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가 끝나고 난 다음 한동안 나는 방황했었다. 이제 무슨 드라마를 보지? 김수현 극본의 부모님전상서의 경우. 뭐 그럭저럭 봐 줄만 하기는 하지만 김수현의 최대 장점이었던 촌철대사 (양에서나 내용에서나 모두) 가 이제는 조금 진부해져 버렸고 시대성에도 약간 뒤떨어지는지라 (아무래도 작가도 나이가 드니까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단지 수다스럽기만 하다는 느낌이 들고 김정수 극본의 한강수 타령은 배우들이 예상외의 호연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첫회부터 안 봐서 그런지 드라마가 산만하다는 (즉 내가 내용을 전혀 이해 못하고 있는) 단점이 있어서 좀처럼 안 보게 된다. 그러던 찰나에 눈에 띄는 드라마가 있었으니. 바로 미안하다 사랑한다이다.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처음부터 약간의 문제점을 안고 출발했다. 일단 임수정 이외에는 검증된 연기자가 전혀 라고해도 좋을 정도로 없다. 소지섭의 경우 발리에서 생긴일에 출연하며 연기력이 좀 늘기는 했지만 여전히 모델 출신이라는 꼬리표를 떼기에는 조금 부족해 보인다. 거기다 댄스 그룹 샾 출신의 서지영은 연기력이 전혀 검증되지 않은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요즘 가수들은 마치 CF를 찍듯 쉽게들 연기쪽으로 진출을 하므로) 이미지가 상당히 좋지 않다. 다들 알다시피 그녀는 같은 멤버였던 이지혜와의 불화로 인해 그룹이 해체되는 위기를 맞았으며 서로 상대방이 잘못했다고 기자회견을 했고 더구나 서지영의 경우 기자회견장에서 자기 편을 들어줄줄 알았던 메니저가 폭탄발언을 해서 기자회견을 하다가 말고 나가버렸다. 그런 그녀가 덧니를 빼고 어색할 정도로 하얗게 치아미백을 하고 살을 빼서 연기자에 도전을 했으니 곱게 보일리가 만무하다. 연기라고는 난생 처음 해 보는 것에다 좋지 않은 이미지까지. 어딜보나 그녀를 안고 가는 드라마는 욕을 먹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여태까지 나열한 것만 보면 이 드라마에서 그나마 기대 해 볼만한 연기자는 드라마 학교와 영화 장화홍련, ing 에서 호연을 보여준 임수정 뿐이다.


내가 아일랜드를 워낙 열심히 봐서인지 모르겠지만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상당부분 MBC의 아일랜드를 떠 올리게 한다.


1. 소재 / 해외 입양아

여태까지 우리나라 드라마에 입양아가 소재가 된 적은 극히 드물었다. 출생의 비밀 같은거야 심심하면 써 먹었지만 입양아는 잘 없었다. 그러다가 왕꽃 선녀님에서 윤초원. 아이랜드에서 이중아가 입양아로 등장했다. 그 중에서도 아일랜드의 이중아는 해외 입양아가 다시 고국을 찾은 케이스. 사랑한다 미안하다에서도 입양아가 등장하는데 아일랜드와 마찬가지로 해외 입양아이다.


2. 뿌리찾기/ 충격먹고 한국행

극중 소지섭은 호주로 입양이 되었는데 다시 한국으로 들어오게 된다. 그러나 알다시피 해외 입양아들이 한국에 부모를 찾기 위해 오는 케이스는 왕왕 있어도 아예 살기위해 들어오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들에게 고국은 아마도 현재 입양되어 살고 있는 땅일것이고 한국은 상징적인 뿌리 같은 것이다. 뿌리에 대해 집착을 가지는 한국인의 정서로는 당연한 일인지 모르겠지만 외국에서 생활해서 외국인이나 다름 없는 그들에게는 단지 뿌리를 위해 살고 있던 터전을 버리고 고국으로 온다는건 사실 좀 말이 안된다. 하지만 아일랜드의 이중아와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소지섭은 각자 충격적인 사건을 겪고 (이중아는 부모님과 형제가 몰살당하는 장면을 목격했고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소지섭은 사랑하는 여자가 돈때문에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고 또 그 결혼식장에서 그녀를 향한 총알을 막느라 대신 머리에 유탄이 박혀서 죽다 살아난다.) 그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혹은 여타 이유로 한국을 찾는다.


3. 한국말 / 잘해도 너무 잘하네

아일랜드 이중아와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소지섭이 가지고 있는 또 다른 공통점은 둘 다 한국어를 잘해도 너무 잘한다는 것이다. 둘 다 아기때 입양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어를 마치 한국사람처럼 유창하게 구사한다. 그들은 여차여차해서 한국어를 배웠다고는 하지만 사전적 의미가 분명한 한국어뿐 아니라 일상적으로 쓰는 깬다, 느끼하다 등도 그들은 잘만 쓴다. 즉 한국땅에서 살지 않는 한, 단지 한국어를 배우는 것으로는 표현 불가능한 단어까지 다 쓰고 이해를 할 줄 안다. 해외 입양아를 다룬 프로그램을 보면 알겠지만 그들이 한국어를 할 줄 아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우리나라가 본격적으로 해외 입양아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다큐멘터리에 영화까지 만들어진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을 봐도 한국에 대해 무척 애착을 가지고 있고 왕래도 하는 수잔브링크만 해도 한국어라고는 노래인 아리랑 밖에는 모른다. 우리에게 영어가 외국어이듯. 그들에게도 한국어는 외국어인데 외국어를 그렇게나 유창하게 하는 것은 좀 힘든 일이다. 더구나 세계공통어인 영어도 아니고 그땅에서는 전혀 쓰일일이 없는 한국어를 잘 한다는건 묘하다. 한인타운에 사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하긴 이렇게 그들이 한국어를 잘 해야 하는 이유는 아까 위에서 말한 2번에서 덜컥 한국행을 결정하고 눌러살 수 있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일단 한국어를 한국인만큼 잘 하니 한국에 와서 사는 것에 대한 걱정은 하나 줄어든 셈일테니 말이다.


4. 입양아 / 정신적으로 건강치 못한

아일랜드의 이중아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어서 (가족이 몰살하는 것을 본 충격으로) 늘 약을 달고 산다. 소지섭의 경우 정신적이라기 보다는 물리적인 이유로 역시 정신 상태에 문제가 있다. 머리에 유탄이 박혀 있어서 폭력적인 성격으로 변하는 것. 즉 두 입양아 다 이런 이유건 저런 이유건 멀쩡한 정신상태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렇지만 그건 극중 장치에 불과할 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너무 잘들 산다.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경우 앞으로 어떻게 진행이 될 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5. 주변인 / 연예인

아일랜드에서 시현은 연예인이다. 비록 애로배우로 출발을 하긴 했지만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배우가 된다. (나중에는 리딩이 안되는 문제로 섹시 화보집을 찍어야 하는 상황이 닥치지만) 미안하다 사랑한다에서는 연예인이 하나로 모자라는지 셋트로 등장한다. 대한민국 최고의 가수라는 설정의 최윤. 그리고 인기 절정의 여배우 강민주가 그들이다. 대한민국에서 연예인이 그리 흔한 직업이 아닐텐데 두 드라마에서는 공통적으로 주인공의 주변에는 연예인이 있다. 공통적인 특징은 바빠 죽겠다는 연예인인데도 그들은 항상 일은 거의 안하고 남아도는 시간에 주인공들 주변에서 사건을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는 것이다.


6. 초반부 / 해외로케

사실 요즘 우리나라 드라마에서 해외로케는 별로 뉴스꺼리도 못된다. 그만큼 해외 로케이션이 흔해
졌다는 얘기. 그렇긴 해도 아일랜드가 극중 이중아가 입양되어간 아일랜드에서 촬영한 끝내주는 장면들을 초반부에 흩뿌린것 처럼 미안하다 사랑한다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호주의 멋지구리한 풍경들을 담느라 정신이 없어서 때로는 스토리와 별로 상관도 없는 장소에서 주인공들이 오랫동안 대사없이 폼만 잡는다. 거기다 보여준 장면들을 회상장면으로 또 보여주고 슬로우 모션이나 휘돌아 찍기 크레인으로 찍어서 멀리서 부터 서서히 가까이 클로즈업해가며 찍기 등등 화려한 촬영술을 자랑한다. 초반부에 스토리로 강하게 꽝 나가야 하지만 이 두 드라마는 스토리보다는 영상미에 더 치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물론 비싼 돈 주고 해외에 갔으니 최대한 그림을 뽑아와야 하겠지만 드라마가 내용이 아닌 이미지로 가려는것 같아 조금 안타까운건 사실이다.


7. 드라마제목 / 로고화

아일랜드와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드라마 중간중간 제목을 마치 로고처럼 화면의 하단부 혹은 상단부 오른쪽에 노출시킨다. 드라마 제목은 드라마 시작할때와 타이틀로 한번 뜨면 그만인 것으로 족하던 여타 드라마들과 달리 마치 하나의 브랜드처럼 아일랜드와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드라마 제목을 로고화 시켰다. 역시 이미지를 가지고 가려는 의도가 강하게 보인다. 둘은 글자체도 좀 비슷하다.


8. 의상 / 예사롭지 않은 인물들의 패션감각

아일랜드에서 이중아의 의상은 좀 충격이다 싶을 만큼 파격적이었다. 그 컬러에 그 디자인. 일반인들은 절대 소화하기 힘든 옷을 입고 나왔다. 거기다 재복이라는 캐릭터 역시 의상에 많은 신경을 쓴 흔적이 보여 하나의 스타일을 완벽하게 보여준다. 미안하다 사랑한다에서도 배우들의 의상은 매우 신경을 쓴 흔적이 역력하다. 극중 연예인으로 나오는 서지영과 정경호는 말할것도 없고 소지섭의 경우는 매우 그런지하면서도 감각적인 의상을 선보인다. 연기와 캐릭터로 인해 인물의 특성이 생긴다기 보다 두 드라마는 오히려 의상에 의해 극중 캐릭터들이 스타일을 부여받는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9. 만남 / 끊임없이 마주치기

두 드라마에서 엮일듯한 이미지를 주는 남녀들은 계속해서 우연적인 만남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촌스럽게 '어머 여긴 어쩐일이세요?' 하며 그들은 만나지 않는다. 한 공간에서 엇갈려 지나치므로써 오직 시청자들만 안타깝게 지켜볼 뿐. 정작 그들은 서로가 지나쳐가는지도 모르는 설정이 파다하게 등장한다. 지하철을 타면 밖으로 그 혹은 그녀가 지나가고 차를 타고 가면 그 혹은 그녀가 저쪽에 서 있고 계단을 올라가면 그 혹은 그녀는 저쪽에 있는 계단에서 내려오고 있다.


10. 인연 / 알고보니 형제자매

어차피 드라마라는 것이 한정된 등장인물을 끌고 이 세상의 모든 얘기와 우연과 운명을 표현해야 하므로 세상에 사람들이라고는 그들 뿐인양 끊임없이 엮이고 섞이지만 그들은 이미 알고 지냈는데 알고보니 출생과 연관이 있다는 식의 우연이 너무 많이 등장한다. 비록 아일랜드의 경우 재복이와 중아가 형제라는 설정을 했다가 다시 아니다고 번복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경우도 극중 가수로 나오는 최윤과 입양아 소지섭이 형제로 나온다. 뭐 나중에 가서 아일랜드처럼 알고보니 아니네라는 식의 번복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사실 위에서 나열한 특징들은 비단 아일랜드와 미안하다 사랑한다 만의 공통점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10번 같은 경우 한국 드라마에서 가장 많이 써 먹는 소재이고 또 그게 없으면 드라마가 진행이 안된다. 나는 아일랜드를 매우 재미있게 봤고 미안하다 사랑한다 역시 관심있게 지켜볼 생각이다. 문제점이 분명히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용서가 된다고나 할까. 아무튼 처음에 이 글을 쓸때는 두 드라마의 특징을 비교 분석해 본다는 거창한 생각을 가졌지만 막상 써 놓고 나니 비판조로 가버린것 같아 안타깝다. 그래도 나는 위의 두 드라마중 한 드라마는 재밌게 봤으며 나머지 한 드라마는 재밌게 볼 생각이다. 끝으로 조금만 덧붙이자면 미안하다 사랑한다에서 임수정은 예상외로 평이한 연기를 보이고 있고 서지영이 생각보다 드라마를 망칠만큼 어설픈 연기를 하지 않아 좀 의외다. 소지섭은 좀 더 지켜봐야겠고 최윤의 경우는 현빈처럼 뜨기는 좀 무리가 아닌가 싶다. 아. 그리고 간만에 중견배우 이혜영을 이 드라마에서 보게 되어 겁나게 반갑다. 시현의 엄마였던 윤여정씨도 겁나게 좋아하는 배우인데 좀처럼 드라마 나들이를 하지 않은 이혜영씨를 미안하다 사랑한다에서 보게 되어 무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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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4-11-10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우 탁월한 분석이라고 생각되옵니다. 제가 그렇게 욕을 했던 드라마의 장점을 여럿 제시해 주셨군요. 그리고 전 영국인 줄 알았는데 거기가 호주라니, 으음...어쩐지 아름답다 했죠...

플라시보 2004-11-10 2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 탁월한 분석 까지야. 흐흐. 음. 영국이 아니라 호주라네요. 전 첨에는 미국인가 했었어요.

digitalwave 2004-11-11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0% 동감입니다. 저도 좀 심하게 비슷하게 가네... 라고 생각하던 중이죠.

플라시보 2004-11-11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digitalwave님. 뭐 그렇다고 해서 '어라 이거 표절이잖아!' 이런 필로 쓴건 아니구요^^ 그냥 제가 전에 좋아했던 드라마랑 비슷하단 느낌이 들어서 죽 나열 해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