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리 들판에서
리스 보엔 지음, 정서진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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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과 연합군이 힘을 겨루는 제2차 세계대전이 기승을 부리고 독일의 영국 침공이 임박할 즈음, 영국 런던 교외의 켄트주 웨스터햄 백작의 팔리 영지에 낙하산 불시착으로 추락해 사망한 군인의 시체가 발견된다. 영국군 복장의 사체는 가짜 인식표와 모표로 인해 적의 첩자로 추정되고, 소지품이라고는 1461이라는 의문의 숫자가 적혀있는 풍경을 찍은 스냅 사진 한 장이 전부이다. 과연 사진과 숫자는 무엇을 의미하며 그가 현지에서 접선하려는 자는 누구인가? 평화롭던 팔리 영지에 잔잔한 파문이 인다.

오랜만에 읽는 스파이 소설이다. 그것도 리스 보엔이라는 여성 작가가 쓴.... 엄밀히 말해 『팔리 들판에서』는 전쟁 소설이자 역사 소설이요, 연애 소설이자 첩보물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당시의 역사적 사실을 생생히 재연하며 그 전쟁통에 꽃피우는 젊은 남녀의 산뜻한 로맨스와 궁극적으로 모종의 음모를 꾸미는 스파이를 찾아내는 이야기이다.

이 책을 끌고 가는 주인공은 크게 네 명이다. 귀족의 아들이자 훈남으로 영국 공군의 에이스 조종사인 제러미(19세), 그런 그의 연인이자 웨스터햄 경의 셋째 딸로 영국 비밀 정부 부서에서 암호 해독가로 근무하는 패멀라(21세), 제러미와 패멀라의 오랜 동네 친구로 패멀라를 짝사랑하는, 목사의 아들이자 옥스퍼드대 출신의 MI5(영국 정보부)에 근무하는 벤(19세), 그리고 패션 디자인을 공부하러 파리에 가서 연인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 바람에 전쟁통에 발이 묶인 웨스터햄 경의 둘째 딸 마고(23세).

전쟁은 일상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는다. 마치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 시대의 그것처럼... 귀족가의 어린 숙녀들은 사교계 진출이 막혀 미래의 남편감을 찾는 기회를 박탈당한 데에서 오는 상실감에 툴툴거리고, 반면에 젊은 남자들은 학업과 생업을 중단한 채 전쟁에 자원 또는 징집되어 생사의 갈림길을 오간다. 웨스터햄 경 딸들의 무료하지만 활기찬 일상생활과 벤과 패멀라의 런던 근무지 상황을 보여주며 차분하게 흘러가던 이야기는 독일 포로수용소에서 극적으로 탈출한 제러미가 고향으로 무사히 귀환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벤은 사망한 전령으로부터 접선하려는 현지인을 색출하라는 상부의 비밀 지시를 받고 고향으로 내려오고, 패멀라는 연인의 귀환으로 휴가차 팔리 영지를 찾으면서 세 주인공은 다시 한번 운명의 조우를 한다. 한편, 파리에 있던 마고는 레지스탕스의 대장인 연인이 독일군에게 체포되면서 게슈타포에게 끌려가 협조 명목으로 갖은 고초를 겪는다.

그렇게 전쟁은 모든 가족과 친지, 이웃들을 뿔뿔이 흩어지게 하고, 그들은 각자 자신들만의 사명과 애국심으로 험난한 전쟁통을 헤쳐나간다. 때론 안타깝고 때론 로맨틱하게 흐르던 이야기가 벤의 집요한 수사 끝에 스냅사진 속의 풍경의 장소와 숫자의 의미를 알아내면서 급물살을 탄다. 서행으로 주행하던 자동차가 서서히 속도를 올리더니 급기야 고속으로 질주하는 느낌이랄까... 과연 조국을 배신하고 적군과 내통하는, 아니 더 나아가 체제를 전복시킬 정도의 가공할 음모를 꾸미는 스파이는 누구인가? 모든 것이 밝혀지는 라스트씬은 그래서 더욱 짜릿하다. 마치 공유, 송강호 주연의 영화 <밀정>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다. 나라를 팔아먹고 적과 내통하는 밀정을 색출해 처형하면서 "의열단의 이름으로 적의 밀정을 척살한다."라는 공유의 멋진 대사처럼...

작가는 이 책을 쓰기 위해 당시 사용되었던 블레츨리 파크를 현장 방문하는 등 역사적 고증에도 힘썼고, 배급제, 전시 행동 강령 7대 수칙 등을 통해 당시 전시 하의 영국 현지 분위기를 생생히 전달한다. 이 책은 스파이 소설이지만 하드보일드 스타일의 건조하고 냉소적인 그런 분위기의 묵직한 소설이 아니다. 오히려 여성 작가 특유의 섬세하고, 낭만적이고, 목가적이고, 그런 가운데 로맨스가 싹트는 부드러운 스파이 소설이다. 만약에... 정말 만약에 전쟁이 없었다면... 드넓은 팔리 영지를 맘껏 뛰놀며 테라스에서 한가롭게 티타임을 즐기는 웨스터햄 경 부부와 다섯 딸들의 행복한 수다... 그리고 그들 옆에서 즐겁게 어울리는 젊은 청년 제레미와 벤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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