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님의 "군중과 권력"

전 반성완 교수가 번역한 한길사 본을 갖고 있습니다. 1982년 초판 발행, 제가 소장하고 있는 건 1987년 10판본이네요. 그 때만해도 이런 책이 10판을 찍어냈었군요. 카네티는 제 의식속에 현장 기억으로 남은 첫 노벨상 수상작가입니다. 노벨상 수상이 알려지자 그의 대표 소설 <현혹>이 <머리없는 세상>이란 제목으로 황급히 번역되었고, 이 책을 아직 소장하고 있습니다. <머리없는 세상>을 읽다가 어린 마음에 참 이런 재미없는 소설에 노벨상이 수여되었을까했던 기억이 납니다. 중학생에 불과했으니까요 ㅎㅎ <군중과 권력>은 <머리없는 세상>의 해설을 읽다가 알게 됐고 그 제목에 끌려 대학생 시절에 구입했었습니다. 읽었던 기억은 나는데 완독을 하진 못했던 것 같아요. 다시 한번 책을 꺼내서 읽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정말 오래간만에요.^^ 그런데 학원사판은 어떤 책인지 궁금하네요. 전 반성완의 한길사 본과 바다출판사 본밖에 몰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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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8월 28일 | 푸른바다님을 위한 추천 상품

생명의 윤리를 말하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반대자의 초상 맑스주의 역사 강의 모던/포스트 모던

 추천 마법사에서 추천해준 책들이다. 헌데 당장 구매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책은 없는 것 같다. 물론 모두 좋은 책들이긴 하지만 시급성이 없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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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님의 "9월의 읽을 만한 책"

이윤기 선생의 사망 소식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아직 젊은 나이고 더 좋은 업적을 내실 수 있는 분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가 딸과 시작했던 셰익스피어 전집 번역 작업도 이렇게 허무하게 종지부를 찍게 되는 군요. 따님 혼자서라도 그 일을 마무리 할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그의 책들을 많이 읽어본 건 아니고, 몇몇 번역본에 논란이 있다는 것도 알고는 있지만, 아무튼 그는 열심히 노력하신 분이고 서양문화의 이해에 대한 공헌도 적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데이비드 봄의 책은 <현대물리학의 철학적 테두리>라는 제목으로 민음사 대우학술총서로 번역되었던 책입니다. 오래된 새책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the implicate order'는 보통 '내함된 질서' 혹은 '내포 질서(민음사 판)'로 번역되었는데 '접힌 질서'는 새로운 번역용어로군요. 전 개인적으론 '내함된 질서'라는 말을 좋아합니다만... '접힌 질서'는 잘 와닿지 않습니다.^^ 아무튼 새번역본은 구 번역본보다 나은 점이 있겠지요. 독일어에 문외한인 저로선 '고통'이 '슬픔'보다 독일어 단어의 의미에 더 가까우리란 걸 부정할 도린 없지만, '슬픔'이 이미 한국어에 깊숙히 들어와 있는데 굳이 '고통'으로 바꾸어야할 이유를 이해하긴 힘들군요. '슬픔'은 '고통'이라는 한국어 단어가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느끼게 합니다. 독일어의 원의가 무엇이었던 간에 베르테르가 느낀 것은 단순한 '고통'이 아닌 '슬픔'이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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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가 1960 

                           보르헤스

내 운명이라는 이 꿈을 주관하는 

명확한 우연이나 은밀한 법칙이 바라네. 

물방울인 내가 강물인 너와 대화를 나누기를, 

순간인 내가 연속적 시간인 너와 대화를 나누기를, 

그리고 으레 그러하듯 진솔한 대화가 

신들이 사랑하는 의식과 어둠, 

또한 시의 고상함에 호소하기를. 

영광과 굴욕이 교차하는 

다사다난했던 일백오십년을 품에 보듬는 

아, 필연적이고 달콤한 조국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열기, 민음사, 우석균 옮김)  

어제 아르헨티나와 독일의 월드컵 축구 경기를 봤는데, 특별히 한 팀을 응원해야 할 이유는 없었지만 심정적으로는 아르헨티나가 이기기를 바랬다. 독일에 비해 아르헨티나에 더 친밀감을 느끼거나 해서는 아니었고 남미의 다른 강호 브라질이 떨어졌기 때문에 아르헨티나라도 올라가 남미와 유럽이 균형을 맞추는 것이 좀더 공평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결과는 많은 사람들의 예상이나 내 심정적인 응원과는 달리 아르헨티나의 참패로 끝났다. 개인적으로 아르헨티나를 응원하긴 했지만 경기 시작 전부터 왠지 독일이 이길 것 같다는 예감을 갖기는 했었다. 잉글랜드를 대파한 독일의 기세가 대단해 보였기 때문이다. 

독일에 대패한 아르헨티나 선수들이 좀 측은해  보이는 김에, 보르헤스의 시집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열기>를 꺼내 읽어 보았다. 개인적으로 네루다의 시보다는 보르헤스의 시들를 더 좋아한다. 네루다는 초현실주의적 경향도 보이긴 했지만 기본적으로그는 서정시인이고 낭만주의적 경향이 강하다. 반면 보르헤스는 엘리엇과 같이 매우 주지주의적인 경향을 보인다. 언어의 장벽 때문에 아무래도 번역된 서정시 보다는 번역된 주지주의 시가 더 이해하기 쉬워서 인지도 모르겠다.  

송가 1960 이라는 제목의 위의 시는 아마도 아르헨티나 건국 150주년을 기념한 시인 것 같다. 시집에 별다른 배경 설명은 없지만 금년(2010)이 아르헨티나 건국 200주년이기에 당연히 1960년은 150 주년이었을 테고, "다사다난했던 일백오십년"은 아르헨티나의 건국후 150년 역사를 말하는 것이리라. 결국 아르헨티나는 1810년에 건국된 셈인데, 이 시기는 나폴레옹에 의해 스페인이 정복되고 남미 지역에 대한 스페인의 지배력이 현저히 약화된 이후의 일이다. 인접국인 칠레도 금년이 독립 200주년인 것을 보면 그 시기에 남미의 많은 국가들이 일제히 독립을 쟁취한 것 같다. 

보르헤스가 말했듯이 길지 않은 역사 동안 많은 아르헨티나에는 영광과 굴욕이 있었을 것이다. 페론주의-군사 쿠데타의 반복으로 상징되는 굴곡많은 정치사를 배경으로 아르헨티나는 호소력을 가진 문화들을 창출해 냈다. 보르헤스의 문학이 그렇고, 탱고 음악이 그렇고 종속이론에서 최근의 라클라우까지 이어지는 사회과학도 그렇다. 아르헨티나는 단순히 축구만을 잘하는 나라는 아닌 것이다.  

 

" 물방울인 내가 강물인 너와 대화를 나누기를, 

      순간인 내가 연속적 시간인 너와 대화를 나누기를, " 

개인과 역사에 대한 참으로 멋진 메타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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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이노의 비가

                                                릴케

내가 설령 울부짖는다 해도 여러 서열의 천사들 중 누가
이 소리를 들어줄 것인가? 만일 천사가 하나
갑자기 나를 가슴에 끌어 안는다면 그 강한 존재에 눌려
나는 사라지리라.  왜냐하면 아름다움이란
우리가  겨우 견딜 수 있는 무서운 일의 시초에 불과하기에.
우리가 그토록 찬탄하는 것은 우리를 멸망시킴을
잠잠히 거부하기 때문이다. 천사는 모두 무서운 존재.
그러므로 스스로를 억누르며 어두운 오열이 유혹하는
부름을 나는 그저 삼켜버린다. 아, 우리는 그 누구를
부릴 수 있는가? 천사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다.

릴케 두이노의 제 1 비가 중 (릴케 문학선, 두이노의 비가 외, 구기성 번역,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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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구절에서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강력하게 사로잡는 시는 흔치 않은 것 같다.
독일인이 독일어 원문을 읽고 느낄 파워가 한국어 번역으로 제대로 전달되었을까 하는 의심이 들지만
이 번역으로도 두이노의 비가  서두는 충분히 마음의 깊은 곳에서 강하게 치고 올라오는 느낌을 유발한다.

사실 난 오랬동안 릴케를 참으로 부당하게 평가해왔었다.
어릴 때 인물사전에서 본 '장미꽃에 찔려 죽은 연약한 시인'이라는
말이 각인되었던 탓이다.

그러나 처음으로 접한 두이노의 비가는 이러한 선입관을 깨기에 충분히 충격적이었다.
번역의 한계를 고려해도 말이다. 나는 여기서 강한 역설적 진실을 느낀다.
천사는 완벽한 존재이고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고 믿는 대상이다.
그러나 릴케는 말한다. 그 어느 천사도 내 울부짖음을 들어주지도 않을 뿐더라
설령 나를 끌어 안는다고 해도 그 '강한 존재'에 눌려 나는 사라지고 말것이라고.

이 구절에서 화이트헤드의 유명한 말이 떠오른다.

'불완전함은 완전함보다 상위이다.'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어떤 과정이 완전성에 도달했을 때
그것은 바로 소멸해 버리고 만다. 완전한 존재는 현실적이지 않은 것이다.
불완전하기에 운동이 있고 운동이야 말로 우리의 생생한 현실태인 것이다.

릴케는 말한다  '천사는 무서운 존재'
천사의 완벽성은 결국 소멸이요 죽음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현존재는 무엇인가?
"인간도 천사도 아니다." 

천사가 아님은 앞의 해석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인간도 아니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완전한 존재로서의 천사가 그 완전성 때문에 존재할 수 없다면 불완전한 존재로서의 인간은 그 불완전성 때문에 부릴 수 없는 존재일 것이다. 천사와 인간 모두 부릴 수 없는 대상이지만 그 맥락은 다른 것이다. 결국 천사의 부정은 불완전한 현실에 대한 긍정으로 해소할 수밖에 없지만 불완전은 역시 불완전인 것이다. 

현존재는 완벽하게 아름다울 수 없지만 그렇다고 맹목적으로 흘러가는 무생명적인 물질 세계인 것만도 아니다.  현존재는 맹목적인 흐름속에서 새로움을 지향하는 그러한 존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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