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랑가족
공선옥 지음 / 실천문학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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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글들은 작가가 상상을 해서 혹은 취재나 여타 경로를 통해서 잠시잠깐 체험을 한 것으로 충분히 쓸 수 있는게 있다. 하지만 또 어떤 글들은 뼛속까지 그걸 느껴보지 못하고, 혹은 그게 삶이 되어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써 낼 수 없는 글들이 있다. 공선옥의 유랑가족은 그렇게 나눠보자면 후자 쪽이 아닐까 싶다. 잠시 잠깐의 가난. 아니면 TV화면에 보이는 가난. 그걸로는 도저히 다 써낼 수 없는 깊이의 가난을 그녀는 말한다.

도시에서 나고 도시에서 자란 내게 있어 최대한의 가난이라는 것은 길거리 노숙자나 쪽방 생활자들이었다. TV에서 접하는 것도 길거리에서 접하는 것도 그게 전부였기 때문에 그보다 더 가난한 무언가를 생각 해 낼수가 없었다. 하지만 공선옥이 말하는 가난은 농촌의 가난이다. 할머니와 단 둘이 산에 고추 농사를 지어서 사는 손녀는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무도 돌봐줄 사람이 없다. 또 한 아이가 있다. 엄마는 도망가고 아빠는 도망간 엄마를 찾으러 집을 나가고 병든 아버지와 잔소리가 심한 할머니와 사는 아이는 라면을 먹고 싶지만 아까운 라면을 축낸다고 할머니에게 야단맞을 생각에 감히 라면을 먹지 못한다. 왜냐면 라면은 그들에게 특별한 날에 먹는 특별한 음식이기 때문이다. 흔히 가난하면 떠오르는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것을 떠 올리는데 그것 조차도 여의치 않은 가난과 마주하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말 할 것이다. 노력하지 않아서, 게을러서 가난한거라고. 남보다 더 애쓰고 노력하고 열심히 저축하면 언젠가는 그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을꺼라고. 그렇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어떨까? 농촌에서 태어나 엄마는 도망가고 아버지는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고 늙고 병든 할아버지나 할머니와 산다면. 매일매일 논이나 밭에 나가 허리가 휘게 일해도 겨우 감자가 많이 든 밥을 먹을 수 있는 상황이라면. 그렇다면 그 아이는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가고 출세해서 더이상 가난하지 않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어쩌면 과거에는 그게 가능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때는 과외도 학원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당장 서울에 있는 각 대학들의 합격률을 보길 바란다. 농촌에서 올라와서 과외나 학원의 도움 없이 입학한 아이들이 몇이나 되는지. 먹고 살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거기서 열심히 공부 어쩌고 하는건. 적어도 열심히 공부하면 대학이라도 갈 수있을때나 될 말이다. 농촌에서 초등학교도 겨우겨우 다니며 하루종일 어른 못지않게 일해야 하는 아이가 도시에서 학원을 몇개씩이나 다니고 제 학년보다 보통 1,2년은 더 앞서서 공부하는 아이들을 따라 잡으라는건 100m 달리기에서 누군가는 출발선에 서고 누군가는 50m 지점에서 동시에 달리기 시작하는 것과 똑같다. 아니면 출발선이 같다 하더라도 누군가는 뛰어가고 누군가는 자가용을 타고 가거나. 누구나 다 대학을 가야 하는건 아니지만. 다들 알 것이다. 대학은 고등학교때 보다 공부를 더 심도있게 하러 가는곳이 아니라 그나마 멀쩡한 직장에 취직을 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최소한의 관문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말이다. (물론 현실은 이 대학을 나왔다고 해서 다 멀쩡한 직장을 보장해주지 않아 대졸 실업자들이 차고 넘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는 고등학교 혹은 그 이하의 학력보다 대졸 학력을 가진자가 더 많은 임금을 받을 수 있고 더 나은 경제적 생활이 가능하다.)

공선옥이 그려내는 가난은 남들보다 좋은옷을 못 입고, 좋은 음식을 먹지 못하고, 좋은 물건을 사지 못하는 가난이 아니다. 그들의 가난은 당장 집안에 벽이 허물어져도 그 벽을 막을 수 조차 없는 가난이고 먹을것을 배불리 먹을 수 없는 절대적 빈곤이다. 동네 슈퍼마켓에 가면 단돈 500원에 살 수있는 라면조차 아주 특별한 날이 아니면 아끼느라 먹을 수 없는 가난 앞에서 우리가 여태 생각했던 가난들은 너무 추상적이었는지도 모른다.

공선옥이 말하는 가난은 정말이지 읽는 내내 불편하다. 확실히 아름답고 재미있고 유쾌한 소설들에 비해 그녀의 소설을 읽는 과정은 아프고 힘들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외면할 수 있는것은 아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그런 똥구멍이 찢어질듯한 가난 따위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살고 싶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가난들이 존재하지조차 않는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 원리를 생각할때 누군가가 가졌다면 누군가는 덜 가진 사람들이 반드시 존재한다. 마치 의자 뺏기 놀이처럼 말이다. 의자라면 빼앗겨도 큰 탈이 없겠지만 그게 생존을 위협할 정도의 가난과 생계와 직결된 최소한의 돈이라면 우린 그걸 의자 하나 차지한것 처럼 천연덕스럽게 외면해도 되는 것일까?

부자인 사람들을 뺀 나머지 평범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는 것에 신경을 쓰기에도 모자란 세상이다. 그런 세상에서 남을 도와야 한다. 이웃의 아픔을 외면해야 한다는 소리는. 어쩌면 불우이웃 돕기 성금을 내랄때 '내가 불우이웃인데 돕긴 누굴 도와' 할때처럼 내 살기도 바빠죽겠는데 남을 언제 생각하냐는 식이 될지도 모르겠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가난한 사람을 돕겠다는건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살고 있다. 당장 내 앞날도 불투명한데 그리고 까딱하다가는 나도 밑바닥으로 얼마든지 추락할 수 있는 위험소지가 다분한데 오지랖넓게 누가 누굴 돕나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적어도 외면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돕지는 못할 망정. 아예 없는 일이라고. 그렇게 지지리 가난한 것들은 정말 생각하기도 싫다는 식의 외면은 누군가의 의자를 빼앗은 사람들로써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이 아닌가 싶다.

가난은 이제 개인의 손을 떠난 문제가 되어버렸다. 개인이 어떻게 해 보려고 하는걸로 해결될 수준이 아니다. 그렇다면 누가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농촌에서 자라 중. 고등학교만 겨우 졸업하고 또다시 도시의 노동자로 적은 임금과 높은 물가에서 형태는 다르지만 여전히 가난하게 살아야만 하는 그들에게 정말 이 땅이 해 줄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는걸까? 정말로 더 큰 문제는 이 가난이 자식들에게 고스란히 대물림된다는 것이다. 부자 부모를 둔 자식이 부자가 되고 가난한 부모를 둔 자식은 반드시 가난해지는 지금의 시스템은 마치 연좌제처럼 대를 뛰어넘어서도 그 고통을 전가시키고 있다.

도와주지도 못할망정 걱정이 다 무슨 소용이겠냐 만은 적어도 눈감고 모르는 일이라고 하는 것 보다는 아프지만 있는 현실을 제대로 보는게 훨씬 더 나을것 같다. 그렇게 자꾸 들여다 보다가 보면 언젠가는 그게 문제라는 생각도 들고 해결책이 나와도 나올테니까 말이다.

다소 불편하지만 추상적인 가난이 아닌. 가난을 있는 그대로 그려준 작가 공선옥에게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그녀의 글은 상상이나 취재 만으로는 쓸 수 없는. 뼈와 살의 경험에서 나온 글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글을 보여준 그녀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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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eetmagic 2005-06-06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함부로 쓰여지지 않았으면 합니다, 별 오지랖이라는 생각도 듭니다만..... 가난이 어떠한 방식으로든 재탕되고 우려먹어지는 거 정말 싫습니다. 우리의 일회용 눈물을 위해 희생되는 거 넘 잔인한 것 같아요,
님 리뷰를 보니 이 책이 무척 궁금해 집니다. ^^

플라시보 2005-06-06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weetmagic님. 네. 저도 님 생각에 동의합니다. 우리에게 잠깐의 눈물을 위해서 써먹을 만큼 가벼운 문제가 아니니까요. 그러나 이 책은. 그렇게 가볍게 다루었다는 느낌은 들지 않습니다. 몰랐던 것도 많이 알게 되었구요. 읽어보시면 마음은 좀 답답하겠지만 후회는 안하실것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