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의 기술 

                               정병근 

유리창에 몸 베인 햇빛이
피 한 방울 없이 소파에 앉아 있다
고통은 바람인가 소리인가
숨을 끊고도, 저리 오래 버티다니
창문을 열어 바람을 들이자
햇빛은 비로소 신음을 뱉으며 출렁인다
고통은 칼날이 지나간 다음에 찾아오는 법
회는 칼날의 맛이 아니던가
깨끗하게 베인 과일의 단면은 칼날의 기술이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풍경의 살을 떠내는
저 유리의 기술,
머리를 처박으며 붕붕거리는 파리에게
유리는 불가해한 장막일 터,
훤히 보이는 저곳에 갈 수 없다니!
이쪽과 저쪽, 소리와 적막 그 사이에
통증 없는 유리의 칼날이 지나간다
문을 열지 않고도 안으로 들이는 단칼의 기술,
바람과 소리가 없다면 고통도 없을 것이다
 

정병근 <번개를 치다> 중 - 문학과 지성사
 

# 햇빛 좋은 날 창밖을 보다가
   문득 이 시가 떠올랐다. 
   단순한 인식을 파괴해 버리는
   시인의 상상력이 놀랍다.

# 유리는 칼날이요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과 풍경은
  그 칼날에 베어진
  회와 과일이다.
  과연 칼날에 의해 잘 정리된
  회와 과일은 맛이 있다.

# 그러나 실재는 유리 칼날 뒤에 있다.
  인식하지 못할지라도 그것은 늘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언젠가 자기 목소리를 내고야 만다.
  베어진 후에 고통이 천천히 찾아오듯이..... 
  진실은 관계된 전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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