 알고 있을때 보다 성공만 하면 훨씬 더 오래 타인을 구르게 할 수 있는 힘을 가진다.

내용은 별거 없다. 교회 버스 운전사인 아버지와 교회 사찰 집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최순덕은 모태신앙답게 하나님 말씀을 따르고 그 안에서 사는 삶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아이이다. 학교에 들어가서도 교과서보다는 성경책을 더 열심히 보고 중간고사나 기말고사보다 여름성경학교 퀴즈대회가 더 걱정되는 그런 아이가 바로 최순덕이다. 그러다 남들이 대학을 갈때도 또 취직을 할때도 오직 교회 안에서 살다시피 하는 최순덕을 보고 목사님이 말씀하신다. 꼭 교회 안에 있는것만이 하나님을 섬기는 최대의 일이 아니라고. 세상에 나가서 하나님이 어떤 곳에 자신을 쓰려고 했는지를 찾으라고 한다. 그저 교회 안에서 하나님만 열심히 믿으면 되는줄 알았던 스물 두살난 아현동 처녀 최순덕은 이때부터 자기의 쓰임을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그녀가 마침내 발견한 자신의 쓰임이란? 정말 골때리기 그지 없다. 그러나 이 모든 골때리는 과정들이 조금의 희화도 없이 모두 진지한 어투로 (성경 말투니 어디 진지하다 뿐이겠는가만은) 담담히 나열되어 있다. 그리고 아까도 말했지만 그게 더 웃긴다.

나머지 7개의 단편들도 그럭저럭 재미있지만 나는 이 책이 최순덕 성령충만기라는 단 하나의 단편만 있었다 하더라도 분명 사서 읽을 가치가 있지 않나 싶다. 이기호가 단편에서 그리고 있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우리가 존경하거나 본받을 만한 아니 하다못해 이 사회의 멀쩡한 구성원으로 끼워주기조차 좀 뭣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못 배우고 못 입고 못 먹는 그들. 그렇지만 이기호가 그리는 그들의 삶이 결코 우스꽝스럽지는 않다. (웃긴것과 우스꽝스러운 것은 천지차이다.) 이런 못난 인간들도 이 사회에는 분명 존재하니 우리모두 사랑합시다라는 계몽적 메세지를 전하지도, 그렇다고 해서 이런 인간들도 있으니 우린 그보다 훨씬 낫지 않소? 하는 자조적인 목소리를 내지도 않는다. 그냥 있는 그대로 그 사람들을 전해줄 뿐이다. 그런데 그게 참 웃긴다. 어쩌면 그 웃김은 울다가 결국에는 어딘가에 털난다는 사실도 망각한채 울게 만드는 웃김인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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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12 16: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픽팍 2006-05-20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페이퍼란 잡지에서 강추하던데 살까 말까 고민하던 중 님의 글을 읽고 나서 사기로 작정 ㅋㅋ추천할께요 땡쓰 투도 하고 갑니다.

플라시보 2006-05-20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픽팍님. 아.. 전 되게 재밌게 봤는데 님도 재밌게 봤으면 좋겠어요. 페이퍼에서 이 책을 강추했군요. 흐흐.^^ 요즘은 그 잡지 안본지가 한참 된 것 같습니다.

일하 2006-09-05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웃겨요 ㅋㅋㅋ
꼭 사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