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며칠전 나와 친구들 두 명이서 이 영화를 봤다. 전작인 로드무비를 너무나 괜찮게 보았기 때문에 그 감독의 신작은 꼭 보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친구1. 영화잡지 프리미어 기자인 동생이 추천했기 때문에 봐야겠다고 생각한 친구2와 달리 나는 김혜수가 보고 싶었다. 그녀가 이 영화를 어떻게 이끌고 나갈 것인가 너무나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전작인 미스터 콘돔, 닥터 봉, 신라의 달밤, YMCA야구단 처럼 꼭 그녀가 아니여도 상관없었을 작품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김혜수라는 여배우를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한때는 그녀가 참 천박한 이미지를 즐기는구나 하는 생각마저 했었다. 그녀의 과감한, 펜슬을 들고 단박에 화악 그려재꼈을것 같은 갈매기 눈썹. 삐에로처럼 크게 그린 입술. 여배우치고는 다소 풍만한 육체까지 나는 그녀의 이미지 모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녀를 다시 본 것은 김혜수의 플러스 유 라는 토크쇼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였다. 그녀는 말을 잘 했다. (물론 그녀의 이전 주자였던 이승연이 한수 위였지만) 그녀의 매끈한 말솜씨를 듣고 있자니 자기 이미지와 달리 다소 아기같았던 그녀의 목소리마저 나쁘지 않게 들렸었다. 그 이후 그녀는 고만고만한 TV드라마를 했고 (노희경의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사극 장희빈에서는 아기같은 목소리 대신 낮고 카리스마 있는 저음의 목소리와 안그래도 큰 눈을 똑바로 부릅뜨고 정말 열심히 연기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하야 나는 김혜수라는 배우를 조금씩 재평가 하기 시작했다. (이 재평가는 물론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그녀를 과소평가했기 때문에 이뤄진것이었다.)
얼굴없는 미녀에서의 김혜수는 완벽했다. 연기로나 비주얼로나 그녀가 보여 줄 수 있는 베스트의 모습을 보였다고 생각한다. 경계성 장애(누군가에게 버림받을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정신착란을 일으킴)를 겪고 있는 극중 지수는 보통 사람들이 도저히 할 수 없는 과감한 악세사리와 파격적인 옷차림 (노출로 인한 파격보다는 디자인과 색으로 승부한다.) 을 100% 소화한다. 원석의 알록달록하고 큼지막한 목걸이와 반지. 엄발란스하면서도 과감한 컷의 의상들. 과연 이걸 입어서 김혜수만큼의 느낌을 낼 사람이 대한민국 여배우 중에서 누가 있을까 싶다. 거기다 과장되어 있는 화장과 선글라스만 끼면 '인궈니 라이프!' 하고 외칠것 같은 수세미같은 헤어스타일까지. 정말이지 김혜수는 도저히 소화하기 힘들것 같은 지수의 외모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또 하나 주목할것은 김혜수의 허스키하게 쫙 가라앉은 매마른 목소리다. 김혜수의 목소리는 사실 굉장히 앵앵거리는 고음이다. 경계성 장애를 겪고 있는 환자가 그런 밝고 명랑한 목소리로 말 한다는 것은 분명 어색했을 것이다. 물론 이렇게 극중 인물때문에 목소리를 변화시킨이가 없었던건 아니다. 실패하긴 했지만 [4인용 식탁]에서의 전지현 역시 가라앉은 저음을 선보인바 있다. 하지만 전지현의 목소리가 조금 미숙했다면 김혜수의 목소리는 세월의 관록이 묻어있는듯 하면서도 상당히 복잡한 느낌을 준다. 물론 요즘 영화에서 배우들이 대사를 치는것을 보면 마치 영화가 아닌 실제에서 대사를 치는듯 현실적인데 비해(류승범, 공효진, 이나영, 양동근을 떠올려보길 바란다.) 너무 작위적인 나머지 우스꽝스러웠던 부분도 있긴 했지만 말이다.
김태우도 나름의 열연을 했지만 김혜수에 비해서는 많이 가려지는 느낌이다. 김혜수가 연극을 했다면 김태우는 연기를 한 느낌이랄까? 아무튼 나는 두 사람이 그다지 멋진 조화를 이루지는 못했다고 생각한다. 성숙미가 뚝뚝 넘쳐 흐르는 김혜수에 비해 김태우는 선이 좀 약한 편이다. 따라서 김태우의 연기가 괜찮았음에도 불구하고 김혜수와 동시에 잡히는 샷에서는 어딘가 모르게 처진다는 느낌을 받는다. 어쩌면 그건 연기력때문이라기 보다는 비주얼적인 면에서 처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약간 처진눈의 김태우는 복잡하기 보다는 선해 보인다.) 극중 김태우가 소화해내야 하는 인물 역시 상당히 복잡한 내면을 보여줘야 하는데 솔직히 말해 선한 그의 얼굴에서 그런면을 표현해내는 것에는 한계가 있지 않았나 싶다. 김태우는 유달리 눈빛이 약한 연기자인데 얼굴없는 미녀에서는 눈빛이 더더욱 약해 보였다.
사실 이 영화는 상당히 불친절하다. 도무지 극중 인물들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에 관한 설명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이 영화에 대해 럭셔리니 어쩌니 하는 것도 바로 그런점 때문이 아닌가 싶다. 비주얼도 끝내주고 영화적 장치도 완벽했지만 정작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인물들의 내면이 없다. 그건 마치 너무나 잘사는 사람들이 '인생이 심심해서 미치겠어' '돈을 써도 감출 수 없는 이 공허함을 어쩌란 말인가' 하는 외침과도 비슷하게 들린다. 대부분 먹고 살기 힘들고 사는게 기쁨의 연속만은 아닌 일반인들은 극중 지수나 석원(김태우) 처럼 되기 힘들다. 즉 적당한 정도의 아픔은 있어도 없는 척 할 뿐 아니라 스스로 회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그러나 지수나 석원은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면이 너무 많다. 아하. 이래서 그녀가 이렇게 되었구나 혹은 그래 그정도면 그가 그렇게 될만 해 같은 공감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너무 비주얼과 이미지에 치우친 나머지 극중 배우들은 관객과의 소통에는 실패한다. 이것은 시나리오상의 문제이기도 하며 영화의 네러티브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이기도 하다.
비주얼과 네러티브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던 작품으로는 '더 셀' 이라는 외국 작품과 우리나라의 작품이라면 '정사' 와 '스캔들' '장화홍련'을 들고 싶다. 이 네 작품 모두 감독은 자신만의 독특한 비주얼 세계를 창조했으며 그 멋진 비주얼 만큼이나 썩 괜찮은 스토리와 구성으로 관객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하지만 얼굴없는 미녀는 비주얼 면에 있어서는 위의 작품들과 충분히 견줄만 했지만 스토리나 구성에 있어서는 많이 뒤쳐지지 않았나 싶다. 디자인이 괜찮다고 해서 그 물건의 성능이 조금 떨어져도 괜찮은건 아니다. 디자인이 아름답기 위해 사용하기 불편하도록 만들어 놓았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디자인과 실용성은 함께 상호보안을 해야 하는 존재이지 하나를 위해 다른 하나쯤은 포기할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비주얼을 위해 스토리를 포기할 수도 없고 스토리를 위해 비주얼을 포기하다가는 눈이 높아진 관객들의 미학적 욕구를 도저히 만족시켜 줄 수가 없다. 그런 점에서 볼때 얼굴없는 미녀는 몹시 아쉬운 작품이었다. 조금만 더 스토리와 극중 인물들의 내면에 포커스를 잘 맞췄더라면, 아니 조금만 더 영화가 친절하기라도 했더라면 더 많은 관객들과 소통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잘 만들었다. 장면 하나 하나에 감독이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가 느껴진다. 화면의 구도, 색상, 조명, 소품.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배우들마저 완벽한 미장센을 이룬다. 우리나라 감독들이 잘 쓰지 않는 분명한 색의 대비는 그가 얼마나 조명과 색상에 자신감이 붙어 있는가를 보여준다. 상당히 아쉬웠지만 이 영화를 본건 잘했다고 생각한다. 금방 보고 나서는 조금 실망을 했지만 곱씹을수록 괜찮은 영화였다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왜냐면 영화가 통째로 이렇게나 분명하게 내 머리속에 남아있은 적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