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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에셔, 무한의 공간 ㅣ 다빈치 art 14
모우리츠 코르넬리스 에셔 외 지음, 김유경 옮김 / 다빈치 / 2004년 2월
평점 :
품절
M.C. 에셔의 그림을 가끔 보긴 봤지만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지는 않았었다. 그러다가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에 등장한 에셔의 그림을 보고 나서 다음번에는 꼭 그에관한 책을 한권 사 보리라고 마음먹었었다. 그리고 읽은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에셔의 그림은 다들 한번쯤은 봤을 것이다. 무한하게 공간을 메우는 그림들. 어떤것을 보느냐에 따라 나머지가 배경이 되기도 하고 또 배경이 되었던 부분에 집중을 하면 아까 봤던 부분들이 다시 배경이 되기도 하는. 그러다가 마침내 위가 아래가 되고 벽이 천정이 되기도 하는 그림부터 무한하게 지속되는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그림까지. 그는 주로 소묘와 판화작업을 했는데 어떻게 보면 그의 그림들은 작품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수학적 유희처럼 보이기도 한다.
책에는 에셔의 판화와 그림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총 3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 장은 에셔가 삽화가 오에이 탱 시트와 함께 주고받은 편지를 수록하고 있으며. 두번째 장에는 에셔 본인이 강의를 위해 준비한 글들과 슬라이드 (여기서는 그냥 그림으로 인쇄되어 있다.) 를. 세번째는 에셔의 친구인 베르뮐러가 에셔에 대해 써 놓은 글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좋았던 것은 두번째 장. 즉 에셔가 자신의 그림을 가지고 직접 설명을 하는 부분이었다. 우리는 대부분의 작품들을 작가 자신의 해석이 아닌 후세의 다른 사람들로 부터 설명을 듣곤 하는데 에셔는 강의 준비를 하기 위해 써 놓은 원고와 슬라이드가 고스란히 남아 있어서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 정작 강의는 하지 못했다고 한다.) 우리는 아주 드문 경험을 할 수 있게 된다. 작가에게서 자신의 작품에 대해 직접 듣는것. 그것은 작품을 보는 것 못지 않은 감동을 준다.
아주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든다. 작품에 대해 그게 미술이건 음악이건 영화이건. 해석을 해 놓은 사람들을 보면 정말로 작가가 그런것을 의도했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지나치게 치밀하다. 그럴때 마다 나는 작가에게 직접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곤 한다. 예전에 나도 무언가를 하나 만들었을때 타인들이 그것을 해석해 놓은 것을 보고 깜짝 놀랐었다. 나는 전혀 의도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염두에조차 두지 않은 텍스트들을 분석하고 분해하고 해석해놓은 그들의 놀라운 솜씨앞에 나는 입이 떡 벌어질 뿐이었다. 그리고 덕분에 택도아닌 그것이 마치 대단한 의미라도 지니는양 과대평가되는 모양을 지켜볼 수 있어 흥미로웠다. 그 경험 때문인지 나는 해설이나 해석을 볼때 마다 늘 그런 의문점을 가지게 되었다. 작가는 이렇게 해석이 될 것을 알고나 있었을까 하고 말이다. 그래서인지 에셔가 자기 작품에 대해, 직접 그리고 만든 사람으로써 정확하게 의도를 밝히고 감상 포인트를 챙겨준 것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에셔의 작품은 참으로 묘하다. 보통 미술 작품을 볼때 일어나는 감성 혹은 감흥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그것은 꼭 알아서는 안되는 우주의 비밀을 살짝 엿보는 기분마저 들게 한다. 단순한 눈의 착시를 이용했다기 보다 에셔는 3차원의 공간들을 마음대로 주물러서 2차원인 면에다 펼쳐놓는다. 가끔 그의 그림은 강박적으로 보일만큼 반복적이고 또 그 섬세함은 돋보기를 이용해서 작업을 해야 할 정도로 섬세해서 마치 깨어지기 쉬운 유리조각을 기름칠한 손으로 들고 있는 마음이 들게도 한다. 어떤 작가에게서도 느낄 수 없었던 감흥을 나는 에셔의 작품을 통해서 느꼈다. 그것은 위대하다던가 그림이 너무 좋다던가 대단히 잘 그렸다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를 보여준다.
나는 전화통화를 하면서 낙서를 자주 하는 편이다. 그 낙서의 대부분은 그림이라기 보다는 6면체나 8면체의 공간들을 그리는 것인데. 내가 사람이나 꽃 등을 그리지 않고 그런 것들을 그리는 이유가 순전히 그림을 못 그려서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에셔의 그림을 보고나니 이런걸 제대로 그리기를 작정한 사람도 있었구나 싶어서 반가운 생각이 들었다. 에셔의 책을 보는 내내 소실점이랄지 하는 미술시간에 배운 용어들이 생각났고 나는 에셔가 어디에서 중심을 잡아서 시선을 처리했는지 참 궁금했다. (그의 작품은 대게 위도 아래도 앞도 뒤도 옆도 다 뒤섞여 있다.) 판화 작업을 주로 했지만 그가 보여주는 소묘나 정밀묘사도 정말 섬세하고 감각적이다.
작가의 작품을 다룬 책들은 대게 작가의 생애에 대해 주절거리기 마련인데 (그렇다고 해서 싫은건 아니다만) 이 책은 이체롭게도 작가 스스로가 자신의 작품에 대해 강의하듯 진행되는 것이 좋았던것 같다. 에셔의 그림에서 한번쯤 묘한 기분을 느껴본 사람이라면 추천할만 하다. (그림만 봐도 본전은 뽑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