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들아,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마라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2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이젠 뭐 창피하지도 않다. 시험핑계로 읽지 않은 것은 아니었고, 다른 핑계로 읽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냥 안 읽었다. 오만과 편견을 읽겠다고 깝치다가, 50페이지쯤 읽고 관 뒀다. 읽다마는 책은 드문데다가 기분도 찝찝하지만 싫은 걸 어떡해.
아무튼 그래서 읽다 만 책을 반납하고 책장을 기웃거리다가 읽고 싶은 책을 한 권 발견했고, 고개를 돌리다가 김훈이라는 글씨가 눈에 들어온데다 안 본 책 같아서 바로 한 권 추가했고, 대여기계 앞에 가니 반납기에 또 보고 싶은 책이 있어서 전부 세 권을 빌렸다.
소설가든 시인이든 가수든 화가든 아무튼 사람인 이상 자신들의 작품엔 자신들만의 어떤 스타일이라고 해야 할까, 화두라고 해야할까, 장단이나 리듬이라고 해야할까, 아무튼 그런 어떤 것들을 가지고 있다. 가령 유미리라면 '가족'이라고 한 단어로 요약될 정도로 쉽게 눈에 뜨이는 경우도 있고, 은희경이라면 '냉소'라는 식으로 조금 더 추상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도 있고, 하성란이라면 '한'이라는 말 해놓고도 어째 설득력 없는 개인적 감상 비슷한 것으로 느껴지는 것도 있다. 김훈은 적어도 내 안에서는 아주 단순하게 정리되었는데, 김훈의 화두는 '마초'다.
마초라는 단어를 들을 때 마다 나는 김훈을 떠올린다. 단지 이순신이나 우륵, 수컷 개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들을 써왔기에 그랬던 것은 아니다. 김훈의 글은 남성적이고, 선이 굵다. 김훈의 시선은 철저히 남성적이고 강인하다. 그리고 그 극단적인 남성성은 특유의 문체와 시선에 큰 영향을 준다. 마초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근육질에 골 빈, 소위 말하는 터프라는식의 선입견이 있는데, 그건 얼치기 마초가 아닐까. 극단의 마초인 김훈은 오히려 부드럽다. 김훈을 좋아하지 않는 여성이 있을지 궁금하다.(라고 지금까지 쓴 건 백프로 내 멋대로의 독단적인 생각.)
책은 김훈 세설 이라는 부제답게 김훈이 그동안 이곳 저곳에(아마 98,9년 부터 2002,3년까지) 써 온 칼럼이나 수필 따위를 모아 놓은 것이다. 2004년에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라는 이름의 개정판으로 새로 출간되었다. 말하자면 헛고생이다. 읽어봐야지 뭐. 아무튼 나는 김훈의 글을 읽을 때 마다 정말 인간이 갱신된다. 포맷이야. 윈도우 새로 깔았어. 어제 밤까지 정말 안 좋은 생각이랑 속물같은 생각 참 많이 들고 있었는데, 책을 다 보고 나서 뭔가 정화된 자신을 느꼈다. 아침에 일어나선 다시 속물이 되었지만.
갈수록 구시렁대는 것 같아서 여기서 그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