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레나
한지혜 지음 / 새움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어제 미용실을 갔었다. 미용실을 가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머리를 하는 시간은 꽤 길고 지루하다. 그 시간동안 대부분의 여자들은 미용실에 비치된 잡지를 본다. 하지만 잡지를 오래 보면 멀미를 하듯이 어지러운 나는 미용실을 가기 전에 꼭 책을 한권씩 챙겨간다. 컷팅을 하는 자리에서 샴푸실로, 다시 퍼머넌트실로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동안 책을 챙겨야 하는게 좀 귀찮기는 하지만 그래도 심심하고 무료한것 보다는 낫다. 이때 챙겨가는 책들은 어렵거나 심각한 책은 절대 금물이다. 중간중간 장소를 옮기느라 책을 읽는 맥도 끊기고 아무튼 집중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많다. 이럴때 가져갈 책 중에서 가장 좋은것은 재밌는 단편 소설이다. 그리고 나는 어제 이 책 안녕, 레나 덕분에 지겹지않게 미용실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책의 저자는 외출이라는 단편으로 9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당선을 한 것으로 등단을 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 그녀의 작품집이 나오기까지는 무려 7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단다. IMF가 터질 무렵 일이 끊기고 생계에 대한 두려움을 잊기 위해 쓴 단편이 덜컥 당선이 되고 나자 작가는 그동안 무척 괴로웠다고 한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갑작스럽게 작가라는 호칭을 얻기는 얻었지만 막상 그에 걸맞는 작품을 써 낸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들었겠는가. 그래도 작가는 어설픈 작품 몇개를 묶어서 얼른 내고 마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 7년동안 기다리면서 그녀는 조금씩 천천히, 조급한 사람들이 보면 거의 느림보에 가깝게 이번 작품집을 준비한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의 단편들은 모두 색다르다. 흔히 작가들이 쓴 단편을 보면 조금씩 비슷비슷한 분위기를 풍기기 마련인데 한지혜의 안녕 레나는 작품 하나마다 모두 완전히 다른 얘기들을 들려준다. 그녀의 오랜 인내심이 재밌는 단편을 탄생시킨 셈이다.

98년 당선작 외출을 포함해서 이 책에는 총 10개의 단편이 있다. 우선 첫번째 단편인 호출 1995는 삐삐에 관한 이야기이다. 지금은 핸드폰에 밀려서 의사등 특수직종 종사자들만 사용하지만 내가 대학에 막 입학한 95년만 해도 사정은 달랐다. 학교 앞 공중전화는 언제나 성냥갑만한 호출기를 들고 음성 확인을 하거나 호출된 번호로 전화를 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곤 했었다. 그런 아련한 추억과 함께 한번쯤은 상상해 봤을. 내가 쓰던 번호는 남아있을까? 남아 있다면 누가 쓰고 있을까? 하는 의문에서 소설은 출발한다.

두번째 안녕, 레나는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이건 PC통신의 이야기이다. 지금은 PC통신이 아닌 인터넷 채팅이지만 그때만 해도 하이텔, 나우누리, 천리안 등의 PC통신 세상이었다. 이름이 아닌 아이디로 서로를 부르고 단지 글자 만으로 소통을 하는 신기한 세상. 돌이켜보면 나도 한때 하이텔에 미쳐있던 시절이 있었다.

세번째 자전거 타는 여자는 아버지의 병간호를 하는 모녀의 이야기다. 나는 한번도 집에 크게 아픈 사람이 없어서 기껏해야 엄마가 몸살을 앓을때 약을 사주고 머리에 찬 수건을 올려준 것 정도가 다였다. 그러다 작년 이맘때 입원을 했을때 알게 되었다. 세상에는 아픈 사람들이 정말 많고 또 그들을 간호하는 사람들 또한 많다는 것을 말이다. 환자야 말 할것도 없이 고통스러울 것이고 그 고통을 지켜보고 도와줘야 하는 사람들도 못지않게 괴롭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네번째 왜 던지지 못했을까, 소년은 은 지난 2002년 온 나라를 빨간색 Be the Red 티셔츠로 물들였던 월드컵에 관한 얘기이다. 스포츠에는 도통 관심이 없고 축구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이 없었던 나. 그런 나 조차도 빨간 티셔츠를 걸쳐입고 광장으로 달려가서 사람들과 함께 오 필승 코리아를 부를 정도였으니. 지금 생각하자면 그때는 하나의 커다란 최면이 존재했던게 아닌가 싶다.

다섯번째 이사는 임대아파트에 대한 얘기이다. 집 없는 사람들은 아파트 한채를 가지는 것이 소원이다. 아무리 코딱지 만하고 그게 설사 요즘 광고에 나오는 메이커를 떡하니 달고 있는 아파트가 아니라 하더라도 말이다. 하루가 다르게 올라가고 있는 아파트촌을 보면서 늘 생각한다. 저렇게 많은 집 중에서 내꺼 하나 없다는게 말이 돼?

여섯번째 목포행 완행열차는 목욕탕에서 한 아주머니의 수다로 시작해서 수다로 끝나는 이야기다. 대화하는 다른 사람들의 말은 전혀 없이 혼자서 말하는 아주머니의 말투가 무척 이채로웠던 소설이다. 저렇게 한 사람의 화자 만으로 이야기를 만들고 또 끝낼 수 있다는게 놀라울 뿐이다.

일곱번째 사루비아는 기면증을 앓고 있는 여자의 얘기이다. 기면증이란 이유도 없이 갑자기 푹 쓰러져서 자 버리는 병이라고 하는데 청춘인가 그 영화에서 김정현이 저 병을 앓았던게 기억난다. 근데 정말 뜻하지 않는 장소에서 별다른 이유없이 쓰러져 자 버린다면 무척 난감함은 물론 위험할것 같다. 외출이나 어디 맘놓고 하겠는가.

아홉번째 햇빛 맑음은 화사한 제목과 달리 자살을 꿈꾸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한때 자살모임이나 자살클럽같은게 유행을 했고 지금도 심심찮게 인터넷을 통해서 이런 사람들이 서로 커뮤니케이션을 하곤 한다는데 글쎄다. 죽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을 찾아서 얘기를 나누고 서로의 상처를 봐주는것. 그건 그들이 아직은 세상에 미련이 있다는 소리 아닐까? 어쩌면 그들은 너무 외로워서 죽으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한 마음과 두 갈래의 길을 지나는 방법에 대하여는 위의 아홉가지 소설들과 달리 판타지 형식을 취하고 있다. 별로 좋아하는 장르는 아니지만 10개의 단편중 하나로 들어가기에는 큰 무리가 없다.

언제나 그렇지만 재미있는 단편을 만나면 즐겁다. 순식간에 읽히기도 하고 도중에 딴짓을 하다가 다시 잡아도 스토리를 따라가는데 전혀 무리가 없다. 한지혜의 단편은 근래에 만난 단편 중에서 아마 가장 재밌는 단편집이 아니었나 싶다. 책을 읽는 내내 작가의 7년 세월이 헛되지 않았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재도 다양하고 화자도 다양한 단편집. 이런걸 내려면 적어도 7년동안은 고민을 해야 하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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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5-01 23: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05-01 23: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05-01 23: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플라시보 2005-05-02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분. 그러게나 말입니다. 흐흐.

돌바람 2005-05-20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지요. 소설가는 7년 동안 사루비아를 키우고 하이텔이며 천리안 시절을 기억해내고, 혹은 살고, 기면증에도 걸렸다가 햇빛 맑은 어느날 짝짓기의 절정에서 생이 짓뭉개져버리는 사마귀(맞나?)를 목도하기도 하는데, 님은 미용실에서, 저는 화장실에서 이 책을 읽고 있으니. 저는 작가의 다음 작품이 무척 기대되요. 이 작가 이 소설집에서 무척 많은 것을 실험하고 있다고 느꼈거든요. 소재, 말투, 구성, 허구성, 이야기, 시대의 키워드, 사건... 의외로 다음 작품이 환타지로 가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되고... 그런 의미에서 근래에 읽은 가장 재밌는 단편집(사실 전 '자전거 타는 여자' 보면서 무척 아팠는데 그것까지 통틀어서)이라는 평에 같이 설레요. 방명록 대신해서 인사^^ 꾸벅꾸벅

플라시보 2005-06-20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돌바람님. 죄송합니다. 이제사 방명록을 통해서 댓글 남기신걸 봤네요. 코멘트가 늦은점 거듭 사과드립니다. 받아주실꺼죠?^^ 님은 화장실에서 읽으셨나봐요. 저도 과거에는 화장실에서 책을 많이 봤답니다. 지금은 안그러지만요. (지금 제 화장실은 불을 켜면 환풍기가 동시에 돌아가서 무척 시끄럽거든요. 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