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 번역자로 알려져 있던 신상희 교수가 7월 4일 급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한다. 사인은 심장마비. 하이데거 연구와 번역에 헌신적으로 노력했으나 한국 사회는 그에게 끝내 정규직 교수 자리를 제공하지 않았다. 한달 반이나 지난 후 로쟈님 서재에서 그의 부고 기사를 접했고, 안타까운 마음에 그가 번역한 하이데거의 책들을 꺼내서 읽어본다. 무심히 넘겨 버렸던 옮긴이의 글 한토막이 의미있게 다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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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경제 논리만을 대중들이 적극적으로 추종하는 세계정세 속에서 철학이 종말에 이르고 인문학이 쇠퇴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귀결처럼 보인다. 그러나 철학과 인문학이 역사의 뒤안길로 내몰리는 현상은 단지 신자유주의적 경제논리와 결탁한 첨단 과학 기술 문명의 지배적 쇄도라는 외적 요인에 의해서 초래된 것일까? 철학의 종말과 인문학의 쇠퇴는 오히려 철학과 인문학을 포함하는 학문 자체 안에 그 원인이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 이미 하이데거는 반세기 전에 이러한 점을 경고한 바 있다. 왜 철학은 종말에 이르고 인문학은 쇠퇴 일로를 거닐 수 밖에 없으리라고 하이데거는 예견하였는가? 그 대답은 간단하다. 사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유해야 할 것으로서의 존재의 진리를 사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략)
그렇다면 이러한 문명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할 가장 시급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유해야 할 것을 제대로 사유하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사유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인간이 사유해야 할 사유의 진정한 사태는 존재의 진리이다. 그런데 존재의 진리는 단순하고 소박하여 눈에 잘 띄지 않는 미미한 것이다. 장미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꽃을 피운다. 하늘의 밝은 빛과 대지의 따스한 품에 안겨 화답하는 방식으로 장미는 존재한다. 한송이 장미꽃이 피어남에는 하늘과 대지의 기운이 하나로 어우러져 세계를 열어 보이는 존재의 사건이 찬연히 생기하고 있다. 인간이 이러한 경이로운 사건은 맑은 눈으로 바라보고 향유할 수 있을 때, 비로서 인간은 존재의 이웃이 된다. 인간이 존재의 이웃이 될 때, 비로서 인간은 인간 자신의 본질로 귀환할 수 있다. 그 때 인간은 이성적 도덕적 기술적 주체라는 허망한 옷을 벗고, 우주 만물과 회동하면서 조화롭게 펼쳐지는 존재의 진리 안에 머물 수 있다.
마르틴 하이데거 <강연과 논문> (이기상, 신상희, 박찬국 번역) 중 옮기고 나서, 신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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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하이데거 연구에 일관되게 헌신한 학자였다. 그가 옮기거나 저술한 책들이다.
신상희 교수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에 우리말로도 하이데거의 많은 저술들을 읽어볼 수 있게 되었다. 나도 이 공들인 번역본들 중 <강연과 논문>, <숲길>, <이정표>, <동일성과 차이>를 소장하고 있다. 나같이 독일어를 한마디도 모르는 사람도 하이데거의 글들의 맛을 볼 수 있게 되었으니 그 감사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그의 노력은 한국어 사용자들의 철학적 깊이를 한층더 깊게 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귀중한 자산으로 남을 것이다. 하이데거가 말하고 신상희 교수가 그토록 간절히 사유하길 원했던 '존재의 진리'를 나도 느껴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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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한겨레 21에 실렸던 인터뷰 기사의 한 도막을 옮겨 놓는다.
신상희씨는 요즘 하이데거 후기 사유의 정수를 담고 있는 만년 저작 <이정표>와 <숲길>의 번역에 매달리고 있다. “이 중요한 저작들이 왜 아직까지 한글로 번역되지 않았는지는 번역에 손을 댄 뒤에야 알았어요. 이렇게 고생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죠.” 강의가 없던 지난 3개월의 겨울방학 동안 밥 먹는 시간 빼고 하루종일 꼬박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건만 하루 3쪽 번역이 한계 작업량이다. “3쪽 옮기면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건강을 생각하면 2쪽조차 벅찰 때가 있어요. 어떤 땐 하루종일 1쪽 가지고 씨름하는 날도 있죠. 그러다보면 나처럼 세상을 비효율적으로 사는 사람도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죠.”
세상의 갈채를 받는 것도, 장도가 유망한 것도 아니지만, 그가 악몽처럼 난해한 사유의 미로를 더듬어가는 삶을 선택한 까닭은 소박하다.
“하이데거를 앞서 번역해 소개했던 은사님들 덕분에 철학적 문제의식을 가질 수 있었고, 하이데거에 접근하는 일도 가능했습니다. 이제 내가 조금이라도 역량을 쌓았다면 다음 사람을 위해 그것을 풀어내고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힘들더라도 최선을 다해 충실한 번역서를 내놓아야겠다고 다짐하곤 하죠. 어찌보면 내 인생이 굳어 있고 고인 물 같기도 하지만, 언젠가는 다른 사람의 양식으로 흘러나갈 기회가 올 것이라고 믿습니다.”
생활은 남루하지만 사색의 숲을 거니는 정신만은 언제나 풍요로운 인문주의자의 초상을 발견하는 일은 깊은 숲 속에서 찾아낸 샘물 맛처럼 신선하다. (이상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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