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대학을 다닐때 나는 영화 공부를 했었다. 학과에 과목으로 들어 있기도 했지만 워낙에 영화를 좋아하기도 해서 나름대로 열심히 보고(영화를) 읽었던(영화관련 서적을) 기억이 새롭다. 내가 영화에 푹 빠져 살았던 것은 내 개인적인 관심도 있었지만, 대학에 들어간 95년 당시 씨네 21이라는 격주간 영화 잡지가 처음으로 창간되기도 해서 여러모로 영화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어 있던 사회적 분위기도 한몫 했었다. 그때만 해도 머리가 팽팽 돌아가서 무슨무슨 감독 하면 그가 만든 작품을 연대별로 죽 꿰고 영화배우 이름을 대면 어떤 영화에서 무슨 역활을 맡았는지까지 좔좔 외우곤 했었다. 내 친구들도 모두 영화를 좋아했기 때문에 우리는 얼굴만 마추지면 영화에 대한 얘기를 하느라 시간이 가는 줄 몰랐었고 자막도 깔리지 않은 일본영화나 프랑스영화를 보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었다.

세월은 흘러서 지금의 나는 고작 일주일에 신작 영화 한편을 보는 것으로 그친다. 더 이상 부지런하게 영화잡지를 모두 사서 읽지도 않고 친구들과 영화에 대해 장시간 토론하지도 않는다. 그냥 볼 뿐이고 영화는 재밌다와 재미없다 혹은 돈 아깝다 아깝지 않다로 나뉠 뿐이다. 한때는 문화생활부 기자를 하면서 한달에 한 번 정도는 영화에 대해 평이라 하기에는 허접한 감상기 비스무리한 글을 적기도 했었지만 지금은 다 옛날 얘기가 되어버렸다.

빅피쉬의 내용은 이러하다. 허풍선이라 불리울 만한 아버지는 늘 아들에게 뻥을 쳐 댄다. 도저히 있을것 같지 않은 동화같은 내용을 자기가 한 모험이랍시고 아들에게 떠든다. 어릴때의 아들은 그런 아버지를 자랑스러워 하지만 다 큰 아들은 그런 아버지를 싫어한다. 하지만 아버지가 건강이 악화되자 아들은 다시 아버지를 찾게되고 아버지의 얘기를 떠 올린다. 아버지가 죽고 난 다음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들었던 얘기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다 만나게 된다.(장례식에 그들이 참석하는 것이다.) 그리고 생각한다. '울 아부지가 나한테 순 뻥만 처 댄것은 아니구나' 그렇다. 아버지는 얘기를 재밌게 하고 과장을 하긴 했지만 순도 100% 구라를 치지는 않았던 것이다.

빅피쉬는 팀버튼 감독의 영화이다. 아직도 내가 작품을 고르는 가장 큰 기준은 감독이 누구냐 하는 것이다. (물론 배우를 보고 고르기도 하지만 작품을 기대 한다기 보다 그냥 그 배우를 영화 내내 볼 수 있다는 행복감에 선택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길고 꾸준하게 사랑해 마지 않은 감독이 바로 팀버튼이다.

팀버튼의 주옥같은 작품들은 내 머릿속에 단 한장면도 빠지지 않고 고스란히 남아있다. 피위의 대모험에서 정말 대 모험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는 상상력의 끝간곳을 보여 주었고 비틀쥬스에서는 장면 장면이 전부 예술이었다. 거기다 그의 최고작 가위손은 조니뎁을 곱상한 외모를 지닌 남자가 아닌 연기자로 보이게 했고 눈이 날리는 곳에서 위노나 라이더가 빙글빙글 돌던 장면은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 장면이다. 배트맨은 그 이후 시리즈에서는 좀 밝고 어수선해 졌지만 팀버튼이 감독한 배트맨 1은 특유의 음산함과 암울함이 영화 저변에 깔려 있었으며 고담시티는 팀버튼이 만든 가장 훌륭한 셋트였다.  거기다 내가 제일 사랑하는 크리스마스 악몽은 스톱애니메이션의 최고봉이었다고 생각한다. 음악도 훌륭했으며 주인공 조연 할것 없이 모두 개성만점의 캐릭터들이 있는 종합 선물 셋트였다. 팀버튼의 기괴한 상상력은 화성침공에서 활짝 꽃을 피운다. 컴퓨터 그래픽이 하이퍼 리얼리즘을 추구하던 그 시대에 어설픈 인형같은 화성인들. 이미 스필버그 감독이 진짜같은 이티라는 외계인을 만든지 십수년이 지났는데 팀버튼의 화성인들은 너무도 가짜 티가 팍팍 났다. 그 시대에 그렇게 할 수 있는 감독은 팀버튼 뿐이었으리라. 어떻게든 진짜같음으로 관객들의 예리한 눈을 피해가려고 고민하는 다른 감독들과 달리 팀버튼은 드러내놓고 허구같음을 보여주는 대신 내용에 충실했다. 기승전결이 확실한 100점 만점의 내용이 아니라 팀버튼이 아니면 저런 방향으로 상상조차 못했을 재기발랄함을 보여줬다. 슬리피 할로우도 아주 괜찮은 작품이었으며 여태까지의 영화와 상당한 차이를 두는 에드우드도 명화중 하나이다.

그러나 나는 요즘의 팀버튼 감독에 대해서는 불만이 많다. 나는 혹성탈출을 보지 않았다. 뻔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나는 감독들이 자기 마누라를 영화에 출연시키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그 좋은 예는 컷스로드 아일랜드의 지나 데이비스가 당연 그랑프리 감이다.) 팀버튼은 혹성탈출에 자기 마누라인 헬레나 본 햄 카터 (파이트 클럽에서 브래드 피트의 섹스 파트너로 나왔던 그 여자.)를 출연 시켰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용도 전혀 땡기지가 않았다. (내 예감은 적중해서 그 영화는 팀버튼의 이력에 오점이 되었다.) 지금 이 영화 빅피쉬에도 헬레나 본 햄 카터는 1인 2역씩이나 하며 등장을 한다. 헬레나 본 햄 카터는 나쁜 배우는 아니지만 팀버튼 영화와는 도무지 맞지 않는 배우이다. 그런 배우를 마누라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출연시키다니... 사랑의 힘이라고 밖에는 설명 할 길이 없다.

팀버튼에 대해 기대를 하지 않고 본다면 빅피쉬는 괜찮은 영화이다. 영화관에 가서 돈 주고 본게 아까울 지경은 아니다.(안봤지만 혹성탈출 보다는 나으리라 믿는다.) 하지만 팀버튼 감독의 전작들을 너무나 사랑했던 사람들이라면 그냥 보지 않기를 권한다. 그건 마치 김빠지 코카콜라를 마시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우리는 이미 코카콜라가 똑 쏘는 맛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김빠진 콜라를 마시면 어떻겠는가? 그건 설탕물에 지나지 않는다. 코카콜라가 코카콜라인 이유는 입안을 알싸하게 쏴대는 김에 있고 팀버튼 영화가 팀버튼표라고 불리울 만한 이유는 범인들은 생각지도 못할 그만의 상상력에 있다. 그러나 빅피쉬에는 상상력이 없다. 아들에게 과장된 자신의 삶을 들려주는 아버지 때문에 영화 곳곳에는 과장된 진실들이 포진 해 있지만 그 정도로 팀버튼의 상상력이라는 마크를 붙여주기는 힘들다. 그건 팀버튼이 아닌 다른 감독이 해도 충분하게 해 낼 수 있는 정도였다. 거기다 팀버튼의 셋트는 점점 더 재미가 없어진다. 가위손에서의 그 일렬로 쫙 늘어선 집들, 배트맨의 고담시티, 슬리피 할로우에서의 음산한 숲, 비틀쥬스에서의 현실과 죽음의 세계에는 반에 반도 못 미치는 실망스런 셋트들만 등장한다. 역시 그 정도 셋트는 팀버튼이 아닌 다른 감독도 충분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팀버튼에게 기대하는 것은 남다른 상상력과 남다른 미학적 시각이지 그럭저럭 봐줄만한 영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나는 영화는 잘 봤지만 팀버튼에게는 더 없이 실망을 해 버렸다. 내가 혹성탈출을 보지 않았던 것은 그에게 실망하지 않기 위해서인데 나는 빅피쉬는 영화사의 마케팅에 놀아나 얼씨구나 하고 봐 버렸다. 사랑하는 사람이 실망스런 모습을 보이면 애써 보지 않으려고 하는게 나란 인간인데 나는 그만 두시간 가까이 봐 버렸다. 이걸 만회하는 길은 딱 하나이다. 누가 봐도 팀버튼표 영화라는 것이 확실한 영화를, 더 늦기전에, 마누라 출연시키지 말고(시키더라도 딱 어울리는 역활을 맡기던지), 제대로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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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bblur 2004-03-11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팀버튼 부인(또는 약혼녀)은 '리사 마리'아닌가요? (엘비스 딸 리사 마리 프레슬리말고...'화성침공'의 금발머리 높이 솟은 화성미녀였던...) 내가 모르는세 바뀐건나? 뭐, '리사 마리'였다해도 마누라 계속 영화에 출연 시켰던건 마찬가지지만...빅 피쉬는 아니지만 '에드 우드'부터 '혹성탈출'까지 팀 버튼의 모든 영화에 출연했었죠.(주연급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꽤 인상적인 역할들로...)
근데 이여자도 약간 특이하더라구요. 팀 버튼의 뭐가 제일 좋냐니까, 십년동안 안 빗었다는 헤어스타일이 제일 좋다고...ㅋㅋ 물론 저도 그 헤어스타일 좋아하지만요.
아참! 인사가 늦었네요. 저는 플라시보 님의 숨겨진 오랜 독자 입니다. 항상 글 읽고 감동(?)받으며 그냥 돌아서곤 했는데 오늘은 용기를 내서 이렇게 글 남깁니다. 근데 첫 글부터 트집잡는 것 같은 글이라 좀 죄송한 생각이...^^;;

플라시보 2004-03-11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트집잡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제가 알기로는 헬레나 본 햄 카터가 마누라로 알고 있는데... 지금 긴가민가 하고 있습니다. 흐흐^^

플라시보 2004-03-11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찾아보니 마누라란 소린 없고 연인이라는 소리는 있네요.

진/우맘 2004-03-11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인인데다가, 임신중이라나요? 그래서 마녀 분장 힘들다고 고부분은 이틀에 몰아찍었다는군요.
정말 근사한 영화평입니다. 그런데, 어째 저는 그 설탕물이 달콤해서 좋았다는...팀버튼을 좋아하긴 하지만, 기대수준이 그렇게 높지는 않아서 였을까요?^^

플라시보 2004-03-11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재밌게 봤으면 되는거죠. 전 팀버튼한테 너무너무 기대를 걸었기 때문인것 같습니다. 한때 팀버튼 때문에 감독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잠깐 드러누워서 했을 정도였으니까요. (전 어려서 부터 뭐뭐가 될테야 같은 생각은 한번도 안해봤는데 팀버튼 영화를 보면 매력적이여서 잠시나마 막 감독이 되고 싶기도 했습니다. 언감생심 제가 무슨 감독은 감독입니까? 하하)

bbbblur 2004-03-11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은 헬레나 본 햄 카터랑 사귀는 게 맞는가보군요...근데 리사 마리랑 이전에 약혼 관계였던 것 역시 확실하고... 근데 '혹성탈출'에는 이 두 여자가 둘 다 나왔었는데...그때가 '과도기' 였나 보군요...

플라시보 2004-03-11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그런가봐요. 거기서 원래 사귀던 리사 마리를 뻥 차버리고 헬레나 본 햄 카터에게 갔나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