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편 죽음에 이르는 병은 절망이다
제 1 장 절망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하는 것
A. 절망은 정신에 있어서의 병, 자기(自己)에 있어서의 병이며, 거기에는 세개의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절망하고 있으면서 자기를 가지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비본래적인 절망).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기를 욕망하지 않는 경우.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기를 욕망하는 경우.
인간은 정신이다. 정신이란 무엇인가? 정신이란 자기이다. 자기란 무엇인가? 자기란 자기 자신에 대한 하나의 관계이다. 바꿔말하면 관계가 자기 자신에게 관계한다고 하는 관계의 내부에 있는 자기를 뜻한다. 따라서 자기란, 관계를 뜻하지 않고, 관계가 그 자신에게 관계되는 것을 뜻한다. 인간은 무한성과 유한성의, 시간적인 것과 영원적인 것의, 자유와 필연의 종합이다. 요컨대 인간은 한 종합이다. 종합이란 양자 사이의 관계이다. 이 방법으로 고찰한다면, 인간은 아직 자기는 아니다.
박환덕 역 (범우사 간)
#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은 내가 처음으로 구매했던 철학책이다. 적지 않은 심적인 방황을 하던 고등학교 2학년 시절, 나는 방황에서 벗어나보기 위해 학과 공부 외에 다른 독서에 빠져 있었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등의 소설은 그 당시 나의 방황을 달래 주던 좋은 친구들이었다. 이러한 심각한 소설들을 탐독하던 나는 심적인 방황의 원인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고 치유책을 발견하기 위해 소설보다는 철학책에 눈을 돌려야 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마침 학교 명상 시간에 낭송된 키에르케고르의 명언 몇 마디에 내 마음이 동하는 바가 있었다. 나는 키에르케고르의 책을 보기 위해 동네 서점에 들렀다. 마침 키에르케고르가 쓴 한 권의 책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이 바로 <죽음에 이르는 병>인 것이다.
# 그런데 죽음에 이르는 병은 나에게 최초로 좌절감을 안겨준 책이기도 하다.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제목을 보면 그 병이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들게 되어 있다. 그런데 몇 페이지 넘기지 않아 이 의문은 '죽음에 이르는 병은 절망이다'라는 제 1편의 제목에서 쉽게 해소된다.
죽음에 이르는 병이 절망이라... 뒤에 실린 역자의 해설을 읽었다. 그의 생애가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고 여느 전기가 그렇듯 흥미를 끈다. 이런 사람도 있구나...그래 난 절망에 빠져 있으니 이 책에서 치유책을 발견할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책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와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서론이나 서문은 평이하다. 제 1 편 제 1장. A. 절망에는 세계의 경우가 있다... 나는 어떤 경우인가?
그러나 첫문장. '인간은 정신이다.'에서부터 좀 이상하다. 인간은 정신이기만 한가? 그럼 몸은 무엇이란 말인가? 정신이란 자기이다?... 그 뒤로 계속이어지는 문장들. 몇번을 읽어도 그 당시 내게는 '해독할 수 없는 암호문'으로 느껴졌다. 예를 들어 논리적인 모순율을 어긴 것도 발견된다. 인간 = 정신. 정신 = 자기로 규정해놓고 인간은 아직 자기는 아니다?
수십번을 읽어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첫문단을 넘기지 못하고 나는 책을 덮고야 말았다. 그뒤로 몇번을 더 시도해 보았으나 나는 도저히 첫 문단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절망을 치유하려 했다가 새로운 좌절에 빠져들었다고나 할까?
# 대학에 입학한 후에는 이러한 좌절을 안긴 키에르케고르는 나에겐 더이상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박환덕 역, 범우사 간, <죽음에 이르는 병>은 아픈 기억을 남긴채 채 책장 한귀퉁이에 오랜 기간 방치되어 버렸던 것이다. 나는 키에르케고르와 같은 주관적인 사상가에 심취하기엔 너무나 객관적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키에르케고르와 같이 실존주의 계열의 사상가인 사르트르의 경우는 독해 불가는 아니었고, 나는 사르트르의 무신론적 실존주의에는 많은 부분 공감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변증법적 유물론이나 역사 유물론 등 그 당시 대학가에서 유행했던 철학들에 빠져들어 갔던 것이다.
너무 진지하기만 하고... 삶에 여유가 없어 보이고 기독교에 편협하게 집착하는 듯 보이는 키에르케고르는 이렇듯 좌절의 상처와 해결되지 않은 숙제를 남긴 채 내 관심에서 멀어져만 갔다.
# 그러던 어느날 별안간 이 책의 첫문장이 이해될 수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무의식 중에도 계속 숙제로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그 책을 꺼내 첫문단을 천천히 다시 읽어보았다.어렴풋이나마 이해가 될듯 싶기도 했다. 내가 이 문단을 이해하지 못했던 건, ‘자기’와 ‘자기 자신’의 차이점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키에르케고르에 있어서 '자기 자신'이란 자기를 자기이게 하는 고유의 그 무엇인 것으로 보인다. '자기란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라는 말은 '자기'라는 것은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상태'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 같다. 즉 키에르케고르에 따르면 '자기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는 정신 활동은 '자기'가 아닌 것이다. 그렇기에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은 아직 자기는 아니다'라는 말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각자에게 고유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 A에서 말하는 절망의 3형태도 이해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적 코기토에 대한 키에르케고르적인 비판과 확대가 바로 <죽음에 이르는 병의 첫문단>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생각한다’는 정신활동 그 자체가 바로 존재성을 보장하고, 이것이 바로 정신이 실체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 데카르트의 코기토이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에 있어서 단순히 생각하는 행위 그 자체로 존재성은 확보할 수 있을 지 몰라도 그 ‘생각함’이 神이 부여한 자기 고유의 그 무엇을 인식하고 발현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존재할 뿐, 무의미요 절망이라는 것이다.
# 결국 핵심은 '자기 자신'이라는 말에 있다. 키에르케고르를 따른다면 神이 부여한 '자기 자신'이 개개인에게 있으며 이를 인식하고 실현하고 있는 상태가 바로 '자기'이며 이것이 바로 절망에서 치유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의문은 神이 부여했는 지의 여부를 떠나 자기에게 고유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할까하는 점이다.
'자신을 발견한다'는 말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말이다. 방황할 때, 우리는 흔히 '자신을 발견하고 싶다'고 말한다. 키에르케고르의 철학이 아니고서라도, 우리는 각자에게 고유한 ‘자기 자신’이 있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무언가 고유한 나 자신이 있는 것은 느껴진다. 키에르케고르적인 것은 아닐지라도 그러한 것이 느껴지고 작용함을 느낀다면 그것은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자기 자신은 무엇이고 어떻게 하면 그것을 발견하고 발현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