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 사회 일상의 성정치학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생각해보면 나는 내 또래 여자아이들 치고는 꽤나 차별 없는 환경에서 자랐다. 우리 집에는 귀한 아들. 내게는 오빠 내지는 남동생쯤 되었을 그들 대신 나와 내 여동생 이렇게 딸만 둘이었으니까. 가끔 사람들이 아빠에게 정말로 아들을 보지 않을 것인지 물으면 아빠는 말했다. 딸로도 충분하다고. 자식은 아들이나 딸이나 다 똑같다고. 정말로 아빠는 단 한번도 남의 집 아들을 부러워하거나 혹은 아들을 낳고 싶어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주위에서 보면 눈살을 찌푸릴 정도로 여동생과 나를 금이야 옥이야 키우셨다. (벌초를 하러 가면 우리의 종아리가 풀에 베일까봐 하나씩 업고 산을 오르셨다. 처음에는 욕을 하던 친척들도 몇 해 그렇게 하니까 자연스러워져 버렸다.)

그래서 나는 다른 집 딸들도 다 나와 내 여동생처럼 자라는 줄 알았다. 그러나 초등학교를 들어가서 그게 꼭 그렇지만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인형놀이를 하다가도 우리 집에서 같이 수다를 떨다가도 오빠가 있는 애들은 일정한 시간이 되면 벌떡 일어났다. 나는 저녁을 먹고 가라고 했지만 그녀들은 말했다. '가서 오빠 라면 끓여줘야 해' 혹은 '가서 오빠 밥 차려줘야 해' 심지어 내 친구 중 한명은 남동생에게 주기적으로 얻어맞기까지 했다. 우리 집에서는 여동생이 나를 때리는 하극상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물론 나도 여동생을 때려서는 안 되었지만) 어떻게 동생한테 맞을 수가, 아니 그 보다 그걸 부모님들이 아는데도 왜 그 남동생을 가만히 둘까 라는 생각을 했었다.


남동생이나 오빠가 없어서였건 아니면 우리 아빠의 생각 때문이었건 아무튼 집에서는 여자라서 차별을 받거나 하는 일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사회는 내게 아빠처럼 해 주지 않았다. 초등학교에서 반장 선거를 할 때. 나는 자격이 되었지만 부반장이 되었다. 반장 선거에는 아예 나갈 수가 없었다. 왜냐면 나는 여자였기 때문이었다. 전교 어린이 회장을 뽑을 때도 나는 나갈 수 없었다. 전교 어린이 회장은 반장만 출마할 수 있는데 그 반장이 되려면 내가 남자여야 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최대한 학교에서 감투를 쓸 수 있는 것은 부반장 내지는 전교 어린이 부회장이었다. 그건 내 실력이나 모자람 때문이 아니라 단지 내가 남자아이가 아니기 때문이었고 나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유독 힘들었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여자 아이들만 다니는 곳에 있어서 그나마 별 차별을 느끼지 못하며 살았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가니 또 다시 초등학교 때 느꼈던 차별을 느껴야 했다. 과대는 전 부 남자였고 여자 후배들은 남자 선배들 앞에서 감히 맞담배를 피울 수 없었다. 술자리에서 담배를 피우는 여자 후배들은 종종 따귀를 맞기까지 했다. 담배를 피운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었지만 우리는 대단한 남자 선배들 앞에서는 마치 담배를 피우지 않는 여자들처럼 행동해야했다. 나는 남자 선배들 앞에서도 담배를 피우고 싶었다. 그래서 영화와 뮤직비디오를 만들 때 남자처럼 일했다. 나도 밤을 새우고 40kg 짜리 카메라를 어깨 빠지게 들고 있었다. 그러자 드디어 그들은 내게 큰 인심을 쓰는 양 입에 담배를 물려주고 불도 붙여줬다. 나는 그때 내 노력으로 마침내 나도 남자 선배들 앞에서 담배를 필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건 억지였다. 여자로써 도저히 무리인 4일 연속 밤새기 (낮에 수업 듣고 밤에 편집하고 촬영을 하는데 여학생들은 보통 이틀 밤을 새고 집에 한번 갔다가 온다.) 를 무리하게 했던 것이다. 나는 그때 평등이 그런 건줄 알았다. 내가 남자들과 똑 같아지는 것. 그래서 그들이 누리는 것을 나도 누리는 것. 비교적 평등한 환경 속에서 자랐던 나조차도 남녀평등을 그렇게 알고 있었던 것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페미니스트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언젠가 아빠가 그런 얘길 했었던 게 기억이 난다. 페미니스트 중에서 예쁜 여자를 본 적이 있냐고. 전부 페미니스트 아니면 딱 안 될 것 같은 얼굴들을 하고 있지 않냐고. 내가 기자 일을 할 때 취재를 나가면 사람들이 가장 놀랐던 것은 내가 안경을 쓰지 않고 바지를 입지 않고 머리카락도 길다는 것이었다. 여기자 하면 딱 정형화된 이미지가 있었고. 그 이미지에 맞지 않는 나를 그들은 매우 신기하게 여겼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페미니스트들에게도 이런 편견이 존재한다. 그녀들은 못생기고 뚱뚱하고 자기 자신의 외모를 가꾸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을 것이라는, 그래서 페미니스트이며 페미니스트 일 수밖에는 없을 것이라는 편견. 예쁜 여자들이 페미니스트가 아닌 것은 그녀들은 그냥 예쁜 여자로서의 특권을 누리는 게 훨씬 더 이익일 텐데 뭣 하러 못생긴 다른 여자들과 섞여서 남녀평등을 주장하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부끄러운 생각이 아닐 수 없다. 여자인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데 단 한번도 여자로 살아보지도 또 여자의 삶이 어떤지 생각조차 안 해봤을 남자들은 어떻겠는가? 그들은 분명 페미니스트를 못생기고 목소리 큰 여자들로 생각 할 것이다.


이 책 페미니즘의 도전은 제목은 과격하나 내용은 결코 과격하지 않다. 투쟁해서 쟁취하자는 익숙한 구호도 눈에 뜨이지 않는다. 책은 우리에게 여태 잘못 알고 있었던 점들을 조목조목 지적 해 준다.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썼던 말들. 이를테면 중앙에서 누가 연설을 할 때 뒷자리에서 떠들면 지방방송을 끄라고 하라던가 (엄연한 지역적 차별이다. 중앙방송은 떠들어도 되고 중앙방송이 하는 동안에 지역 방송은 무시되어도 상관없다는 논리에서 나온 말이다.) 국민은 국방의 의무를 지닌다는 말 (여자들은 국방의 의무가 없고 따라서 이 말은 여자는 국민이 아니라 2등 국민이라는 소리가 된다.) 모두가 엄연한 차별적 발언이다. 페미니즘의 도전은 물론 여성들이 이 사회에서 차별을 당하는 현실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하지만 그 뿐 아니다. 우리가 여성이라고 규정지은 속에 장애인 여성, 늙은 여성은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도 말하고 있다. 페미니즘에 대한 말을 많이 들어봤지만 그 말 속에 또 다른 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한 책을 읽어보는 건 처음이라 나는 꽤 충격을 받았다. 나도 모르게 여성이라고 함은 당연히 20대 초반에서 30대 후반까지를 말하는 것이며 (그 전은 어리고 그 이후는 너무 늙어서 여자라기보다는 엄마 혹은 아줌마로 대표된다고 생각했다.) 그녀들은 보통의 아이큐와 정상적인 신체를 가지고 있다고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었다. 그러니까 내가 말하는 여성에 너무 어리거나 나이 들거나 혹은 신체적 정신적으로 이상이 있는 여성은 여성의 범주에 집어넣지도 않았던 것이었다.


사실 차별은 겪어보지 않으면 마음에 확 와 닿기가 힘들다. 내가 겪지 않은 일을 단지 듣는 것으로 똑같이 느끼기는 어렵다. 하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우리가 겪은 많은 일들 중 확실하게 차별은 존재했었고 성희롱도 존재했었다. 다만 그걸 사회생활 하다 보면 혹은 세상이 다 그러니까 하며 어영부영 넘어갔을 뿐이다. 우리가 대단한 폭력을 신체적이던 정신적이던 겪지 않았다고 해서 세상이 여자들에게도 남자들과 똑같은 기회와 편의를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사무실이 지저분하면 남자들은 전부 여자 직원을 쳐다본다. 커피를 마시고 싶어도 여자 직원에게 말한다. 좀 상냥한 부탁 어조로 바뀌긴 했지만 커피를 타서 줘야하는 사람이 우리라는 사실은 변함없다. 시키는 방법이 좀 더 부드럽고 좀 더 예의 있게 바뀌었다고 해서 본질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김 양아 커피 타와라' 나 '미스 김 커피 한잔 부탁해요' 나 결국 자기가 마시지도 않을 커피를 타서 남자에게 주어야 하는 것은 김씨 성을 가진 여자인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정말 많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많은걸 새로 알게 되었다. 여태 몰랐던 것들 그리고 알았지만 그게 뭐 큰일인가 하고 넘어갔던 부분들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는 계기를 가지게 되었다. 이 책은 읽고나서 당장 페미니스트가 되라고 말하지 않는다. 남자들을 향해 그리고 세상을 향해 외치며 투쟁하라고 강요하지도 않는다. 다만 우리가 너무나 잘못 알고 있었던 혹은 알지만 그게 문제인지조차 몰랐던 것을 알게 한다. 흔히 미술대학을 가면 오직 그림을 그리는 실기만이 중요하다고 생각을 한다. 그러나 여동생의 말에 의하면 이론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한다. 그녀는 자신의 학교에 과제도 많지만 각 미대를 순방하면서 세미나를 했던 프로그램이 가장 좋았다고 했다. 나는 페미니즘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구호를 외치고 실천하고 행동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이전에 나는 이론적으로 확실하게 정립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막연하게 여자도 남자와 똑같다고 주장하는 것이 페미니즘은 아닌 것이다. 그렇게 되면 여자도 군대를 갔다 와야 한다고 생각하고, 나처럼 4일 밤을 새고 그 무거운 카메라를 드는. 평등이란 남자 같아지는 것 이라는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이론서로 조금의 부족함도 없다. 물론 더 알아야 할 것이 많겠지만 적어도 이 한권만 읽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많은 것들을 다시 생각하고 판단하게 될 것이다.


여성이 얼마나 차별을 받는지 혹은 피해를 받는지에 대한 사례를 늘어놓아서 분노를 끓게 하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게 하는 여타 페미니즘 관련 서적들도 물론 필요하겠지만. 나는 이렇게 차분하게 이론적으로 하나하나 풀어가는 책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고 또 위에서 언급한 책을 읽을 때 비로소 우리는 페미니즘에 대해 조금은 알게 되었다고 말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행동과 실천으로 옮길 수 있을 것이다.

 

덧붙임 : 끝으로 좋은 책을 선물해주신 마태우스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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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2-21 13: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플라시보 2005-12-21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분. 그러게나 말입니다.^^

코마개 2005-12-21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책 좀 다르게 읽었는데, 조만간 저도 리뷰를 쓰려구요.
플라시보님 아마 이제 100만권 여성학 교과서를 읽는 것보다 절절하게 여성의 한국내 정체성을 깨닫는 순간이 곧 올겁니다. 짜잔~

플라시보 2005-12-21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쥐님. 으음. 그건 곧 있을 제 결혼 생활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흐흐. 이 책을 어떻게 다르게 읽으셨는지도 되게 궁금해요.^^

로드무비 2005-12-21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산사춘님의 선물로 이 책을 읽고 너무 좋아서 두어 분께 선물했어요.
이렇게 생생하고 조목조목 잘 짚은 리뷰라니, 감탄하고 갑니다.^^

2005-12-21 21: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플라시보 2005-12-21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그러셨군요. 이 책 정말 읽어야 할 필독서인것 같습니다. 여자건 남자건 말이죠. 리뷰칭찬 감사해요. 부끄러워요. 흐..^^

속삭이신분. 고마워요.^^

마추픽추 2006-02-08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엔 티비를 보면 남자상사가 여자부하 직원에게 커피 심부름을 시키는 것에 대해 반감을 가졌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직접 회사를 다녀보니 그런 생각이 오히려 사라지더라구요
왜냐하면 여자는 커피나 정리를 하는 대신 남자는 무거운 물건을 들거나 뭐 그런 일을 하더라고요..
저는 그것이 차별이 아닌 남녀간의 암묵적인 역할 분담이 아닐까 생각한답니다.
부모님 세대를 보면 엄마, 아빠의 가사 역할이 음식/ 못 박기 그렇게 대략 나뉘어지는것처럼요..

그런데 여기서 불만의 소지가 생길 수 있는것은 설겆이를 하는 횟수나 커피 타는 횟수가 남자의 그 수고스러움보다 훨씬 많기 때문이 아닐런지..
다행히도 저는 강압적인 부탁(?)을 받지 않았고 남녀 차이로 인한 스트레스를 받아
보지 못해서 긍적적으로 생각한답니다.
상사는 나의 발전을 이끌어주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에게 자의든 타의든 커피를 타주는 것은 나의 자그만 배려라구요..참 행운녀인 셈이죠 ^^
이상 커피에 관한 저의 견해를 몇자 적어보았습니다.
'지역 방송 꺼'는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던 되새겨볼만한 말인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