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착
아니 에르노 지음, 정혜용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가장 싫어하는 소설이 있다면 자전적 소설. 그 중에서도 일기장식의 소설이다. 그저 자기가 겪은 일의 나열 혹은 배설 이외에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는 일기장 소설들. 저렇게 쓸 꺼라면 정말로 자기 일기장에나 적을 것이지 왜 출판을 하는가 싶은 소설도 적지 않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체험을 바탕으로 하지 않은 이야기가 얼마나 사실적이며 또 탄탄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생기는것 또한 사실이다. (그래서 작가들이 글을 쓰기 전에 그토록이나 취재를 오랫동안 하는 것이겠지. 하지만 어떤 작가들은 이 취재에 너무 게으른것 같다.)

어쩌면 문제는 체험을 바탕으로 하지 않았느냐 바탕으로 했느냐가 아니라. 이야기의 완성도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체험을 바탕으로 하더라도 이야기가 탄탄하다면 우리는 그걸 자전적 소설이라고는 부를망정 일기장 소설이라 폄하해서 부르지는 않을 것이다.

책 표지에 보면 아니 에르노가 이런 말을 해 두었다. '직접 체험하지 않은 허구를 쓴 적은 한 번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 이라고 말이다. 자신의 체험을 쓰는 것에 있어서 이 정도의 확고함과 나름의 철학을 가지고 있다면 어딘가 모르게 믿음이 간다. 그리고 그녀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아니 에르노의 집착은 한 사람의 내면을 파고든다. 그렇지만 거기에 신경질적인 집요함은 보이지 않는다. 아니 에르노는 솔직하면서도 담백하게 자신의 체험을 글로 녹여내는데 성공했다.

한 여자가 있다. 남자와 헤어졌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이 남자에게 새로운 여자가 생겼다. 그때부터 여자는 남자의 새로운 그녀가 궁금해서 죽을 지경이다. 처음에는 그저 어디사는 누굴까? 뭐 하는 사람일까? 어떻게 생겼을까에서 출발했으나 점점 여자는 광적으로 그녀의 정보에 대해 집착한다. 여자가 그의 그녀를 알기 위해 하는 상상들과 추론들은 정말이지 무릎을 치게 만든다. 그리고 이런것은 경험하지 않고 상상만으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자신의 얘기를 하는 사람들은 흔히 그것에 도취되어 있다. 주인공이 자신이며 느낌이나 감정도 모두 자신의 것이기에 이들은 스스로 그 얘기에 흠뻑 빠져있다. 그리고 남들도 자신과 똑같이 느끼거나 적어도 경외심. 혹은 놀람 정도는 느끼리라고 생각한다. 체험을 글로 옮기는 것의 함정도 바로 여기에 있다. 아무도 공감하지 못할 일들을 자기 혼자 그 이야기에 도취되어 집요하게 파들어가는 것. 그래서 결국 하고 싶은 얘기가 대체 뭐냐따위의 반응만 불러 일으킨다. 그러나 아니 에르노는 결코 그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 최대한 드라이하되 쿨한척 하지 않고 자세하되 집요하지 않으며 사실적이되 시시콜콜하지 않게 표현한다.

책의 내용에는 더이상 토를 달 부분이 없다. 분량도 너무 길지 않고 적당하다. 만약 여기서 더 길었더라면 상당히 너저분해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이 장편 소설로 분류되어 있으니 그것이 문제이다. 아니 에르노의 집착은 단편소설 분량밖에 되지 않는다. 허나 출판사는 책의 첫장부터 옮긴이의 말까지 다 합쳐서 겨우 79페이지 (딱 소설만 치자면 63페이지) 인 집착을 한권의 책으로 만들었다. 그 결과 책은 거의 팜플렛으로 보일 정도로 얇다. 아무리 거기다 하드커버를 씌워봐야 책의 얇은 정도를 감추기에는 무리다. 물론 책을 양으로 따지는 것은 무식한 짓이다. 책은 양이 아니라 질이니까. 하지만 그 책을 돈을 주고 사서 읽는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그게 영 무시할만한 것은 아니다. 책은 어차피 질에 따라 값을 매길 수 없는 것이므로 (그 질의 높낮음을 뉘라서 평가하고 기준을 세울 것인가!) 그래도 대충은 양. 즉 페이지 수를 따라가는게 정석이다. 하지만 79페이지의 이 소설책은 무려 7,500원의 가격을 달고 나와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책이 배달된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얇아도 정말 너무 얇아서 말이다.

그러나 책의 내용이 워낙 괜찮기에 이 모든건 용서가 된다. 어쩌겠는가 출판사에서 이 소설을 장편으로 말하면 장편인 것이고 단편으로 분류하면 또 단편이 되는것을. 아무튼 아니 에르노의 소설을 만나게 된 것은 행운이다. 여태까지 보지 못했던 문장력은 아니지만 그 표현의 섬세함과 디테일. 그러면서도 신경질적이거나 편집증적으로 보이지 않는 기술은 대단히 높이 평할만 하다. 거기다 스토리를 끌어내는 힘도 좋다. 딱 적당한 분배와 깔끔한 마무리. 정말이지 자신의 경험을 이 정도로 써 낼 수 있다면 우리는 거기에 대고 박수를 치는 것 이외에는 달리 할 것이 없다. 아무리 작가란 모름지기 허구를 만들어내는 이야기꾼이라는 생각을 하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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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향 2005-10-06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니 에르노 좋아합니다. 솔직 담백 맞습니다. 오늘 점심 서점 가서 보고싶은 마음이 굴뚝같네요.

플라시보 2005-10-06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렌지향님. 워낙에 책이 얇아서 아마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충분히 읽을 수 있을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