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노 연애 조작단이 있다면

나의 형제 자매들은 성적표 및 삥땅용 증빙서류 조작단이었다.

일단 계획은 내가 짠다.

학급 등수, 전교 석차, 편차, 퍼센티지 뭐 이런거 계산한다.

(내가 산수, 수학 못해도 확률스럽고 통계스러운 건 좀 한다. 왜냐, 살려면 필요하거든.

그 성적표 그냥 주면 죽거든.)

그리고 컴퓨터로 이걸 만드는 것은 둘째의 몫

선을 긋고 내가 불러주는 숫자를 타다닥 친다.

그러나 가장 최고의 작업은 뭐니뭐니 해도 무슨 중학교 스런 도장.

이건 막내가 판다.

지우개에다 열심히, 매우 꼼꼼하게 판다.

간혹 처 들킬 경우를 대비해서 부모님 도장까지 두 개를 제작해야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도장은 사실 삥땅용 증빙서류로 부모님의 피같은 돈을 뜯어 낸 다음

그걸로 도장집에 가서 파면 되겠지만

우리, 좀 이상한 고집있었다.

내 집은 내 손으로 지을거에요 를 열심히 들으사.

우리 성적표 및 삥땅용 증빙서류는 우리 손으로 만들거에요. 존재하셨다.

그러나 이걸 그냥 프린트해서 도장 꾹 찍어 주면 하수.

반드시 학교 앞 문구사에 가서 갱지스러운 것에다가 복사를 해 달라고 해야 한다.

그리고 난 다음 학교 마크스러운 무언가는 푸른색 잉크로 도장 꽉.

실제 성적표에 부모님 도장을 찍어야 할 경우 인주를 이용하면 된다.

이렇게 우리는 조작하고 또 조작하였다.

간혹 전교 1등 이런거 해서 엄마 아빠께 효도 한 번 제대로 할까? 하다가

담임한테 감사전화 드리면 끝장이라는 결론을 내리며 참곤 했다.

해서 우리의 전학년 성적표는 모두 조작이었으며 (집구석으로 배달 이런 시스템 도입되기 전까지.)

학교에서 필요하다고 말 한 돈의 70% 는 우리가 챙겼다.

그 돈으로 CD도 사고 월간 모시기도 사고 만화방에서 죽때리기도 하고 떡볶이랑 컵라면도 사 먹었다.

아주 가끔은 친구들에게도 만들어서 염가 판매를 하기도.

허나 저 짓은 주도 면밀하며 연기력 뛰어난 친구에게만 해야 한다.

잘못 했다가는 우리도 덤태기로 연좌죄에 걸려들어 당장 학교서 부모님 호출 이럴 위험 다분하다.

그래서 친분이 매우 두터우며 주도 면밀하고 연기력 뛰어나며 동시에 다소 뻔뻔한 애들한테만 해줬다.

아니면 성적 왕창 떨어져서 이 성적표 내밀었다가는 내일 학교에 목발 짚고 오겠다 싶은 애들도.

그렇게 시작된 조작질은 딱 거기서 멈췄다.

물론 지금 포토샵을 전공한 둘째와 막내를 이용 해 먹을 경우.

나는 하버드 최연소 합격자에 동시에 MBA 과정을 우수한 성정으로 사뿐히 밟고

심심해서 놀이삼아 서울대 강의중 이런 것도 충분히 가능하지만

이건 하지 않는다.

왜냐, 사기니까.

부모님한테도 물론 사기친 건 맞지만 핏줄끼리 살짝 치는 사기는 사기죄에 해당하지 아니한다.

그러나 저 짓거리 대외적으로 했다가는 신 아줌마 꼴 난다.

(하긴 그 꼴 나기 전에 내 글 몇 개 읽어보면 댐시 뽀록난다.

하버드 최연소 합격자. 일반 동사와 B동사 구분치 못한다.)

아무튼지간에 저때 저 작업을 하면서 매번 더더욱 디테일해져 가고 발전스러워지는 그 결과물에

우리 셋은 부둥켜안고 서로를 토닥이며 말했다.

'내 공이 제일 커, 이건 다 내가 잘나서야'

'아니지, 저 선 긋고 그 안에 딱 중간에 숫자 넣기가 어디 그렇게 쉬운 줄 알아?'

'지랄마 뭐니 뭐니 해도 신성한 막노동이 최고야, 거기다 장인정신 좀 봐라'

음... 생각해보면 참 재미진 시절이었다.

요즘 아해들은 성적을 어찌 속일까?

못하겠지? 이너넷으로 댐시 검색 가능할테니.

그럼 학교 홈페이지 자체를 만들어 버리는 아해도 있으려나?

아마 우리 셋이 지금 태어나 학생스러운 무언가의 신분이라면 분명 했지 싶지만.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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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12-02-24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하 재미지게 사셨네요. 아이참, 난 왜 이런 추억을 못 만든 거지. -.-;;

플라시보 2012-02-24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인님. 공부를 잘 하셨나봅니다.^^ 공부를 못 해도 너무 못하면 저런 짓을 하게 된답니다. 조짐을 당하지 않으려면 조작과 거짓이 난무할 수 밖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