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네 집
박완서 지음 / 현대문학 / 2004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이상하게도 박완서의 소설을 읽을 때면 나는 그게 도저히 허구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작가가 바보가 아니고서야 매번 자신이 겪은 일을 책으로 낼 리는 없겠지만 어찌된 셈인지 나는 박완서의 소설만큼은 소설이 아닌 자서전처럼 혹은 일기처럼 느껴진다. 물론 그것은 박완서의 글에 매번 등장하는 여자가 한국전쟁을 겪고, 그 와중에 학업을 중단하고 (서울대학교), 미군부대에 취직을 해서 가족을 먹여 살리고, 자존심 쌔고 강인한 어머니가 나오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그 남자네 집은 사랑에 관한 소설이다. 그것도 플라토닉한 사랑에 대해. 허나 박완서는 그 플라토닉한 사랑을 찬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순수의 탈을 뒤집어쓰고 있는 켕기는 욕정이라고 그 사랑을 회고한다. 사랑에 관한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연애소설은 아니다. 누구와 어떻게 어떤 사랑을 했는가 보다 이 책에는 당시 시대상황과 주인공인 내가 처한 환경에 더 많은 부분을 할애해 놓았다.


맨 처음 말한 박완서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설정들이 이 책에도 등장하므로 소설 그 남자의 집은 하나의 새로운 소설이라기보다는 여태까지 소설들의 연작 정도로 느껴진다. 소설은 이미 늙어버린 나와 그런 내가 회상하는 내가 번갈아 등장한다. 그녀의 회상 속에는 물론 그 남자와 그 남자의 집이 등장하지만 그보다 그녀의 결혼과 결혼생활. 주변인들의 삶에 대해 더 많은 얘기를 한다. 원래 이 소설은 단편으로 발표되었다가 현대문학 50주년을 기념하여 장편으로 늘여서 쓴 소설이다. 실제로 박완서는 현대문학에서 많은 작품을 발표했고 박완서가 살던 동네에 현대문학의 첫 사무실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이 책은 책 자체로는 주인공의 사랑 얘기이지만 작가의 입장에서 보면 현대문학에 대한 사랑의 헌사 정도가 아닐까 싶다.


요즘 젊은 작가들이 쓴 글들처럼 감각적이거나 자극적이진 않지만 박완서의 글을 읽으면 이 사람은 글을 쓸 수밖에 없는 팔자를 타고났구나 싶다. 딱히 감칠맛나는 문장을 구사하는 것도 아니지만 박완서의 글은 중독성이 강하다. 그래서 간혹 중복되는 소재들이 조금 지겹다싶게 느껴지지만 어느새 새로운 책이 나오면 또다시 찾게 된다. 이 책은 박완서의 소설들 중에 빼어난 수작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흡입력은 강하여 한번 잡으면 쉽사리 놓고 다른 일을 할 수가 없다. 굳이 책에 대한 평가를 하자면 박완서 소설의 딱 평균적인 정도라고 하면 얼추 맞을 것이다.  


내가 글자를 읽을 수 있게 되자마자 엄마의 책장에서 처음으로 본 책이 박완서의 ‘남자와 여자가 있는 풍경’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였다. 너무 어려서 읽었다기 보다는 그저 글자를 소리내어 읽는것에 지나지 않아서 내용 같은 건 하나도 기억이 안나지만 그때부터 나는 내가 자라서 글자를 쉽게 읽게 되면 이 사람의 책을 꼭 찾아서 읽어보리라 마음을 먹었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이제 몇 해 만 더 있으며 엄마가 책장에 박완서의 수필을 꼽아 두었던 나이와 비슷해진다. 얼마 전 전화통화에서 엄마도 이 책을 읽으려고 사놨다는 얘길 들었다. 박완서는 적어도 엄마와 나에게는 특별한 작가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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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리 2005-02-10 1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으려고 사놨는데요,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요. 혹시 님이??^^

줄리 2005-02-10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완서는 저에게도 특별한 작가예요. 먼저 같은 박씨 가문이고 ㅎㅎ, 또 공감할게 많은 여자라는 사실, 그리고 그녀의 분노나 연민이 어쩜 그리도 내가 느끼는것과 비슷한지 가끔 이 여자 혹시 나 아냐 이런다니까요. 제가 좀 젊으니까 손해이긴 하지만서두요 ㅎㅎ 하여간 박완서님이 오래 사셔서 계속 좋은 책 많이 내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플라시보님도 계속 이렇게 좋은 리뷰 써주실테고요~~

플라시보 2005-02-12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리님. 후훗. 제가 안가져갔어요. 믿어주세요.^^ (책 꼭 찾으시길 바랍니다.)

dsx님. 아. 저도 그러고보니 저도 박가군요.^^ 님과 이 작가는 비슷한 부분이 많나봅니다. 저도 박완서 작가가 오래오래 집필활동을 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