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님의 "가라타니 고진과 새뮤얼 헌팅턴"

그 과도한 소임이 일부의 문학가와 평론가의 의식에는 분명 있었지지만 대중의 의식 속에서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소위 민중문학은 의무감에서 소수자가 읽는 소설이었지 시대를 특징지을 만큼 중요한 문학은 아니었던 것 같구요. 결국 대중에게 소설은 재미로 읽는 것이지 거기서 교훈을 얻는다고 생각한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많지 않은 것 같아요.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특별히 종언을 논할만한 중요한 흐름을 소설이 차지한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시작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제가 말할 수는 없고 보다 보편적인 심금을 울리는 문학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는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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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님의 "가라타니 고진과 새뮤얼 헌팅턴"

제 책상에도 <문자와 국가>가 놓여있습니다.^^ 고진 이론의 많은 부분을 공감하지만 '근대 문학의 종언'테제는 그리 공감이 가지 않더군요. 왠지 뭔가 핵심 주변을 겉도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 보니 '근대 문학'에 대한 가치 평가가 달랐던 데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고진은 '근대 문학'이 근대 사회에서 뭔가 계몽적이고 선도적인 역할을 하는 특수한 위치에 있었다는 걸 전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 '종언 테제'에 제가 공감하지 못했던 건 한국 문학이 근대 한국의 역사에서 그런 특수한 위치를 갖고 있다는 걸 제가 실감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진이 일본에서 체험한 것을 한국에 있는 저는 체험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일본의 나쯔메 소세키, 중국의 루쉰과 같은 문학가가 우리에게는 없었다는 것이지요... 결국 종언을 논할 '특수한 근대 문학'은 원래 한국에는 없었다. 따라서 종언을 논할 필요 없이 여기 한국에선 '시작'을 논해야 한다는게 제 요즘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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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님의 "비둘기와 매의 시간"

한윤형씨의 양비론은 참으로 무책임하게 보이는 군요. 비둘기의 노력과정에서 일어나는 도발/국지전과 매파의 결과 일어날 수 있는 전면전을 동일시하는 그 사고구조가 참 기이하게 느껴집니다.... 저는 이택광 교수의 컬럼에 동의하는 편입니다. 인질범이 인질극을 벌이는 경우 그 인질범이 나쁜 놈이라는 건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겠지요. 중요한 것은 인질범에게서 인질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수우파의 경우 아무 대책없이 인질범이 나쁜놈이고 잡아죽여야 한다는 말만 되풀이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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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에서 쏘아댄 포격으로 연평도가 불타고 있었다. 또 터졌구나 또 당했구나…. 십여 명의 병사가 중경상을 입고 꽃 같은 나이의 두 해병이 전사하고 육십 줄의 두 민간인이 사망했다는 텔레비전 뉴스에 비감을 삼켰다.

당장 불안했다. 섬 주민들의 피란 행렬이 줄을 잇는 화면을 응시하며 이럴 수는 없다고 분노했다. 남쪽의 선제공격을 운운하지만 수많은 도민이 고기를 잡고 땅을 갈며 사는 줄 뻔히 알면서 백오십 발의 대포를 쏘다니.

처참하게 부서진 집과 마을을 놔둔 채 황급히 섬을 비우고 떠나온 사람들의 겁먹은 표정에 지난날의 전란마저 겹쳤다. 등 굽은 할머니의 지팡이에서, 엄마 손을 꼭 잡은 아이의 눈에서 6·25를 떠올린 것이다. 그들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다 아는 대로 연평도는 휴전선에 가까운 서해 어장의 중심이다. 전남 영광군의 칠산 앞바다와 함께 조기철 파시로 유명한 곳인데 직접 가보지는 못했다. 말로만 들었거늘 어쩌다 남북대치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기막힌 참변을 당했다.

앞으로도 북의 무모한 도전이 더 계속될지 모른다는 예측에 마음이 조마조마한데, 북은 우리의 그만큼 경황없는 심리적 혼돈을 기왕의 경험으로 미리 안다는 듯 큰소리를 땅땅 친다. 이판사판 억척을 떤다. 사소한 예로 치부하면 그만이되 이를테면 평양방송 진행자의 시퍼렇게 날이 선 어투가 더없이 강퍅하다. 들어 버릇해서 그러려니 여기지만 한복으로 곱게 차린 여성 앵커의 연설조 의음(擬音)에 소름 돋는 날도 있다. 
 

그런 식으로 체제를 굳힌 지 육십 년도 넘는 사회를 나라 안팎의 북한 전문가들이 별별 궁리를 다하여 수소문하고자 기를 쓴다. 하지만 치고 빠지기 잘하는 측에서 불쑥불쑥 내미는 황당한 ‘과제’를 검색하기 바쁜 모양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

한낱 서생이 무얼 알까마는 소박한 눈치로 바라보면 그렇다. 대통령의 초기 지침에 대한 말바꾸기 논란은 한층 민망스럽다. 낮과 밤이 달랐다. 이명박 대통령의 이런저런 발언에는 아닌게아니라 요령부득인 것이 많다. ‘G20’을 전후하여 난데없이 등장한 ‘국격’ 또한 모호했다.

내 독단임을 전제하고 말하건대 그와 같은 발제는 혹시 몇 년 전 일본 열도를 뜨겁게 달군 후지와라 마사히코의 <국가의 품격>을 염두에 둔 게 아닐까. 아니라면 미안한 노릇인데 그 책은 지극히 단순하고 편협하다. 다른 계제에 이미 썼지만 국수주의도 그런 국수주의가 없다. 이 세상에 일본이 제일이라는 나르시시즘에 스스로 들려 싱겁다.

그야 어떻든 우리 사회는 이번 사태를 놓고 외치는 일전불사 수준의 용감한 소리가 마구 쏟아져 판을 더욱 어지럽게 만든다. 미리미리 대비하지 못한 책임이 큰 축일수록 남의 의견에 너무 날카롭게 신경을 쓴다. 막상 전쟁이 터지면 제일 먼저 동곳을 빼기 쉽다는 비아냥이 예전부터 떠돌았던 걸 상기한다.

따라서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의 격앙된 정세를 틈타 행세할지 모를 억지 국론통일 분위기 말이다. 실컷 체험한 잘못된 구습이다. 쑥대밭이 된 연평도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슬픈 분통에 편승하여 여론을 이상한 곳으로 끌고 갈까 무섭다.

다행히 경제는 순조롭고 남북 분란에 어느덧 면역이 된 사람들은 생업에 열중하여 차분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그런데 국민을 달래고 안심시켜도 시원찮은 고위 인사들의 늦게 잡고 되게 치는 모양이 안 좋다.

생사람을 해치고도 도도하기 짝없는 저들의 늘 오만한 콧대를 꺾고 싶은 심정은 다 비슷하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냉철하고 지혜롭게 대처해야 한다는 말이 맥 빠지게 들릴지언정 그게 곧 민주국가의 힘 아닐까. 응징할 때 응징하더라도 지금은 긴 눈으로 나라의 앞날을 겨냥해야 한다고 믿는다. 확전을 피하고 냉정하게 대처하는 게 수다. ‘화약고 발칸반도’ 아닌 ‘화약고 한반도’ 소리를 면하기 위해서도.

(한겨레 신문) 최일남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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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의 기술 

                               정병근 

유리창에 몸 베인 햇빛이
피 한 방울 없이 소파에 앉아 있다
고통은 바람인가 소리인가
숨을 끊고도, 저리 오래 버티다니
창문을 열어 바람을 들이자
햇빛은 비로소 신음을 뱉으며 출렁인다
고통은 칼날이 지나간 다음에 찾아오는 법
회는 칼날의 맛이 아니던가
깨끗하게 베인 과일의 단면은 칼날의 기술이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풍경의 살을 떠내는
저 유리의 기술,
머리를 처박으며 붕붕거리는 파리에게
유리는 불가해한 장막일 터,
훤히 보이는 저곳에 갈 수 없다니!
이쪽과 저쪽, 소리와 적막 그 사이에
통증 없는 유리의 칼날이 지나간다
문을 열지 않고도 안으로 들이는 단칼의 기술,
바람과 소리가 없다면 고통도 없을 것이다
 

정병근 <번개를 치다> 중 - 문학과 지성사
 

# 햇빛 좋은 날 창밖을 보다가
   문득 이 시가 떠올랐다. 
   단순한 인식을 파괴해 버리는
   시인의 상상력이 놀랍다.

# 유리는 칼날이요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과 풍경은
  그 칼날에 베어진
  회와 과일이다.
  과연 칼날에 의해 잘 정리된
  회와 과일은 맛이 있다.

# 그러나 실재는 유리 칼날 뒤에 있다.
  인식하지 못할지라도 그것은 늘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언젠가 자기 목소리를 내고야 만다.
  베어진 후에 고통이 천천히 찾아오듯이..... 
  진실은 관계된 전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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