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편 죽음에 이르는 병은 절망이다

제 1 장 절망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하는 것

A. 절망은 정신에 있어서의 병, 자기(自己)에 있어서의 병이며, 거기에는 세개의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절망하고 있으면서 자기를 가지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비본래적인 절망).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기를 욕망하지 않는 경우.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기를 욕망하는 경우.

인간은 정신이다. 정신이란 무엇인가? 정신이란 자기이다. 자기란 무엇인가? 자기란 자기 자신에 대한 하나의 관계이다. 바꿔말하면 관계가 자기 자신에게 관계한다고 하는 관계의 내부에 있는 자기를 뜻한다. 따라서 자기란, 관계를 뜻하지 않고, 관계가 그 자신에게 관계되는 것을 뜻한다. 인간은 무한성과 유한성의, 시간적인 것과 영원적인 것의, 자유와 필연의 종합이다. 요컨대 인간은 한 종합이다. 종합이란 양자 사이의 관계이다. 이 방법으로 고찰한다면, 인간은 아직 자기는 아니다.

박환덕 역 (범우사 간)

#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은 내가 처음으로 구매했던 철학책이다. 적지 않은 심적인 방황을 하던 고등학교 2학년 시절, 나는 방황에서 벗어나보기 위해 학과 공부 외에 다른 독서에 빠져 있었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등의 소설은 그 당시 나의 방황을 달래 주던 좋은 친구들이었다. 이러한 심각한 소설들을 탐독하던 나는 심적인 방황의 원인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고 치유책을 발견하기 위해 소설보다는 철학책에 눈을 돌려야 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마침 학교 명상 시간에 낭송된 키에르케고르의 명언 몇 마디에 내 마음이 동하는 바가 있었다. 나는 키에르케고르의 책을 보기 위해 동네 서점에 들렀다. 마침 키에르케고르가 쓴 한 권의 책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이 바로 <죽음에 이르는 병>인 것이다.

# 그런데 죽음에 이르는 병은 나에게 최초로 좌절감을 안겨준 책이기도 하다.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제목을 보면 그 병이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들게 되어 있다. 그런데 몇 페이지 넘기지 않아 이 의문은 '죽음에 이르는 병은 절망이다'라는 제 1편의 제목에서 쉽게 해소된다.

죽음에 이르는 병이 절망이라... 뒤에 실린 역자의 해설을 읽었다. 그의 생애가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고 여느 전기가 그렇듯 흥미를 끈다. 이런 사람도 있구나...그래 난 절망에 빠져 있으니 이 책에서 치유책을 발견할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책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와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서론이나 서문은 평이하다. 제 1 편 제 1장. A. 절망에는 세계의 경우가 있다...  나는 어떤 경우인가?

그러나 첫문장. '인간은 정신이다.'에서부터 좀 이상하다. 인간은 정신이기만 한가? 그럼 몸은 무엇이란 말인가? 정신이란 자기이다?... 그 뒤로 계속이어지는 문장들. 몇번을 읽어도 그 당시 내게는 '해독할 수 없는 암호문'으로 느껴졌다. 예를 들어 논리적인 모순율을 어긴 것도 발견된다. 인간 = 정신. 정신 = 자기로 규정해놓고 인간은 아직 자기는 아니다?

수십번을 읽어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첫문단을 넘기지 못하고 나는 책을 덮고야 말았다. 그뒤로 몇번을 더 시도해 보았으나 나는 도저히 첫 문단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절망을 치유하려 했다가 새로운 좌절에 빠져들었다고나 할까?

# 대학에 입학한 후에는 이러한 좌절을 안긴 키에르케고르는 나에겐 더이상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박환덕 역, 범우사 간, <죽음에 이르는 병>은 아픈 기억을 남긴채 채 책장 한귀퉁이에 오랜 기간 방치되어 버렸던 것이다. 나는 키에르케고르와 같은 주관적인 사상가에 심취하기엔 너무나 객관적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키에르케고르와 같이 실존주의 계열의 사상가인 사르트르의 경우는 독해 불가는 아니었고, 나는 사르트르의 무신론적 실존주의에는 많은 부분 공감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변증법적 유물론이나 역사 유물론 등 그 당시 대학가에서 유행했던 철학들에 빠져들어 갔던 것이다.

너무 진지하기만 하고... 삶에 여유가 없어 보이고 기독교에 편협하게 집착하는 듯 보이는 키에르케고르는 이렇듯 좌절의 상처와 해결되지 않은 숙제를 남긴 채 내 관심에서 멀어져만 갔다.

# 그러던 어느날 별안간 이 책의 첫문장이 이해될 수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무의식 중에도 계속 숙제로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그 책을 꺼내 첫문단을 천천히 다시 읽어보았다.어렴풋이나마 이해가 될듯 싶기도 했다. 내가 이 문단을 이해하지 못했던 건, ‘자기’와 ‘자기 자신’의 차이점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키에르케고르에 있어서 '자기 자신'이란 자기를 자기이게 하는 고유의 그 무엇인 것으로 보인다. '자기란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라는 말은 '자기'라는 것은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상태'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 같다. 즉 키에르케고르에 따르면 '자기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는 정신 활동은 '자기'가 아닌 것이다. 그렇기에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은 아직 자기는 아니다'라는 말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각자에게 고유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 A에서 말하는 절망의 3형태도 이해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적 코기토에 대한 키에르케고르적인 비판과 확대가 바로 <죽음에 이르는 병의 첫문단>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생각한다’는 정신활동 그 자체가 바로 존재성을 보장하고, 이것이 바로 정신이 실체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 데카르트의 코기토이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에 있어서 단순히 생각하는 행위 그 자체로 존재성은 확보할 수 있을 지 몰라도 그 ‘생각함’이 神이 부여한 자기 고유의 그 무엇을 인식하고 발현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존재할 뿐, 무의미요 절망이라는 것이다.

# 결국 핵심은 '자기 자신'이라는 말에 있다. 키에르케고르를 따른다면 神이 부여한 '자기 자신'이 개개인에게 있으며 이를 인식하고 실현하고 있는 상태가 바로 '자기'이며 이것이 바로 절망에서 치유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의문은 神이 부여했는 지의 여부를 떠나 자기에게 고유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할까하는 점이다.

'자신을 발견한다'는 말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말이다. 방황할 때, 우리는 흔히 '자신을 발견하고 싶다'고 말한다. 키에르케고르의 철학이 아니고서라도, 우리는 각자에게 고유한 ‘자기 자신’이 있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무언가 고유한 나 자신이 있는 것은 느껴진다. 키에르케고르적인 것은 아닐지라도 그러한 것이 느껴지고 작용함을 느낀다면 그것은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자기 자신은 무엇이고 어떻게 하면 그것을 발견하고 발현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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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0-08-18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젊은날 고뇌와 번민으로 방황하다가 이 책을 읽고 마음을 다잡을 수 있던 책입니다. 제 인생의 책이라고 할 수 있지요..키에르케고의 저서들은 그의 삶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의 중심에는 언제나 신이 있었죠. 기독교에서 말하는 바로 God요. 이 책에서 말하는 고유한 자기 자신이란, 바로 신 앞에 선 단독자로서의 자신입니다. 사변적인 실존이 아니라 유신론적 실존..그 자체요.

푸른바다 2010-08-19 21:12   좋아요 0 | URL
키에르케고르에게서 위안을 얻은 분들이 많으시더군요... <그리스도교의 훈련>과 함께 읽어야 한다는데 아직 이책은 읽지 못했습니다.

제가 키에르케고르와 타협할 수 없었던 부분은 바로 기독교적인 신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기독교적인 신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해본적이 없거든요...

yamoo 2010-08-20 14:22   좋아요 0 | URL
교회를 다니지 않으면 타협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기독교적인 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가 없죠. 하지만 키에르케고는 오직 유일신인 God를 체험했습니다. 그의 모든 저서들은 체험에 의한 산물이라고 볼 수 있어요.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라서 개인의 체험을 보편화시키기에는 한계가 있죠. 하지만 키에르케고는 상당히 성공했다고 보여져요. 저두 키에르케고 전문가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지만 같은 체험을 공유하는 사람으로서 쉽게 유비가 됐습니다~ <그리스도교의 훈련>은 <그리스도교 강요>를 말하는 것인가요? 다른 책이면 저도 구해서 봐야 겠어요~

푸른바다 2010-08-20 17:08   좋아요 0 | URL
아마 다른 책일 겁니다. 제가 알던 제목은 <기독교도의 훈련>이었는데 번역본이 <그리스도교의 훈련>으로 되어 있네요. <죽음에 이르는 병>이 주로 진단에 해당한다면 <그리스도교의 훈련>은 키에르케고르의 처방으로 볼 수 있다고 하네요. 아무튼 두 책은 상호 보완적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훈련>은 임춘갑 번역으로 나와 있는데 전 아직 소장하고 있지 않습니다. 최혁순 번역으로 키에르케고르 저작물들 선집이 출판된 걸 오래전에 헌책방에서 발견했는데 거기에도 <기독교도의 훈련>이 일부 포함되어 있더군요. 번역에 신뢰가 가지 않아 구매는 하지 않았습니다만...
 

프레시안 10.6.9 [창비주간논평] '107인 선언'의 기우뚱한 균형감각 - 김종엽

6.2 지방선거가 끝났다. 그 결과 중대한 권력변동이 발생했으며, 정치인과 정당은 이 변화에 대해 정치적 책임을 지게 된다. 하지만 이런 책임으로부터 한발 비켜선 집단들이 있다. 예컨대 정치적 발언을 한 지식인들이 그렇다.

지식인의 정치적 발언은 학문적 명망과 시민적 참여를 적극적으로 결합함으로써 동료 시민들과 동등하게 한표를 행사하는 것 이상의 지도적 행위를 수행하게 된다. 따라서 그만큼 책임의 무게가 무겁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책임의 무게에도 불구하고 지식인에게는 정치인이나 정당처럼 그 책임이 객관적으로 부과되지 않는다. 따라서 지식인의 정치적 발언은 공론장 안에서 그 책임을 검토하는 것이 필요해진다.

그런 견지에서 내가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일군의 지식인들이 주도한 하나의 선언과 그 선언의 배경을 이루는 하나의 담론이다. 전자는 '교수·연구자 107명 진보신당 지지선언'(이하 '107인 선언')이고, 후자는 반MB 정치연합을 위한 노력을 '묻지마 반MB연합'으로 격하한 담론(이하 '연합정치 견제론')이다. 대부분 나의 학문적 선배와 동학인 107인의 지식인들의 학문적 업적에 대해 나는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정치적 발언은 비판적 논의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 내 판단이다.

지식인의 정치행위가 갖춰야 할 덕목

지식인의 정치적 발언도 그것이 정치적 행위인 한 정치적 행위 일반에 적용되는 기준에 입각해 타당성이 검사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기준으로 나는 막스 베버의 주장이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소명을 가진 정치가는 열정, 책임감 그리고 균형감각(Augenmass)이라는 자질을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런 자질은 직업정치가에 한정되지 않고 진지한 정치적 행위 모두가 충족해야 할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107인 선언의 참여자들은 열정과 책임감이라는 기준을 쉽게 통과할 것이다. 자신의 존재를 걸고 적극적으로 발언하는 지식인의 모습은 깊은 열정을 배경으로 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또한 앞서 이들의 행위가 객관적 책임에 직면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행위가 야기한 사태 전체를 감당하려는 의지의 수준에서 이들이 책임감을 결여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내가 이들의 정치적 발언을 문제삼는 것은 바로 이런 주관적 의지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균형감각의 수준에서 발생하며, 이것이 진정으로 중요하다. 다시 한번 막스 베버를 인용하자면, 균형감각은 "정치가의 매우 중요한 심리적 자질이다. 균형감각이란 내적 집중과 평정 속에서 현실을 관조할 수 있는 능력, 즉 사물과 사람에 대해 거리를 둘 수 있는 능력"이다. 그리고 이 "거리감의 상실은 그것 자체로서 모든 정치가의 가장 큰 죄과 가운데 하나"이다.

107인 선언이 겨냥하는 바는 명료하다. 그것은 진보신당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호소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호소는 상황 판단의 수준에서 그리고 연합정치에 대한 판단에서 사실과 상당한 거리를 가진 것으로 판명되었다.

'107인 선언'의 기우뚱한 균형감각

107인 선언은 이렇게 말한다. "지금 이명박 정부에 대한 심판과 비판의 목소리는 더욱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비판하는 유권자들조차 누구를 찍어야 할지 헷갈리기만 합니다. 대안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불만과 분노가 쌓아져감에도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에 대한 지지율이 좀처럼 빠지지 않고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이런 진술은 선거 결과에 의해 잘못된 판단임이 입증되었다. 선언은 정부와 여당에 대한 높은 지지율을 판단 근거로 삼고 있지만 선거 결과는 그간의 여론조사에 체계적 편향이 존재했음을 명료하게 보여주었다.

사실 이명박 정부 아래서 치러진 재보선들이 6.2 지방선거 결과를 어느정도 예시하고 있었음을 생각할 때, 이런 판단은 균형감각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일례로 지난해 10.26 안산 재보선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안산 재보선은 민주당의 패권주의의 예로 인용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면이 두드러진다는 데에는 십분 동의하지만, 역으로 그런 패권주의적 행태 속에서도 대중이 민주당을 선택한 이유는 깊이 숙고되어야 할 사안이었다. 안산 재보선 결과는 반MB라는 노선이 대중의 목소리에 근거한 것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것만이라면 107인 선언의 균형감각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선언이 발표된 시점이 5월 26일이었음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천안함 사건을 통해 정부와 언론이 대대적인 북풍몰이에 나선 상황에서 6·15정상회담 이후 우리 사회 성원들의 심성이 얼마나 근저에서 변화되었는지는 가늠하기 힘들었고, 여론조사 결과 또한 하나같이 야권의 패배를 고지하고 있었다. 때문에 여론조사 일반을 불신하며 사태를 판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연합정치에 대한 평가 자체가 애초에 균형감각을 결하고 있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107인 선언은 연합정치를 '묻지마 반MB연합'이라고 폄훼하는데, 이런 연합정치 견제론은 107인 선언 훨씬 전부터 손호철 교수에 의해 제기되어 여러 진보적인 학자들에 의해서 줄곧 되풀이돼온 것이어서 6.2 지방선거 직전의 정세에 의존한 판단은 아니었다. 나는 이런 연합정치 견제론이 소극적으로는 민주당의 패권주의를 경계하고 적극적으로는 민주당의 변화와 혁신을 촉구하는 담론으로서 일정한 가치와 객관적 근거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연합정치에 대한 오해: 묻지마 반MB 연합?

하지만 굳이 '묻지마 반MB연합' 같은 표현을 사용해야 했는지에 대해 의구심이 든다. 이런 식의 표현과 그것이 함축하는 프레임은 연합정치의 시도에 대해 어떤 선험적인 불신을 유포한다. 연합정치를 위한 협상이란 당사자들이 모든 정치적 자원을 동원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상호협박과 패권주의가 작동할 수 있는 공간인 동시에 타협과 조율 그리고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에 입각한 섬세한 언어와 결정을 빚어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런데 '묻지마 반MB연합' 같은 발언은 이런 과정에 각 정당의 진정어린 투신을 촉구함으로써 성과를 이끌어내는 데 일조하기보다 그 과정을 훼손함으로써 연합정치로부터의 이탈을 유도하는 면이 있다. 더불어 스스로 연합정치 견제론이라는 최초의 의도로부터 벗어나 독단론을 굳어버릴 위험도 가지고 있으며,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고 나는 판단한다.

107인 선언은 한 정치학자의 발언을 인용하며 "반MB연합의 틀은 한국정치의 희망이기보다는 절망에 좀더 가까운 결과를 낳았다"고 말한다. 이 발언이 선거 결과에 대한 평가와 합치하지 않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거니와, 이런 사후평가를 떠나서도 그 발언의 전후 맥락을 검토하면 더 심각한 문제가 드러난다. 그는 5+4로 불린 연합정치의 틀을 시민운동의 원로들에 의한 "사제적 권력"의 행사쯤으로 치부하고 이견을 억압하는 "도덕주의적 강요"로 파악하기 때문이다.

과연 5+4(내지 4+4)의 연합정치를 그렇게 볼 수 있을까? 5+4의 구성방식에 대해서는 여러모로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우리의 시민운동이 선거시기의 정치적 중립이라는 오래된 틀을 깨고 최초로 당파성을 가지고 연합정치에 참여함으로써 형성된 틀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매우 중요한 정치적 실험이었다.

시민운동이 이런 입장을 취한 이유는 한편으로는 참여정부를 경과하면서 보수적 시민단체가 활성화됨으로써 시민운동이 내적 분화를 겪게 된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명박 정부의 반민주성이 중요한 요인이었다. 실제로 이명박 정부의 법을 빙자하거나 우회하는 통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나 한명숙 전 총리뿐 아니라 다수의 촛불시민들이나 네티즌에게도 매우 억압적으로 행사되었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107인 선언은 대중의 경제적 상황이라는 단일 준거로 한나라당과 민주당을 신자유주의 세력으로 등치할 뿐, 압제로부터의 정치적 해방이라는 민주주의의 기본적 성과와 궁핍으로부터의 사회적 해방이라는 사회복지적 성과 사이에서 유지되어야 할 균형감각을 유지하지 못했다.

반MB 정서에서 읽어야 할 것

6.2 지방선거를 앞둔 시민들 가운데 상당수는 언젠가 이명박 대통령의 통치가 실패로 귀결될 것임을 믿었다고 생각된다. 문제는 4대강 사업이나 천안함 사건에서 보듯이 이명박 대통령의 실패가 우리 모두의 실패가 될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명박 대통령의 통치 가운데 적어도 일부는 당장 중지시켜야 한다는 압박감이 대중적인 반MB 정서의 핵일 것이다.

이런 대중의 지향을 생각하면 5+4 같은 시도는 더욱 존중되어야 옳다. 그런 형태의 틀이 충분한 성과를 냈는가는 별도로, 거기 참여한 시민운동가들은 연합정치가 존재하지 않는 경우 대중의 반MB 투표행위로 인해 민주당의 패권주의가 더 강화될 수 있다는 판단 아래, 연합정치를 통해 민주당과 진보적인 정당들의 동반상승을 지향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균형감각을 고려한다면, 나는 저명한 지식인들이 자기 존재를 걸고 더 의미있게 6.2 지방선거에 개입하는 다른 방식이 적어도 두 가지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연합정치 견제론을 좀더 이른 시기에 더욱 힘차게, 그러나 '묻지마 반MB연합' 같은 선동적 용어를 쓰지 않으면서 밀고 나감으로써 패권주의의 위험이 흐르는 정치적 협상을 제어할 규범적 틀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107인 선언이 나온 5월 26일 시점의 상황을 더 충실히 고려하는 것이었다. 사실 그 시점에서 지식인들이 진정으로 개입해야 할 지점은 진보신당에 대한 지지이기보다 이명박 대통령의 5.24선언에 대한 비판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5.24선언을 통해서 천안함사건을 둘러싼 모든 합리적 의문을 배제했다. 설령 합조단의 발표가 이명박 대통령 자신에게 확신에 이를 만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그는 민주화 이후 우리 사회의 폭넓은 합의를 뒤집는 선언을 하기 위해서 국민적 논의를 구하지도 않았으며, 폭넓은 논의는 차치하고라도 또다른 주권적 기관인 국회와도 아무런 논의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선언 장소조차 청와대나 국회가 아니라 하필이면 전쟁기념관에서 했다.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식의 대통령의 발언이야말로 합리주의의 보루가 되어야 할 지식인들이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즉각 제동을 걸어야 했을 사안이었으며, 그것이 107인의 지식인이 동반자적 관점을 가진 진보신당을 보호하고 확장하는 일이기도 했을 것이다.       김종엽 한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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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엽 교수가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의 많은 부분을 해 준 것 같다. 많은 경우 지식인들, 특히 사회과학을 전공한 지식인들은 자신의 이론적인 틀에 현실을 끼워 맞출 뿐인 것 같다. 그리곤 현실을 이해하지도 설명하지도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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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1 18: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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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1 18: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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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2 11: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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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2 11: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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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2 12: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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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2 12: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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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2 16: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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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2 21: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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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2 23: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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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0-06-20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번 선거에서 민주당과의 공조에 힘쓴 민노당의 선택이 진보신당보다 더 현명했다고 봅니다.선거결과로 봐도 그렇구요.진보를 자처하는 이들은 민노당과 진보신당이 합쳤으면 좋겠다는 말을 덕담처럼 하는데 이번에 선거에 임하는 양당의 태도를 보면 그 차이가 너무 큽니다.그리고 진보신당의 눈으로 보면 민노당의 선거연합은 진보의 가치를 훼손한다는 결론을 내릴 것 같습니다.진보신당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서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신자유주의라는 범주로 함께 묶는 한 민노당의 이번 선거연합은 그런 신자유주의자인 민주당과 몸을 섞은 야합으로 보일테니까요.

푸른바다 2010-06-21 21:40   좋아요 0 | URL
예, 민노당 세력이 진보신당 세력보다는 좀더 현실감이 있는 듯 싶어요...
 

개인적으로 그래도 가장 인간적인 믿음이 가는 정치인을 꼽으라고 한다면, 노회찬과 심상정을 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진보신당에 대해 비판적인데, 진보신당의 정치인들이 작은 명분에 집착하여 큰 틀을 보지 못한다고 생각해 왔고 진보신당 극렬 지지자들이 보여주는 독선과 냉소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진보'라는 말에 좀 회의적이다. 개인적으로 인류의 역사라는 건 치세와 난세의 순환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는데, 진보라는 말은 너무나 단순한 직선적인 발전사관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민노당 시절부터 소위 '진보세력'에게 최소한의 표를 주지 않은 경우는 없었는데 진보를 믿어서가 아니라 국가의 적극적인 역할에 의해 복지를 확대하고자 하는 정치 세력이 이 땅에도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이유를 든다면 진보세력에게는 노회찬과 심상정이라는 매력적인 정치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교육받은 지식인으로서 밑바닥 노동운동에서부터 현재 대중 정치인까지 쌓아온 이들의 삶의 역정은 내가 구구한 언설을 붙힐 필요를 느끼지 않을 만큼 치열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노동현장에 뛰어들었고 희생되었고, 중도 포기를 했고, 변절을 했지만 이들은 자신을 더럽히지 않으면서도 꿋꿋하게 운동가에서 대중 정치인으로 성장해 왔다. 운동가 시절의 신념과 가장 대극에 있다할 한나라당으로 투항하고 만 민중당 이재오가 한 말 중에 내가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것이 있다. "나는 민중을 사랑했지만 민중은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 배신감에 대한 복수가 한나라당 행이고 현재 그가 보여주고 있는 추한 행태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재오는 김문수와 더불어 그 변절의 댓가로 권력을 얻었는지 모르겠지만 앞으로의 역사는 노회찬과 심상정을 더 기억하고 사랑할 것이다. 

오늘 진보신당의 한 축인 심상정 경기지사 후보가 사퇴를 했다. 그가 울먹이며 하는 기자 회견 동영상을 찾아서 보니 마음에 무엇인가가 짙은 감동이 느껴진다. 본인도 그렇게 이야기 했지만 열정적인 지지자들의 요구를 물리치고 후보를 사퇴한다는 건 참으로 힘든 결정이었으리라. 그는 이야기 했다. 노회찬 후보는 당 대표이기에 자신이 대신 총대를 매고 MB 심판에 대한 다수의 여론을 받아 안겠노라고. 자신이 진보 정치에 대한 신념을 포기한 것은 아니라고.  사실 후보사퇴가 현재의 한국의 민주주의가 매우 비상상황임을 징후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지만 나는 이것이 새로운 실험이기도 하다는 생각도 한편으로는 해본다.  87년 이후 선거때마다 진보정당과 민주당의 후보단일화는 주요한 이슈가 되어왔지만 내 기억으론 주요선거에서 '진보정당'이 후보 단일화에 응한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리고 사실 뜨거운 논의와는 달리 진보정당과의 단일화가 결과적으로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으리라는 것도 역사적 사실이다. 민주당 세력이 이기는 선거에서는 단일화 없이도 이겼고 지는 선거에서는 단일화를 했어도 졌던 것이다. 역사는 오히려 DJP연합이나 노무현-정몽준 단일화와 같이 보수세력간의 단일화가 파괴력이 있음을 예증해 준다. 

민주당 세력의 입장에서 진보정당과의 후보단일화 이슈가 결과적으로는 미미한 역할만을 했다면  후보 단일화에 번번히 응하지 않았던 진보정당의 입장에서 얻은 것이 무엇이었던가는 단순한 문제는 아니다.  진보정당이 단일화에 응하지 않은 것은 선거를 통해 민중의 정치세력화를 위한 전거를 마련하겠다는 것이었는데 개인적으론 진보정당이 후보단일화를 하지 않음으로써 얻은 것도 별로 많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진보정당의 흥망역시 민주당 흥망의 종속변수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역사 진행과정이다.  

이번 심상정 후보의 사퇴는 역사상 최초로 보수정당과 진보정당의 단일화 실험이다. 노회찬 후보가 대표라는 상징성 때문에 사퇴는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진보 신당의 기둥 중의 하나인 심상정 후보가 사퇴를 함으로써 진보신당도 결국은 반 MB라는 대의에 동참한 것이다. 즉 상징적으로는 노회찬 후보도 사퇴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된다. 이 단일화의 성패가 향후 정치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것이다. 내 개인적으로 생각하자면 심후보의 결단은 적어도 진보신당에게 악영향을 끼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만약 유시만 후보가 당선될 경우, 심후보의 사퇴는 역사적 결단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것이다. 유시민 후보가 낙선할 경우에도 향후 선거에서도 계속될 단일화 논의에 대한 비판의 준거를 마련할 수 있게 되고 향후 정계 개편(혹은 연합선거, 연정)에서도 보다 큰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될 것이다. 아마도  유시민이 당세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의 김진표를 꺽고 단일 후보가 됐다는 것이 대중정치인인 심상정에게는 향후 새로운 가능성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했으리라. 노회찬 후보가 심상정 후보의 사퇴를 만류했다고 하지만 그도 아마 사퇴의 모험을 강행할 필요를 느꼈을 것 같다.

향후 역사의 진행방향은 예측하기 어렵다. 지금까지의 사고들를 재반성하고 새로운 개념과 이론들을 주조해야할 만큼 새로운 상황인 것이다. 심상정의 눈물로 상징되는 유래없는 보수 진보의 단일화가 긍정적인 씨앗으로 작용할 수 있기를 기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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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ike A Rolling Stone

                                                      Bob Dylan

Once upon a time you dressed so fine
You threw the bums a dime in your prime, didn’t you?
People’d call, say, “Beware doll, you’re bound to fall”
You thought they were all kiddin’ you
You used to laugh about
Everybody that was hangin’ out
Now you don’t talk so loud
Now you don’t seem so proud
About having to be scrounging for your next meal

How does it feel
How does it feel
To be without a home
Like a complete unknown
Like a rolling stone?

You’ve gone to the finest school all right, Miss Lonely
But you know you only used to get juiced in it
And nobody has ever taught you how to live on the street
And now you find out you’re gonna have to get used to it
You said you’d never compromise
With the mystery tramp, but now you realize
He’s not selling any alibis
As you stare into the vacuum of his eyes
And ask him do you want to make a deal?

How does it feel
How does it feel
To be on your own
With no direction home
Like a complete unknown
Like a rolling stone?

You never turned around to see the frowns on the jugglers and the clowns
When they all come down and did tricks for you
You never understood that it ain’t no good
You shouldn’t let other people get your kicks for you
You used to ride on the chrome horse with your diplomat
Who carried on his shoulder a Siamese cat
Ain’t it hard when you discover that
He really wasn’t where it’s at
After he took from you everything he could steal

How does it feel
How does it feel
To be on your own
With no direction home
Like a complete unknown
Like a rolling stone?

Princess on the steeple and all the pretty people
They’re drinkin’, thinkin’ that they got it made
Exchanging all kinds of precious gifts and things
But you’d better lift your diamond ring, you’d better pawn it babe
You used to be so amused
At Napoleon in rags and the language that he used
Go to him now, he calls you, you can’t refuse
When you got nothing, you got nothing to lose
You’re invisible now, you got no secrets to conceal

How does it feel
How does it feel
To be on your own
With no direction home
Like a complete unknown
Like a rolling stone?
------------------------------------------------------------------------------------------------------  

굴러다니는 돌처럼  

                                  밥 딜런 


예전에 잘 차려 입고 다니던 한창 때 
거지에게 푼돈을 던져 준 적 있지?
사람들은 충고 했었어,
"이봐 아가씨, 당신도 추락할 날이 있을 거야"
그걸 농담이라고 생각했을 테지
밖에서 떠도는 그들 모두를 비웃었었지
헌데 지금은 그렇게 큰 소리 못 칠 걸
다음 끼니를 구걸하는 지금이 그리 자랑스러워 보이진 않군

저 굴러 다니는 돌처럼
집도 없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그 맛이 어때?
그 맛이 어때?

좋은 학교를 다녔다지? 우리 고독 양
그런데 남들이 먹기 좋게 해준 것만 먹었을 뿐이란 걸 알 테지
아무도 길 거리에서 생존하는 법을 가르쳐 주진 않았어
그런데 지금은 그런 삶에 적응해야 한다는 걸 알았을 거야  


당신은 정체 불명의 부랑자들과는
타협하지 않는다고 했지
그런데 이젠 깨달았겠지
그들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걸 말이야
당신은 그의 쾡한 눈을 꽤 뚫어 보며
협상하자는 거요? 라고 했지  


저 굴러다니는 돌처럼
알아보는 사람 하나 없이
집도 없이 외톨이인
그 맛이 어때?
그 맛이 어때?

당신은 곡예사나 광대의 찡그린 표정에 눈길 하나 주지 않았을 거야
그들 모두가 당신을 위해 곡예를 할 때 말이야
당신은 그게 좋은 행동이 아니었단 걸 결코 이해 못했었을 거야
당신은 다른 사람들을 걷어 차지 말아야 했어  


당신은 어깨에 샴 고양이를 얹고 다니는
아부 꾼과 함께 황색 말에 타곤 했지
그가 훔칠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져간 다음
그들이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았다는 걸 아는 걸 어렵지 않았을 거야 


저 굴러다니는 돌처럼
알아보는 사람 하나 없이
집도 없이 외톨이인
그 맛이 어때?
그 맛이 어때?

뾰족탑 위의 공주와  예쁜이들,
그들은 성공했다 축배를 들며
각종 귀중품들을 주고받는 좋아하지
그런데 다이아 반지는 빼는 좋을 , 아마 저당잡히는 나을 거야
당신은 낡은 망토 속의 나폴레옹이나 그가 했던 말들을 즐거워 하곤 했지 
그에게 가봐, 그가 당신을 부르고 있어

당신은 거부할 수 없을 거야
당신이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을 때
당신은 보이지 않는 존재라는 걸, 숨길 것 하나 없는.

저 굴러다니는 돌처럼
알아보는 사람 하나 없이
집도 없이 외톨이인
그 맛이 어때?
그 맛이 어때?  

Trans. by Blue Oc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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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런의 Like a rolling stone 조소적이면서 풍자적이다. 조소적이라 함은 자신의 부가 영원하리라 믿고 힘없는 자들을 우습게 하는 자들을 조롱하기 때문이고 풍자적이라 함은 누구나 거리에 굴러다니는 돌과 같은 신세로 떨어질 있는 자본주의 사회를 풍자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누구나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는 장미 빛의 희망을 모토로 삼지만 한편으론 누구나 집도 절도 없이 거리를 구르는 돌과 같은 신세로 전락할 있다는 불안감으로 충만한 사회이다. 혹자는 그러한 가능성을 부정함으로써 자신을 특수한 존재로 인식 함으로써 불안에서 회피하고 혹자는 그러한 가능성을 자각하기에 불안에 떨며 소심하게 살아간다. 이러한 불안은 자본주의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든다.

딜런은 말하는 하다.  그들은 숨길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을 모습 그대로 보라. 그게 바로 자신의 모습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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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ross the Universe 

                                            John Lennon 

Words are flowing out like endless rain into a paper cup,
They slither wildly as they slip away across the universe
Pools of sorrow, waves of joy are drifting through my open mind,
Possessing and caressing me.
Jai guru deva, om
Nothing's gonna change my world,
Nothing's gonna change my world.
Nothing's gonna change my world.
Nothing's gonna change my world.

Images of broken light which dance before me like a million eyes,
They call me on and on across the universe,
Thoughts meander like a restless wind inside a letter box
They tumble blindly as they make their way
Across the universe
Jai guru deva, om,
Nothing's gonna change my world,
Nothing's gonna change my world.
Nothing's gonna change my world.
Nothing's gonna change my world.

Sounds of laughter shades of life are ringing
Through my opened ears inciting and inviting me
Limitless undying Love which shines around me like a
million suns, and calls me on and on
Across the universe
Jai guru deva, om,
Nothing's gonna change my world,
Nothing's gonna change my world.
Nothing's gonna change my world.
Nothing's gonna change my world.

Jai guru deva
Jai guru deva
Jai guru deva
Jai guru de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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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가로지르기

                               존 레넌          

종이컵 속으로 끝없이 내리는 비와 같이
말들이 흘러 넘친다.
그들은 격하고도 부드럽게 흐른다.
우주를 가로질러 미끄러져 가듯.

슬픔의 연못, 기쁨의 물결은
열린 내 마음을 떠돌며
나를 지배하고 달랜다. 

구루여 깨달음을 주소서 
아무것도 나의 세계를 변하게 할 수 없어요
아무것도 나의 세계를 변하게 할 수 없어요
아무것도 나의 세계를 변하게 할 수 없어요
아무것도 나의 세계를 변하게 할 수 없어요  
 

산란된 빛의 이미지가
백만의 눈동자와 같이 춤추며, 재촉한다.
우주를 가로지르라고.
생각은 우편함 속의 쉼 없는 바람처럼
굽이친다.
그들은 맹목적으로 떨어져 내린다.
우주를 가로질러 자신의 길을 내며. 
 

구루여 깨달음을 주소서 
아무것도 나의 세계를 변하게 할 수 없어요
아무것도 나의 세계를 변하게 할 수 없어요
아무것도 나의 세계를 변하게 할 수 없어요
아무것도 나의 세계를 변하게 할 수 없어요  

웃음 소리, 생명의 그늘이
열린 내 귀를 통해 울리며
나를 자극하고, 초대한다.
가없는 불멸의 사랑이
백만의 태양처럼 나를 비추며
계속해서 재촉한다.
우주를 가로지르라고. 
 

구루여 깨달음을 주소서
아무것도 나의 세계를 변하게 할 수 없어요
아무것도 나의 세계를 변하게 할 수 없어요
아무것도 나의 세계를 변하게 할 수 없어요
아무것도 나의 세계를 변하게 할 수 없어요  

구루여 깨달음을 주소서
구루여 깨달음을 주소서
구루여 깨달음을 주소서
구루여 깨달음을 주소서
 

Trans. by Blue Oc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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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왠지 Across the universe가 듣고 싶어졌다.
평소 가사에 관심을 기울이진 않았는데 문득 어떤 내용의 가사인지 궁금해져서
가사를 찾아 번역을 시도해 보았다.  
참으로 난해한 내용이어서 의미를 제대로 새겼는지 자신은 없다.   

비틀즈의 노래도 좋지만 피오나 애플의 노래도 비틀즈의 노래 못지 않게 들을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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