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하루종일 아파서 침대 위에 누워서 TV채널만 돌렸다. 그러다가 플란다스의 개를 봤다. 이미 봤던 영화지만 나는 이 영화를 또 다시 봤다. 내 취미가 봤던 영화 또 보기 이기도 하지만 이 영화에는 내 친구가 나오기 때문이다.

처음 이 영화를 볼때만 해도 나는 그녀가 나오는지 전혀 몰랐었다. 그도 그럴것이 대학 졸업하고는 연락을 하지 않았으니... 그렇게 따지자면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대학때 친했던 것 만큼은 사실이므로 그냥 친구라고 해 두자.

내 친구의 이름은 고수희다. 배두나의 친구로 나오는 뚱뚱하고 홀딱 깨는 여자애가 바로 고수희다. 수희와 나는 대학 동창이다. 당시 우리과에는 연예인이 되려고 하는 애들이 무척 많았는데 수희는 연기자가 되고 싶어하는 아해였다. (참고로 나는 아무것도 하고 싶은게 없었는데 우리과 선배들과 교수들은 나 같은 인간이 왜 우리과에 들어왔는지 무척 신기해 했었다.)

우리 과에는 연기수업 시간이 솔찮게 있었다. 이론 공부도 있었고 실제로 연극을 해야 하기도 했었다. 연기는 TV연기와 영화연기 그리고 연극으로 세분화 되어 있었는데 수희는 특히 연극에 두각을 나타냈었다. 과에서 올리는 작품에는 꼭 수희가 연기를 했었고 나는 언제나 음향이랄지 조명이랄지 같은 스텝을 했었더랬다.

수희의 첫 인상은 솔찍하게 말해서 무서웠다. 내 3배는 족히 되어보이는 몸집과 예사롭지 않은 생김새. 그래서 1학년 1학기 초에는 수희와 별로 친하지 않았었다. 수희는 서울에서 내려온 자취파였고 나는 집에서 학교를 다니는 집파 였으므로 어울릴 기회도 별로 없었다. 그러다가 수희와 친해진 계기는 나도 집을 나와서 자취를 하게 된 2학기 부터였다. 그때부터 나도 자취파가 되어 부어라 마셔라 죽자를 외치는 나날들이 계속 된 것이었다.

플란다스의 개를 보면 수희는 연기를 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수희의 말투 평소 행동이 전부 그대로 보인다. 보다가 보면 수희가 배두나에게 전화로 방송국 인터뷰 운운하면서 장난전화질 하는 장면이 있는데 실제로 수희와 나는 유치하게시리 내 집구석에서 그런 장난 전화질로 하루를 보낸적도 있었다. 그때는 그게 왜 그렇게나 재밌던지. 특히나 우리가 뻥을 친 것은 방송국이라며 노래를 시키거나 개인기를 해 보라는 것이었다. 수화기 너머로 열심히 노래를 부르고 성대모사를 하는 사람들. 그리고 우리는 마지막에 '지금까지 장난전화에 응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하구요. 앞으로는 속지마라잉' 하면서 끊곤 했었다. (그 분들께 지금은 심심한 사죄의 말씀 올리는 바이다.)

당시 수희와 함께 같이 친했던 안양예고 아해들은 지금 다 어디서 무얼 하는지 모르겠다. 투투의 황혜영을 쏙 빼다 닮았던 이양. 큰 키에 모델같은 늘씬함을 자랑했던 조양. 지금 내가 근황을 알고 있는 사람은 연극 무대에 자주 서는 수희 뿐이다. (그나마 연락도 되질 않지만 말이다.)

자취를 했던 우리들은 술도 참 많이 퍼 마시고 담배도 많이 피웠었다. 어느날인가 내가 담배를 띡 꺼내서 물 자 수희는 '야. 너같은 범생이도 담배질이냐? 미친년 얌전한척 혼자 다하더니 깬다' 하며 놀라워 했었던게 기억난다. 

나는 욕을 참 싫어하는데 욕을 밉지 않게 잘 하는 사람은 수희밖에 못 봤다. 그애는 어떤 욕이건 상스럽지 않게 꼭 입의 껌처럼 착 달라붙게 하는 재주가 있었었다. 욕을 하면서도 천하게 보이지 않고 상대를 기분나쁘지 않게 하는 것도 참 능력이다 싶다.

언제 서울올라가면 대학로에 가서 수희가 하는 연극이나 한번 봐야겠다. 학교 다닐때 늘 봐왔었지만 무대에 서서 프로로 연기를 하는 것은 아직 한번도 못봤다. 그러면 수희는 여전히 욕을 하면서 '미친년 살아 있었냐?' 하며 웃을 것이다.예전에 알고 지냈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보고 싶은걸 보니 나도 나이를 먹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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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4-03-22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수희란 분이 님의 친구시란 말이죠. 친구가 나오면 정말 반가울 것 같습니다. 아직 전 그런 경험이 없어서, 하핫. 저도 가끔씩 연극을 보는 편이니, 볼 때마다 님의 친구분이 계신지 봐야겠네요. 수희님도 님이 '플라시보'인 걸 아시나요?

플라시보 2004-03-22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라시보의 존재는 모르지만. 제 이름을 말하면 알껍니다. 얼굴을 봐도 알꺼구요^^

마태우스 2004-03-22 1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참, 저 님 이름 알고 있죠!! 안다는 사실을 잠깐 모르고 있었어요^^

플라시보 2004-03-22 1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아마 평생 까먹기 힘든 이름일겁니다.

sunnyside 2004-03-23 0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왓! 정말이세요? 와... 저 플란더스의 개 무지 좋아하고, 거기에 나오는 플라시보님의 친구분 캐릭터도 좋아요.
그 친구분께서 영화 중에 자동차 백미러를 발로 차서 떼어내는 장면.. 한국 영화에서 드물게 여자들의 의리를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아, 암튼 매우 영광입니다. 그분(수희씨라는건 오늘 알았구요)의 친구분이셨다니.. ^^

플라시보 2004-03-25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그 친구 팬이 있다니 제가 다 반갑네요. 저도 저 영화에서 수희가 백미러 발로 차는 장면 보고 참 속이 다 시원했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