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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사고 전문 삼비 탐정 - 2021년 한국 추리 문학상 대상
윤자영 지음 / 북오션 / 2021년 5월
평점 :
윤자영 작가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이다. 그의 작품들에선 이과 냄새가 난다. 강원도 폐교에서 거액의 상금을 놓고 벌이는 추리게임과 그 흑막을 그린 <교동회관 밀실 살인사건>, 여섯 개의 기발한 물리적 트릭이 등장하는 <나당탐정사무소 사건일지>, 학폭과 탐욕을 소재로 복수와 추락을 다룬 <파멸 일기>...담백한 문장에 흥미로운 이야기 그리고 과학적 지식을 트릭에 적극 대입한 특유의 이과 냄새....나는 그 냄새가 좋다.
이번 신작 역시 그 특유의 이과 향기가 물씬 드러나는 작품이다. 그런데 주인공인 탐정이 예사롭지 않다. 추리소설을 오랫동안 읽어왔지만 듣도 보도 못한 교통사고 전문 탐정이라니...아마 국내 또는 세계 최초의 특화된 탐정의 출현이 아닐까...엄밀히 말해 탐정은 아니고 조사관 수준이지만...국가 자격시험이 있는 도로교통사고 감정사란 직업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전직 고교 물리교사 출신의 교통사고 전문 조사관 박병배, 일명 삼비 탐정은 옛 인연으로 알게 된 최가로 여성 국선변호사 사무실에서 더부살이를 한다. 일종의 동업자이자 부하(?) 같은 오묘한 관계. 그러면서 삼비 탐정은 최 변호사와 합심해서 다양한 형태의 의문스러운 교통사고건을 해결해 나간다.
1부는 야심한 심야 시간, 한적한 시골 마을 교량에서 떨어져 자살로 처리된 한 젊은 여성의 의문의 추락사를 다룬다. 삼비 탐정은 계곡에 떨어진 시체의 위치와 자세에서 타살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1부의 재미는 특유의 플롯에 있다. 삼비 탐정의 수사 시점과 범인의 범행 시점으로 교차 진행된다. 그래서인지 삼비 탐정의 흥미진진한 추리적 재미와 범인이 범행을 모의, 실행하는 스릴러적 긴장감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은, 그런 구성으로 인하여 예상치 못한 제3의 인물이 등장하는, 독자를 깜짝 놀래킬 수 있는 장면이 자연스러운 서술로 인하여 반전의 극대화를 놓치는 부분이다. 이 장면이 조금은 아쉽다.
2부는 한 편의 복수 스릴러이다. 과거로 돌아가 박병배가 최변호사를 만나는 계기와 탐정에 입문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교통사고로 한순간에 가족을 잃고 실의에 빠진 박병배가 반성과 사과는커녕 오히려 적반하장격으로 권세를 앞세워 큰소리치는 가해자 검사에게 핏빛 복수를 맹세한다. 그 실행 과정은 물론 스릴 만점이다.
3부는 외국인 아내 보험 살인이 의심되는 빗길 교통 사망사고를 다룬다. 거액의 보험금을 노리고 아내를 교통사고로 위장해 살해하려는 남편, 그런 남편의 무죄 석방을 걸고 모종의 거래를 하는 삼비 탐정, 그런 탐정을 측면 지원하는 대머리 해결사, 아무것도 모르고 손주의 해외 입양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최변호사....이 단편은 물리적 트릭이나 추리적 재미보다는 등장인물의 가치관과 이해득실에서 파생되는 정의감과 권선징악식 결말에 포커스를 맞춘다.
마지막 4부는 장애인 노인에게 중고차 사기를 치고 그것도 모자라 노인을 변호하는 최변호사에게까지 해코지를 한 불량 딜러들을 혼내주는 삼비 탐정의 통렬한 활극이 펼쳐진다. 되로 받고 말로 주는 식의 삼비 탐정의 분노한 액션과 그 같은 불법적 응징을 극구 만류하는 최변호사와의 애틋한 로맨스가 볼만하다.
책을 읽기 전에는 작가가 현직 고등학교 과학 교사인지라 자신의 주특기를 십분 살린, 너무 고난도의 물리적 지식과 트릭이 등장하는 게 아닌가 살짝 우려도 했는데 그것의 기우였고, 오히려 너무 난도를 초등 수준으로 낮추는 바람에 조금은 심심했다고나 할까... 개인적으로는 물리적 지식의 난도를 조금 높이는 게 어땠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 책이 교통사고를 다루고 그것을 풀어내는 수단으로 다양한 물리학적 지식들이 등장하지만 그것은 단지 보조 수단일 뿐 어차피 이야기를 끌고 가는 핵심 주체는 사건에 둘러싸여 갈등을 일으키고 또 그것을 해결하는 인간들이다.
미사여구가 철저히 배제된 간결하고 담백한 문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초보 수준의 물리학적 지식, 교통사고를 놓고 벌이는 가해자와 피해자 간의 진실 공방, 그 뒤편에 도사리는 범죄의 냄새... 그 중간에 서서 정밀한 분석과 예리한 추리로 사건의 진상을 꿰뚫는 삼비 탐정... 그리고 최변호사와의 알콩달콩한 달달한 캐미까지...문장도 쉽고 내용도 흥미로워서 이틀 만에 후딱 읽었다. 나당탐정 2탄을 기다렸는데 삼비 탐정이라니...다음엔 또 누굴까 궁금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