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ST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4
이시다 이라 지음, 양억관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7월
평점 :
절판


나는 단편을 몹시 좋아한다. 일단 호흡이 길지 않아서 나처럼 산만한 인간도 잠깐의 집중력만 발휘하면 마스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도 베스트 극장이랄지 영화도 쓰리 몬스터처럼 단편들을 좋아한다. 책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나는 같은 작가라면 그의 장편보다는 단편에 훨씬 더 많은 점수를 주는 편이고 심지어 단편책을 읽을때는 막 두근거리기까지 한다.

보통 단편들은 주제와 내용이 제각기 다른만큼 작가의 다양한 가능성과 소질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책 LAST는 하나의 주제로 엮여있다. 현대 일본의 병폐를 마치 단층촬영한 것 처럼 일곱개의 단편들이 모두 더는 물러설 곳이 없는 인간들의 마지막을 보여주고 있다. 제목도 모두 LAST가 들어가 있다. 세상은 제로섬 게임과도 같다. 누가 하나를 더 가지면 그 하나를 가져야 할 인간이 못 가지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지구라는 환경 자체가 유한한 재료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것을 소비하며 사는 인간들에게 제로섬 게임은 애초부터 원하든 원치않던 적용해 왔던 법칙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몇년째 장기불황을 겪고 있는 일본의 제로섬 게임은 다름아닌 돈이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수는 없는 법이지만 돈없이 행복하기도 힘든것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현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LAST에 등장하는 모든 인간들은 게임에서 져버린. 단숨에 삶의 밑바닥까지 추락해버린 사람들이다. 그들은 특별한 잘못을 저지르지도 않았고 지독스럽게 게을러터진것도 아니었다. 다만 세상은 정글과 같다는 약육강식의 법칙을 너무 늦게 깨닳았을 뿐이다.

LAST RIDE는 채권을 갚지 못한 한 남자가 사채업자나 다름없는 금융회사로 부터 협박을 받는 내용이다.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24시간. 그는 사채업자로 부터 더는 물러설 곳이 없는 막다른 선택을 강요받는다.

LAST JOB- 아파트를 사기 위해 융자를 받은 것과 생활비를 쓰느라 카드값에 시달리는 한 주부의 이야기이다. 그녀는 어린 딸을 놀이방에 맡기고 캐셔로 파트타임 일을 하고 먹을것 마저 아끼지만 빚은 점점 불어나기만 한다. 그러다가 그녀는 우연히 새로운 일자리를 발견하게 된다. 

LAST COLL- 지금은 인터넷이나 핸드폰에 밀려서 사라져가는 텔레폰 클럽 (우리나라는 과거 휴계텔이라는 이름으로 영업을 했었으나 일본과 마찬가지로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을 찾게된 한 남자가 전화로 연결된 여자의 이야기를 듣는 내용이다. 그녀가 들려주는 얘기들은 평범한 여자애라면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경험들이다.

LAST HOME- 이제 막 홈리스가 된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한 국가의 국민으로써의 모든 권리도 의무도 포기를 하는게 홈리스이지만 여기도 채권과 채무의 관계는 남아있다. 

LAST DRAW- 사채업자에게 시달리다가 불법행위를 저지르게 된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빚이 있는 남자는 본인이 원하던 원하지 않던 강요에 의해 불법행위를 저지르게 된다.

LAST SHOOT- 요즘에는 일이 거의 없는 촬영기사가 심장외과 전문의에게 고용이 되어서 외국으로 나가 개인소장용 포르노 비디오 테잎을 찍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심장외과 전문의는 단순히 포르노를 찍기 위해 그를 고용한게 아니었다.

LAST BATTLE -빚을 갚지 못한 남자가 사채금융회사에 종신토록 고용이 되어서 일명 샌드위치맨 (광고판을 몸의 앞 뒤에 붙인 사람) 으로 살아가게 된다. 그러다가 어느날 목숨을 건 한판을 강요받는다.

대강의 내용만 훝어보아도 암담하기 이를데가 없지만 실제로 읽어보면 더더욱 끔찍하다. 읽는 내내 제발 나에게 만큼은 삶을 그만 놓아버리고 싶을 만큼 잔혹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기를, 혹은 주변에 생겨서 목격을 하는 일조차도 없기를 바라게 된다. 하지만 여기에 등장하는 모든 내용은 절대 상상력 풍부한 작가의 머리 속에만 존재하는 얘기가 아니다. 우리와 가까운 나라 일본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으며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약간은 쳐졌다고 하지만 조만간 우리나라에도 곧 생길 일들이다. (어쩌면 생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텔레폰 클럽과 원조교제가 그러했듯 나쁜건 거의 실시간으로 유입이 되니까 말이다.)

인간이 자급자족을 끝내고 물물교환에 이어서 화폐라는 것을 만들고 부터 어쩌면 이 모든 불행들은 이미 예견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알다시피 인간의 욕심과 욕망은 끝이 없다. 적어도 지금 이 시대에 산다면 저 욕심과 욕망중의 대부분이 돈으로 해결이 가능하다. 돈이 없으면 누군가의 욕심과 욕망의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다. 인정하긴 싫지만 현실이 그렇다. 남의 욕망에 짓밟히지 않으려면 내가 남을 짓밟는것 정도는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살기 위해 나를 남의 욕망에 던지지 않을 정도의 울타리는 스스로 치는 수 밖에 없다. 해마다 자살자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죽음만큼 고통스럽고 때로는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뒤따르는 삶을 선택한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살아 숨쉬는 것이 무서워졌다. 당장의 내일도 보장되어 있지 않은 이 전쟁터같은 삶에서 나에게 만큼은 저 단편들에 소개된 불행이 닥치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그 무엇으로 할 수 있을까.

책은 확실히 재미있고 흡입력도 있었지만 단지 재미로만 치부하기에는 너무 묵직한 충격이 뒤따른다. 굳이 세상의 어두운 면을 골라서 볼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세상은 아름다워 샤랄라' 하며 살기에 인간들은 이미 너무 멀리 와버린게 아닌가 싶다.

P.S) 이 책은 현재 알라딘에서 1+1행사중이다. 대게 저렇게 해서 딸려오는 책들은 그 출판사에서 잘 안나가겠다 싶은 책을 끼워주는게 대부분인데 기특하게도 이 책의 경우 이 작가의 다른 작품인 4teen을 끼워준다. 아직 끼워준 책을 읽지는 않았지만 LAST를 읽어본 결과 분명 괜찮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출판사는 배신을 때리더라도 작가가 배신을 때리지는 않을테니 말이다.


댓글(7)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깍두기 2004-10-21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얼마전에 사서 책꽂이에 꽂아놨는데....마음이 무거워질까봐 읽지 못하고 있네요. 좋은 리뷰를 봤으니 슬슬 읽어 보렵니다.

플라시보 2004-10-21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깍두기님. 이미 사 두셨군요. 저는 하루만에 다 읽었을 정도로 이 책이 흡입력이 강했더랬습니다만 님께서는 어떠실지 모르겠네요. 재밌게 (이런 표현이 이 책에는 맞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읽으시기 바랍니다.^^

픽팍 2004-10-22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엥? 이 작가 교보문고에서 한 번 읽어보려고 했는뎅 돈이 없는 나머징
ㅋ요새 들어서 일본 작가들이 작품이 좋아지는데 암튼 이런 식으로 작가도 나라를 따져가며 읽는 것도 안 좋은데;;;;
갠적으론 에쿠니 가오리를 좋아하지만 이 책도 한 번 읽고 싶네요 ㅋㅋ

플라시보 2004-10-22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픽팍님. 에쿠니 가오리와는 좀 다른 스타일인데요. 그래도 재밌습니다. 다만 읽고나서 '아 재밌구나' 보다는 좀 씁쓸하고 무섭고 그렇죠..^^

sayonara 2004-10-27 2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 아사다 지로의 작품을 많이 읽으시는군요.
혹시 아사다 지로를 '처음' 접하는 독자에게 한권 추천해주실만한 작품은 없으신지요!?

플라시보 2004-10-28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알기로는 저 작가의 작품이 2개 있는걸로 알거든요. 제 개인적으로는 4teen 보다는 LAST가 좋았던것 같습니다. 물론 두 작품 다 괜찮지만 말입니다.^^ 추천을 하라시면 LAST를 추천하고 싶네요.^^

sayonara 2004-10-30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솨~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