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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배심원
존 그리샴 지음, 최필원 옮김 / 북앳북스 / 2004년 7월
평점 :
절판
내가 고등학교를 다니던때. 나는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늘 교과서 이외의 책들에 빠져 있었다. 당시 나를 매료시킨 작가들은 베르나르 베르베르, 존 그리샴, 마이클 클라이튼이었다. 어른이 되어버리고 나서는 내 독서 취향이라는 것도 꽤나 많이 바뀌여서 나는 더 이상 위에서 언급한 작가들의 책을 사지 않게 되었지만 그래도 고등학교 시절을 지루해서 미처버리지 않도록 해 준 것에는 언제나 감사하고 있다. 존 그리샴의 책은 정말로 간만에 다시 보게 되었다. 어찌어찌해서 내 손에 들어온 책은 상당히 두꺼웠다. 그의 책은 주로 두터워서 1.2권으로 되어있는게 많은데 요즘은 존 그리샴도 잘 안팔리는지 다소 두꺼워도 한권으로 쇼부를 보려는것 같다.
솔직하게 말 하자면 오랜만에 만난 존 그리샴은 약간 실망스러웠다. 템포도 많이 느려졌으며 책장을 늘리는것 만이 자신의 사명이라는듯 아주 길게 늘여놓았다. 그래서 두꺼운 책으로 인해 손목 관절에 무리가 올때 마다 나는 존 그리샴이 원망스러웠다. 그의 장기였던 법정 스릴러라는 점은 여전했지만 뭐랄까 김빠진 콜라나 사이다를 마시는 기분이었다. 예전의 그 톡 쏘던 장기가 이제는 많이 시들해졌는지. 아니면 내가 그 사이에 너무도 재밌는 책을 많이 봐 버려서 눈이 높아져 버렸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책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라고 보면 된다. 이 책의 주인공이자 지방 신문인 포드 카운티 타임스의 편집장 윌리가 9년동안 신문사를 운영하면서 여러가지 일을 겪는 것. 그리고 또 한가지는 이 마을에서 유일하게 가장 끔찍한 살인 사건으로 기억될 로다 카셀로를 죽인 대니 페드깃에 대한 내용이다. 물론 이 사건들은 두개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편집장인 윌리는 이 사건에 유달리 많은 관심을 가지고 처음부터 형사 못지 않게 꼼꼼한 취재를 거쳐 신문에 싣는다. 어떤 정황으로 봐서도 사형을 선고받아 마땅한 대니 패드깃은 집안의 막대한 부와 늘 저질러왔던 부정부패 덕분에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그로부터 9년후 대니 패드깃은 가석방되고 윌리는 9년동안 운영해 왔던 신문사를 팔게 된다.
이 책에 등장하는 대니 패드깃 가문은 온갖 비리의 온상이다. 그들은 마피아처럼 무법자들이다. 그래서 그 집안의 한 구성요원인 대니 패드깃이 부녀자를 강간 살해하고 그 모습을 그녀의 두 아이들이 눈으로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사형을 선고받지 않게 된다. 하지만 대니 패드깃 가문이 내게는 그다지 잔악무도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세상에는 그보다 더 한 비리와 악이 판을 치고 있다. 부녀자를 강간 살해하는 일 정도는 하루에도 열두번도 더 일어난다. 연쇄살인사건이 비교적 적었던 우리 나라도 얼마전 연쇄살인범 유영철이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들을 무차별로 죽이고 시체를 유기하는 과정에서도 더할 수 없는 끔찍함을 보여주었다. 그에비해 로다 카셀로를 마음속으로 조금이나마 흠모해 왔던 대니 패드깃이 범죄를 저지른 것은 끔찍하기는 하지만 연쇄살인범 만큼은 아니다. 슬픈 사실이지만 나는 이미 대니 패드깃이 로다 카셀로를 강간 살해하는 것에 끔찍해하고 반드시 처죽여야 한다며 부르르 떨기에는 세상의 험한 일들을 너무 많이 보아버렸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나는 지금 대한민국을 사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범죄에 대해 상당히 두려워하는 한편(자신에게 일어날 가능성에 대해) 어지간해서는 충격을 받지 않을만큼 (남의 얘기일 경우) 무뎌져 버렸다. 그래서 조용한 미국의 시골 마을에서 일어난 이 살인사건은 결과적으로 나에게 와닿지가 않았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존 그리샴이 쓴 글을 봤다. 자기가 언급한 법들 중에서 폐지된것이 많으니 제발 자기에게 항의 편지를 보내지 말라. 이미 자기도 알고 있는 고의적 오류이다며 매우 피곤한 필체로 역자후기를 대신했다. 그 대목을 읽으면서 나는 갑자기 존 그리샴이 측은하게 여겨졌다. 얼마나 그런 편지들을 많이 받았으면 역자 후기에 저런 얘기를 적어놓았을까 하고 말이다. 누구나 지적을 받는것은 싫어한다. 더구나 자기가 충분히 알고 있는 부분에 대한 끝도없는 지적은 정말이지 구토가 넘어올것 같다. 사람들은 더럽게 한가하여 날이면 날마다 남들을 귀찮게 하는 짓을 절대 멈추지 않는다. 나도 그러한 이유로 얼마전 쓰던 칼럼을 때려 치우려고 했으나 기자가 전화해서 원고마감을 독촉하니 갑자기 무뇌아라도 된것처럼 내일 모레까지 써 드릴께요. 해 버렸다. 나도 그들에게 존 그리샴처럼 말하고 싶다. 다 아니까 제발 메일좀 보내지 말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