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른한 오후 샘터만화세상 4
마정원 지음 / 샘터사 / 2004년 8월
평점 :
품절


사실은 이 책에 대해서 기대를 많이 하고 샀다. 별점도 그렇고 리뷰들도 칭찬 일색이었으니까. 하지만 기대가 크면 실망도 그만큼 큰 탓일까? 이 책을 20분만에 읽으면서 나는 굳이 사서 읽지 않아도 될것을 사서 읽었구나 하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었다.

작가 마정원은 200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만화부문 당선자이다. 이 책에는 당선작인 '과꽃'을 포함해서 '나른한 오후' '첫눈 내리는 날' 등의 작품 3가지와 'Gallery 우리 이웃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25개의 그림이 실려있다. 좀 극단적으로 말을 하자면 이 책은 함량미달이다. 우선 너무 얇은 책에 8,000원이라는 가격을 책정 해 놓은것도 그렇고 (만화라면 무조건 싸야 한다는 논리는 아니다. 다만 이 책에서 스토리가 있는 만화가 차지하는 비중이 겨우 103페이지에 달하면서 8천원이라는 가격은 좀 그렇지 않냐는게 내 생각이다.)

그리고 신인이라서 그런지 미숙함을 지울수가 없다. 스토리는 여기저기서 크게는 아니지만 조금씩 튀고 이야기도 매끄럽게 흘러가지 못한다. 한마디로 연출력의 부재라고 볼 수 있다. 만화는 그저 그림을 잘 그리는 것 만으로는 힘들다. 잘 나가는 만화가들을 보면 거의 영화 감독들도 울고갈 정도의 연출력 (컷을 나누고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을 보인다. 하지만 마정원 작가는 아직 연출에 대한 공부를 한참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너무 뻔하고 평이한 연출에다 전개마저 매끄럽지 못해서 독자들의 진정한 몰입을 방해하고 있다. 이정도 실력의 신인 만화가의 책을 올컬러로 8,000원이나 되는 가격을 붙여놓은 출판사를 이해하기가 힘들다.

마정원 만화는 이른바 사회의 소외계층을 다루었다. 물론 소재는 아주 좋다. 하지만 그런 소재를 다루었다고 해서 이 책이 이세영의 '부자의 그림일기' 쯤과 동급인양 치켜세워지는 것에는 반대다. 만화건 책이건 소재만 좋다고 해서 다 해결이 되는건 아니기 때문이다. 거기다 내가 보기에는 진지한 고민도 성찰도 크게 보이지 않는다. 그냥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이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는 것 정도의 전달에만 그치고 있다.  좋은 소재이긴 하지만 참신성은 상당히 떨어진다. 너무 쉽게 다음 스토리의 짐작이 가능한 뻔함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뭔가 신선하다고 평가 할 만한것이 아무것도 없다. 실력미달과 연출력의 부재를 가지고 신인이니 신선하지 않느냐고 말한다면 할 말은 없겠지만 말이다.

조금 남루한. 그리고 남들보다 약간 아래에 있는 삶을 산다고 해서 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그건 마치 부자는 무조건 나쁜놈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다를바 없는 오류라고 생각한다. 물론 마정원이 그린 세상이 우리가 발을 디디고 있는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외계층의 안타까운 삶인 것에 대해서는 동조한다. 하지만 그걸 죽죽 나열을 해서 뭘 어쩌자는 건지는 모르겠다. 거기에서 어떤것도 끌어내지 못한채 그저 '이런 삶도 있어요' '저런 삶도 있어요' 하며 좌판에다 주욱 깔아놓은 작가는 진정으로 무슨 얘기를, 또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알다시피 만화는 이미 오래전에 망조의 길에 접어들었다. 우후죽순처럼 생긴 만화 대본소들 때문에 만화는 사서 보는 책이 아닌 빌려보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몇몇 스타급 만화가들을 빼 놓고는 생계마저 어떻게 꾸려가는지 걱정이 될 지경이다. 나는 그럴수록 만화가들과 출판사들이 더욱 질 좋은 만화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소장가치가 있는 만화. 빌려보는게 아닌 사서 봐도 아깝지 않을 만화. 그런 만화들을 그리고 만들고 팔아야 이 오랜 악순환을 끊을 수 있지 않나 싶다. 하지만 이 정도의 만화에다 이 정도의 가격을 붙여서 팔아버리면 '역시 만화는 사서 볼게 못되는 물건' 이라는 생각만 하게 만들 뿐이다. 지금 만화가 잘 팔리고 있는 상황이라면 이런 만화 하나쯤 나온다고 해서 문제될 것이 없다. 하지만 거의 더 떨어질 바닥이 없을 정도로 내려가버린 만화 산업의 불황이 고질화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이런 책은 기획자의 자질을 의심하게 할 뿐이다. 더구나 이제 막 데뷔한 신인의 검증받지 않은 작품을 얇디 얇게 실어놓고는 보통 만화들보다 더 높은 가격을 붙여놓은 이유는 뭘까?

나는 이 만화를 보면서 부자의 그림일기에서 느꼈던 10분의 1의 감동도 느끼지 못했다. 첫 단편인 나른한 오후가 꽤나 충격적인 스타트를 끊기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작가의 부족함만 더 드러낸 작품이 아닌가 싶다. 조금더 고민하고 조금더 애를 쓴다면 발전 가능성이 없는것도 아니겠지만 만화를 가지고 사회 밑바닥을 건드리는 것은 어느정도 경지에 이르렀을때 해야지 신인이 그냥 흉내만 낸다고 해서 다 되는건 아니라는걸 좀 깨닳았으면 좋겠다. 성찰과 진지한 고민이 없는 건드림음 정육점에 널린 고기들처럼 어떤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

한가지 덧붙이자면 그래도 내가 별 셋을 준 것은 요즘처럼 만화가 사서 보는게 아닌 그저 빌려보는 가벼운 오락거리로 전락한 한국에서 '올 컬러로, 신인의 만화를, 대여용인 아닌 판매용 책'으로 낸 용기에 대한 점수이다. 아예 이런 시도조차 없는 사람들에게는 분명 귀감이 될 만한 구석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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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4-10-30 1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통렬한 리뷰예요^^ 그래서 추천! 님의 비평은 언제나 박력있습니다

플라시보 2004-10-30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추천 감사합니다.^^ (님은 제가 침튀기며 욕하면 꼭 좋아라 하시더군요. 아이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