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리타 공항에 도착하자 마자 찍은 사진. 

여행의 설레임보다  

공항 리무진과 이코노미석에 시달려서 

당장 호텔로 가서 그저 눕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일단 짐부터 정리했다. 

예의 그 챙겨가기 습관은 여전해서  

이번에는 손톱깎이까지 다 가져갔다. 

그나마 뻘짓이 아니었구나 싶었던건 

호텔안에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는거. 

새로 지어서 깨끗하다는것 빼고는 정말 휑하니 아무것도 없었다. 



이번 여행의 테마는 '무계획' 이었다. 

그냥 가서 가고싶은 곳을 찍은다음 어떻게건 찾아간다가 내 계획이라면 계획이었다. 

덕분에 수십명의 일본인들에게 영어로 지하철 노선을 물어야 했다. 

그들이 친절하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아무곳도 가지 못했을 것이다. 

일정은 그때그때 지하철로 이동할때 짰으나 

그마저도 잘 지키지 않고 내맘대로 돌아다녔다. 



나는 심장이 약해서 놀이기구를 못탄다. 

특히 롤러코스터 같은건 

타다가 심장마비로 갈 수도 있기 때문에 더더군다나.. 

그런데 지상으로 달리는 이 유리카모메는 

어찌나 커브길이 많은지 

제일 앞에 서서 내려다보니 

롤러코스터가 따로 없었다. 

안전하다는 믿음 때문인지 

사방이 다 막혀있는 차 안이어서인지 

아무튼 전혀 무섭지 않고 신났었다. 



첫 날의 마감은 맥주 한 잔. 

원래 불면증 때문에 수면제를 먹어도 잘 못 자는 내가 

이날은 맥주 한캔으로 정말 쉽게 잠이 들었다. 

역시 내 불면증의 원인은 '너무 꼼짝도 않고 앉아있다' 때문인가? 흠.. 



둘째날 아침.  

일찍 일어나겠다던 계획과 달리 9시에 눈을 떠서 

눈꼽도 떼지 않은 채 9시 30분이면 끝나는 아침식사를 먹으러 갔었다. 

가만 생각해보니 너무 거지같이 하고 다니면 안되겠다 싶어서 

선글라스를 끼기로 마음먹었다. (지만 안보이면 괜찮다고 생각한다.) 

느긋하게 준비해야지 라며 준비를 했더니만 

11시가 넘어서야 나설 수 있었다. 

참 태평스런 관광객이 아닐 수 없다. 



일본에 가면 딱 두 가지를 하고 싶었다. 

내가 좋아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살 것. (일어로 되어있어 읽을 수 있거나 말거나) 

한국에서 좀처럼 찾기 어려운 사쿠란보 티를 살 것. 

다행스럽게도 두 가지 다 이루고 왔다. 



시부야 109 백화점 맞은편에 있던 스타벅스 건물 (실제 건물 이름은 모름) 

커피를 마시러 갔는데 어찌나 줄이 길게 늘어서 있던지 

그만 질색해서 가려는 순간 5층에 레스토랑이 있다는 표시가 보였다. 

안그래도 다리아픈참에 잘 되었다며 

별로 식욕도 없었지만 감자튀김과 샐러드를 시켜서 먹었다.  

웃기는건 분명 식욕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단 먹으니 다 들어가더라는 것.

이번 일정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동네인 지우가오카에 있는 한 카페. 

집들 사이에 쏙 들어가 있어서 처음에는 보이지도 않다가 

불빛을 보고 찾아갔는데 아담하고 예쁜것이 꼭 그 동네를 닮은 카페였다. 

서빙하는 여자가 영어를 꽤 유창하게 해서 

지하철 노선과 택시비, 버스비등을 물었더니 친절하게 가르쳐줬다. 

마지막에 너무 고마워서 기념품을 주고 싶은데 

한국거라곤 천원짜리 달랑 한 장 뿐이었다. 

그래서 그걸 줬더니 굉장히 좋아했다. (절대 팁 아니었다. 수브니어 라고 확실하게 말했다.) 



첫날과 마찬가지로 역시 둘째 날의 마감도 맥주 한잔. 

약간 더 큰 캔을 사서 다 비우고 

역시 수면제 없이 쿨쿨 달게 잤다. 



마지막 일정은 우에노 공원. 

앉아서 내내 비둘기도 보고 

사서 먹지는 않고 들고 다니던 베이글도 뜯어먹고 

근처 시장도 가봤다. 

그리고 기념품에 목숨을 거는 약 3명의 지인들의 선물을 샀다. 

여행할때 누군가에게 선물을 사는건 

그냥 사고 싶을때 사야지 

사달라고 해서 사 주는건 정말이지 피곤한 일이다. 



돌아오는 길에는 겁나게 피곤할 것이라는 내 예상대로 

비지니스 클래스를 끊지 않았으면 울뻔했을듯. 

국내선은 비지니스를 타봤으나 

해외로 갈때는 처음 타보는지라 

촌년처럼 이것저것 만져가며 무척 좋아했다. 

그랬더니 내 옆에 앉은 외국인 아저씨가 내가 완전 앤줄 알고 

시계 불빛으로 비행기 내부 여기저기를 비추면서 장난을 쳤다. 

서른 다섯 먹었으니 이런 장난은 좀.. 이라 말하고 싶었지만 

아저씨도 매우 심심해보였으므로 그냥 참았다. 

비지니스는 좌석이 넒은것도 넓은거지만 

서비스가 끝내줬다. 

와인도 종류별로 4가지나 있고 (난 다 달라고 해서 마셨다. 덕분에 알딸딸한 기분으로 푹잤다.) 

기내식을 줄때는 무려 테이블보 까지 깔아줬다. (게다가 일일이 접시에 씌운 랩을 뜯어줬다.) 

담요마저 이코노미와는 비교도 안되게 두꺼운걸 보고는 생각했다. 

돈이 좋긴 좋구나. 

먼 곳으로 갈때는 너무 비싸서 비지니스를 타지 못하겠지만 

가까운 곳에 갈때는 한번 탈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 도착하자 마자 핸드폰을 켰는데 (내 핸드폰은 로밍이 안되어서 공항에서 임대폰을 받아야 한다고 해서 그냥 포기했다. 꼴난 3일 전화 안받는다고 끝장날 일도 없을테니까.) 

문자 메세지며 캐치콜이 줄줄이 들어왔다. 

아... 내가 살아있구나. 나는 사람들과 사는구나 하는걸 절실하게 느끼는 순간이었다.



맨 위의 사진은 호텔 근처에서 구입한 사케. 병이 너무 예뻐서 샀다.  

 

현지에서 모은 온갖 기념품들. 기념품을 사는 것 보다 저런게 더 기념이 된다.  

상자안에 고이 넣어뒀다가

내가 거길 갔었나 싶게 까마득한 날 문득 열어보면 참 새롭다.

 

하루키의 책 두 권과 사쿠란보 티. 나를 위한 선물. 내 로망의 실현. 

 

여행내내 적었던 일정들. 2008년부터의 모든 여행이 이 노트에 적혀있다.

 

아주 가끔은 여행을 다녀야겠다. 

늘 누군가와 함께 가고 

늘 정해진 곳으로만 다녔었다. 

그런데 이렇게 아무곳에나 가고 

아무거나 하고 싶은대로 하는 여행. 

이게 내 체질에 딱 맞았다. 

그런데 몰랐었다. 

안해봤었으니까. 

이렇게 여행 조차도 내 타입을 알지 못하는데 

나는 얼마나 더 많이 나 자신을 모르고 사는걸까? 

그러니까 결론은 

안해보면 그냥 모르고 살수도 있다는거다. 평생.  

그래서 이제부터는 하고 싶은건 대충 해 가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돈을 모으는것도 좋고, 미래를 준비하는것도 좋고, 일도 좋지만

일단 나는 현재를 살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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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2-10 0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아무리 서툴다 하더라도 여행지에서는 꼭 현지어로만 말을 하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어요. 제가 달리 외국어를 잘해서가 아니라, 그 곳 사람들이 가장 많이 쓰는 단어를 나도 한 번 써보고, 듣고 싶은 욕망에. 제 여행은 소통입니다. 플라시보 님의 여행은 자기 자신인 듯 하군요.


그런데 왜 `사와'는 드셔보시지 않으셨나이까!

플라시보 2010-02-10 11:34   좋아요 0 | URL
음.. 그 말이 맞는것 같아요. 제 여행의 목적은 소통이라기 보다는 제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 그리고 나의 또다른 면을 보는것 뭐 그런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와가 뭔가요? 몰라서 못 먹은듯^^ (참 손톱깎이는 님이 챙겨간다고 해서 저도 챙겨갔더니만 너무 유용하게 썼답니다. 흐흐) 그나저나 현지어로만 말 하기. 정말 대단하신것 같아요. 으...전 도저히^^ (제가 뭣보다 싫어하는 공부를 해야하잖아요. 하하)

Mephistopheles 2010-02-10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사진으로 보면 완벽한 '시보사마'같습니다.

플라시보 2010-02-10 11:34   좋아요 0 | URL
시보사마는 지명 이름인가요? ^^ 아니면 다른 뜻이?

Mephistopheles 2010-02-10 13:01   좋아요 0 | URL
욘사마, 지우히메...플라시보+사마 혹은 히메.....
(아 단어 섞어보니까 시보히메가 맞겠군요..심히 썰렁.)

플라시보 2010-02-10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스스로를 히메라고 하기에는 심히 무안하지만 그래도 사마 보다는 히메가 더 맞겠어요. 그래도 여자잖아요. ㅋㅋㅋ 시보히메. 너무 감사해요. 깔깔^^

2010-02-11 0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플라시보 2010-02-11 09:25   좋아요 0 | URL
네. 일단 여행을 간다는 것 자체가 참 힘든 일이죠. 저처럼 거의 놀고 먹는 인간은 시간은 있되 돈이 없고^^ 돈을 많이 버는 사람들은 시간을 빼서 여행을 할 여유가 없죠. 놀기 위해 먼 곳으로 간다는 일. 참 쉽지만은 않은것 같아요.

BRINY 2010-02-18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그래요. 불면증에 좋은 약은 하루종일 기분좋게 쏘다니는 거, 그리고 잠자기 전의 맥주 한잔.

플라시보 2010-02-19 08:21   좋아요 0 | URL
네. 그런것 같아요. 몸을 안쓰면 잠이 안오더라구요. 그리고 맥주 한잔. 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