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기담집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사 / 2006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실증을 잘 내는 편이라 무언가를 꾸준하게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인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한 관심과 애정 만큼은 그의 책을 처음 보았던때 부터 십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똑같다. 하루키의 책은 워낙에 많은 출판사에서 번역이 되었고 단편집들 같은 경우에는 출판사에서 자기들 멋대로 제목을 붙이는 바람에 똑같은 단편집 (그러나 제목과 출판사는 다른) 을 사는 실수도 왕왕 저질렀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하루키의 새 책 (혹은 새 책으로 착각할 만한 새로운 제목을 단 책) 이 나오면 설레어 하며 책을 구입한다. 그렇다고 해서 하루키가 세기에 하나 날까말까 한 위대한 작가라던가 하루키가 쓴 책은 모두 대단해서 입이 쩍 벌어질 정도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는 하루키 정도는 우습게 여길만큼 글을 잘 쓰는 작가들이 별처럼 많고, 비록 대단찮은 독서력이지만 그런 작가들의 책을 수도없이 읽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글을 잘 쓰는 작가라 하더라도 내가 하루키에게 보내는 애정과 관심의 반 만큼이라도 받은 작가는 일찌기 없었다. 앞으로도 큰 이변이 없는 한 계속 없을 것 같은데, 그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 나 역시도 하루키가 매우 대단한 작품을 쓰는 대단한 작가라고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이런 변함없는 열정을 보내는 원인을 도통 찾을수가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그냥 좋으니까 좋다 정도 밖에는 도저히 설명할길이 없는 일들이 있는데 내 경우는 하루키에 대한 사랑이 (정확하게는 그의 작품에 대한) 그런게 아닌가 싶다.

그래도 무언가 원인이 있을거라며 깊이 찾아본다면 한가지 쯤은 이유를 댈 수도 있다. 그건 그의 작품이 그다지 어렵게 쓰이지 않은것 같기 때문이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100% 나의 상상이자 느낌이지 실제로 하루키가 어렵잖게 작품을 척척 써댄다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진짜 하루키는 작품 하나를 내기 위해 일찌기 이땅의 아이돌스타 서태지가 말했듯 뼈와 살이 내리는 고통을 겪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실제의 하루키가 어떻게 작품을 썼느냐가 아니라 그 작품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를 말 하는 것이다. 너무도 피땀흘려 정말 최선을 다해 작품을 썼어요라는 느낌의 작품들과 하루키의 작품은 분명 분위기가 다르다. 그러니까 하루키의 책을 읽을때면 언제나 초저녁쯤에 지는 해를 보다가 '글이나 써 볼까?' 하고 연필 한자루를 쥔 다음 쓱쓱 써내려간 (실제로는 워드프로세서나 컴퓨터를 이용하겠지만) 느낌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느낌 때문에 하루키의 작품이 그다지 대단치 않다 하더라도 늘 변함없는 사랑과 애정과 관심을 쏟아붓는 것이다. 책에서 진지함이나 심각함을 느끼는 경우는 많지만 이런 류의 슬렁슬렁을 느끼기는 정말 드문 일이다. 여행으로 비교를 하자면 다른 책들은 발품 팔아가며 지도 봐가며 힘들게 이곳 저곳을 찾아다니고 사진또 찍고 메모도 남기는 느낌이라면 하루키의 책은 야자수잎이 팔랑거리는 그늘에 누워서 쪽빛 바다를 바라보며 (늘씬한 비키니 미녀나 초컬렛색 살결의 서퍼들도 물론 있는) 이름은 모르지만 무척이나 달디 단 열대 과일 음료를 쪽쪽거리며 빨아먹는 느낌이다.

도쿄기담집은 하루키가 꽤 오랜만에 낸 단편집이다. 처음에 제목을 봤을때는 혹시 렉싱턴의 유령을 또 다른 출판사에서 새로운 이름을 붙여 출간한게 아닌가 했었는데 단편들의 제목을 보니 처음 보는 이름들이었다. 내가 렉싱턴의 유령과 도쿄 기담집을 착각한 이유는 둘 다 조금은 기이한 얘기들의 단편을 모아놓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괴담집의 수준은 아니다. 그냥 말 그대로 조금 혹은 약간 기이한 얘기들 정도이다. 그리고 그 얘기들은 어떤 공포심도 무서움증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난 그런 얘기들에 매우 질색하므로 아무리 하루키라 하더라도 괴담집은 곤란하다.)

하루키는 생각보다 (정확히는 내 느낌보다) 꽤 영특한지 도쿄기담집의 제일 처음 단편에 자신이 겪은 기이한 이야기를 적어놓았다. 그러니까 픽션이 아닌 논픽션으로 하루키가 직접 겪은 이야기가 두개. 또 들은 얘기가 하나 실려있다. 그러면서 하루키는 말한다. 자기는 픽션을 쓸때는 확실하게 모든걸 다 지어내지만 논픽션일때는 아니라고 한다. 첫 단편인 우연한 여행자는 하루키가 겪은 얘기 혹은 들은 얘기지만 그 이후부터는 모두 자기가 지은 얘기라는 것이다. 그러나 매우 기묘하게도 하루키의 진짜 얘기를 들은 다음이라 그런지 나머지 단편들도 모두 실제 일어난 약간은 괴이한 논픽션으로 느껴진다. 하루키는 아니라고 해 두었지만 어느새 독자들은 하루키의 진실한 말 보다는 그가 쓴 실제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진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자칫 뭐 별로 대단치도 않구나 하고 코웃음을 칠 만한 얘기들이 (괴담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확실히 이 작품집은 그래서 어쨎다고? 할 소지가 다분하다.) 꽤 그럴사하게 들리게 된다.

예전에 전설의 고향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었다. 그리고 그 비슷한 외화로 환상특급이란게 있었다. 하지만 나는 둘 다 좋아할 수 없었다. 그것들은 나름 재미는 있었지만 좋아하기에는 지나치게 무서웠었다. 그러나 X파일이 나왔을때의 나는 그 작품에 흠뻑 빠져서 살았더랬다. 약간 기이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섭지는 않은. 딱 그 중간의 경계점에 X파일이 있었기 때문에 마음놓고 열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루키의 이번 작품은 그런점에 있어서 X파일과 매우 흡사했다. 따라서 나는 마음놓고 열광하며 오늘 하루의 거의 대부분을 이 책을 읽는데 쏟아 부을 수 있었다.

좀 괴기스럽거나 아니면 슬쩍 으시시하기라도 하길 기대한다면 하루키의 도쿄 기담집은 실망스러운 책이 될 것이다. 하지만 나처럼 무서운건 질색하지만 약간 괴이한거라면 좋아하는 사람인 경우 이 책은 매우 만족스러울 것이다. 하루키책의 특징인 가독성도 좋아서 책장이 술술 넘어가기까지 한다. 너무나 재밌는 얘기들이 실려있다는 얘기를 하긴 힘들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재밌는 얘기들이고 적어도 읽다가 던져놓은 다음 언제까지나 접힌 책장을 보며 찝찝해할 일은 없을 것이다.

끝으로 하루키에게 개인적인 바램 하나를 말해도 된다면 부디 내가 상상하듯 진짜로 그렇게 슬렁슬렁 작품을 썼으면 좋겠다. 그러면 진짜로 많은 작품을 낼 수 있을테니 말이다. 가뭄에 콩나듯 가끔 나오는 하루키의 작품은 나를 너무 목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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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4-26 2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빵가게 재습격, 그리고 레더호젠 이야기가 좋았습니다. 새롭다는 것 이외에도 레더호젠을 맞추러 갔다가 남편과 이혼하게 된 여자의 이야기는, 그 뒤로도 종종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일, 그저 공기 한 톨에 떨어지는 애정이 그렇게 명료하고 간단하게 쓰여진 이야기도 드물 거라 생각했거든요. 물론 하루키가 그런 의도로 썼는지는 모릅니다만, 멋대로의 독자인 저는 그저 그렇게 생각해버렸답니다.
일전에 리뷰에도 지나가는 이야기로 썼지만, 꼭 무라카미 류는 쉬운 이야기를 어렵게 하고, 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하는 것 같습니다. 꼭 어느 한 쪽이 진중하고 어느 한 쪽은 가볍다는 뜻이 아닌, 그저 각자의 뚜렷한 다른 스타일이 있는 듯 하다는 의미에서 그리 생각한 것이지요.
그런데 궁금한 점. 혹시 괴이하다고 해도 얼굴 껍질을 벗기는 옛 외화 시리즈 V 같다거나 혹은 잔혹동화처럼 뭔가 잔인하고 찝찝하다든가..그런 느낌은 아니겠지요? 이 책은 읽고싶은데 혹시 그런 느낌일까봐 망설였거든요.

Koni 2006-04-27 0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재미있게 읽었어요. 벌써 십년이 넘도록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순정을 바쳐오고 있습니다.^^ Jude님, 플라시보님 대신 살짝 말씀드리면 잔인하거나 잔혹한 이야기는 없어요.^^

플라시보 2006-04-27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Jude님. 전혀 아닙니다. 그냥 살짝 괴이한 정도지 절대 무섭거나 찝찝하거나 잔인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전 이걸 읽고 잠을 설쳤을껍니다.(생각보다 겁이 많거든요.) 저는 하루키 단편집 중에서 세라복을 입은 연필을 좋아합니다. 치즈케잌 모양의 가난도 좋아하구요. 진지한것도 좋은데 전 하루키가 구사하는 유머가 너무 좋더라구요.^^ 님 말씀처럼 류는 쉬운 이야기를 어렵게하고 하루키는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하는것 같습니다. 둘 다 정말 개성이 뚜렷한 작가지요? 저는 하루키를 여동생은 류를 좋아하는데 류의 작품 중에서는 코인로커 베이비스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하루키는 장편보단 오히려 단편을 더 좋아하는 편이구요. 그리고 이 책 님께 권하고 싶어요. 재밌는 독서가 될껍니다.^^

냐오님. 호호. 안그래도 이 책에 딸려나온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들 리스트를 보니 제가 한권도 빠짐없이 다 읽었더라구요. 님도 하루키를 좋아하신다니 반갑습니다. ^^

알맹이 2006-09-07 2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공감가는 리뷰네요. 저도 하루키 광팬이라서~ 내가 왜 하루키를 그렇게 좋아하는지 조금 생각해 보게 만드셨어요. 추천 누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