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탄 - '따뜻한 한반도 사랑의 연탄나눔운동'과 함께하는 스물네 개의 훈훈한 이야기
김지하 외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9월
평점 :
품절


내가 유치원을 다닐 무렵쯤이다. 당시 우리집은 아파트였는데 요즘 아이들이 들으면 뻥이라고 하겠지만 그때는 아파트에도 연탄 보일러인 곳이 많았다. 이른바 서민 아파트라고 불리우는 그 연탄 보일러 아파트는 방2개에 거실이라 하기에는 좀 뭣한 마루, 타일이 깔려 있어서 신발을 신어야 하는 부엌, 그리고 화장실이 있었다. 욕실은 아예 없었다. 지금은 수도꼭지에서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는건 상상도 하기 힘들지만 그 아파트에서는 따뜻한 물을 쓰려면 연탄보일러 위에 커다란 솥을 올려놓고 물을 데워야 했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조막손으로 연탄을 갈거나 솥에 물을 길러놓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러기에 난 너무 어렸고, 엄마는 집에서 살림만 하셨으므로. 그냥 우리집에 연탄이 있었다는 것 정도. 겨울이 되면 마루에 있는 연탄광 (아빠가 마치 옷장처럼 직접 짜서 붙박이로 만들어놓은) 에 연탄을 차곡 차곡 쟁여 놓던 기억이 전부이다. 이상하게 엄마가 연탄을 가는 모습은 떠오르지 않는다. 거기에 가끔 마른오징어나 고구마, 밤 같은걸 구워주던 기억은 나지만 말이다.

그 이후 우리집은 기름 보일러를 쓰게 되었고 뒤 이어 가스보일러 (LPG), 다음에는 도시가스를 쓰게 되었다. 그러나 그 전에 딱 한번 나는 갈곳이 없어서 혼자 생활한 적이 있었다. 아마도 중학교 1학년 정도 였던것 같다. 아빠도 나를 맡을 수 없는 상황이었고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나는 허름한 동네에 단칸방에서 혼자 살게 되었다. 밥은 아빠의 그녀네 집에 가서 먹었지만 (거리가 멀지 않음) 그 이외에 모든걸 다 내가 해결해야 했다. 그 단칸방은 연탄보일러였다. 참 지독스럽게도 연탄을 많이 갈았다. 꺼트리기도 많이 꺼트리고 말이다. 그때 나는 창피해서 아무에게도 내가 연탄을 가는 집에 혼자 산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었다. 아침이면 그녀들과 마찬가지로 욕실에서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고 등교를 하는 척 했었다. 사실은 마당에서 발꼬락이 다 얼어붙을것 같은걸 간신히 참아가며 머리를 감고 양치를 했지만 말이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나는 이게 가난이구나 싶었다. 중1 짜리가 혼자 살면서 연탄불이 꺼질까봐 조마조마해 하는것. 내 부모들은 그때 기름 보일러를 때며 살았었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나는 나 혼자 가난했다.

그 기억이 남아있어서인지 나는 한옥을 보면 운치있다는 생각 보다는 가난이라는 단어가 먼저 떠 오른다. 저 욕실도 없고 화장실도 불편한 한옥. 수도 꼭지에서는 차가운 물만 나오는 한옥. 겨울이면 허술한 집 구멍으로 찬바람이 휙휙 불어닥쳐서 여기가 집 안인지 밖인지 구분도 안가는 그곳. 그래서 그런지 나는 주택도 싫어한다. 오직 성냥갑처럼 답답해도 사방이 콱콱 다 막혀있는 아파트가 좋다. 늘 거기서 살았던게 습관이 되어서인지 아니면 거기 살때는 단 한번도 춥다는 생각을 못해서였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연탄은 각계각층의 스물 네 사람이 연탄에 얽힌 추억들을 얘기한다. 지금이야 어지간해서는 찾아보기 힘든 연탄이었지만 80년대 까지만 하더라도 연탄은 흔한 난방연료였다. 골목마다 겨울이면 연탄재들이 쌓여 있었고 빙판길에는 어김없이 잘게 부신 연탄재가 뿌려져 있었다. 전체적으로 수필집을 읽는 것 같은데 한 사람이 쓴게 아니라 지겹지 않으면서도 연탄이라는 한 가지 주제로 몰려 있어서 느낌이 새롭다. 연탄하면 딱 떠오르는 서민들의 고난한 삶, 어머니의 사랑 (연탄을 가는 사람은 늘 어머니니까) 같은 따분한 얘기를 하는 사람도 있지만 가끔은 연탄이 트라우마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어서 책은 지겹지 않다.

많은게 그렇듯이 언젠가는 연탄도 그저 책 속에 혹은 생활전시관 같은 곳에서나 볼 수 있는 물건으로 전락하겠지만 아직까지는 그래도 연탄을 몸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젊은 세대들에게 연탄한번 안 갈아본 것들이 뭐 인생을 논하느냐라고 말 할것은 없지만 그들은 연탄을 모르고 또 모르는 만큼 추억도 없는건 맞다. 그게 좋은 추억이건 나쁜 추억이건간에 세월은 모두 다 아련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래서 연탄의 그 매케한 냄새도, 맞추기 힘든 불구멍도 아련하게 느껴지는 것이리라. 연탄을 갈아봤다면, 연탄의 따뜻한 아랫목을 기억한다면 올 해가 가기 전에 이 책은 그 추억들이 방 바닥으로 다시 굴러다니게 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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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마개 2005-12-22 1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탄...저희집도 연탄보일러였죠. 보일러 속뚜껑 위에 밤을 올려 놓고 겉뚜껑을 닫은후 한참 놀다 오면 군밤이 되어 있는 즐거운 기억과 연탄가스를 마시고 몽롱하게 쓰러져 있던 기억도 있고. 연탄은 항상 아빠가 갈았죠. 가끔 아무도 없을때 제가 갈면서 보일러 내부에서 다 탄 연탄이 홀라당 깨져버릴 때의 그 당혹스러움..ㅋㅋ

플라시보 2005-12-22 2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쥐님. 맞아요. 그 안에서 깨지면 정말 답이 없었죠. 연탄가스 사고도 참 많았었는데... 이젠 겨울이와도 골목에서 연탄재를 보는 일이 드물어졌습니다.

BRINY 2005-12-22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집은 아버지가 오랫동안(막내동생이 태어난 직후부터 대학생이 될 때까지!) 지방으로 단신부임하셔서 엄마 혼자 무척 고생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플라시보 2005-12-23 0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RINY님. 아..정말 오래 떨어져서 지내셨네요. 어머님 고생이 많으셨겠어요.

산사춘 2005-12-25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엄마도 연탄 때문에 무지 고생하셨는데... 플라시보님은 직접 고생을... 흑흑
저는 연탄만 보면 고작 불장난이나 해서 디지게 얻어맞은 기억밖에 없시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