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티멘털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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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식을 찾다 못찾고 귀찮아서 대충 빌림. 읽고 나니 작가가 쓴 소설군에서는 무척 이례적인듯 하다.(확신은 못 하겠다.) 작품은 청수, 다카세가와, 추억, 얼음 덩어리 네 개의 중, 단편으로 이뤄져 있다. 합쳐서 약 250페이지 정도. 나열순으로 감상을 말해보자.

청수를 읽고는 정말로 긴장했었다. 내가 이 책을 다 읽을 수 있을까. 나는 소설은 철저히 이야기를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라는 말을 대체 이 게시판에 몇 번째 쓰는 건지.) 이런 식의 말장난은 좋아하지 않는다. 아마 대부분의 독자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적당한듯한 단어와 불친절한, 하지만 작가는 만족하는 듯한 언어들로 이뤄진 이런 사유의 나열은, 말 그대로 말장난일 뿐이다. 이런 식이기 때문에 문학은 영화만큼의 대중성을 얻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지루하고 지겹고 짜증나는 작품이었다. 무슨 소리하는지 정말 읽었지만 하나도 기억도 안 난다.

하지만 다음 작품 다카세가와를 읽었을 때, 그런 내 고민과 짜증은 사라졌다. 연애 혹은 남녀의 만남에 대한 무척 담백한, 그런 만큼 정교한 묘사는 무척 좋았고 청수에서 느낀 '작가로써의 교만'이 없었기 때문에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 이따금씩 빛나던 문장은 청수와 같은 쓸데없는 글 속에 있지 않았고, 이런 '이야기' 속에 있었다.

추억. 청수보다 더 읽기 싫어서 대충 넘겼다. 이런 자의식 과잉으로밖에 안 보이는 장난은 그저 화가 날 뿐이다.(이건 철저히 내 취향이다. 누군가의 눈에는 이런 '시도'가 대단해 보일지 모르겠지만, 내 눈에는 장난으로밖에 안 보인다.) 정말 거의 진심으로 화가 났었다.

그리고 이들 속에서 마지막에 있던 얼음 덩어리는 빛이 날 정도로 멋진 작품이었다. 두 주인공 '소년'과 '여자'의 서술이 한 페이지를 반으로 나뉘어 쓰여 있는 것을 봤을 때엔, 추억을 읽고 난 후라서 울컥 짜증이 몰려왔지만 읽다보니 무엇보다 제대로 된 '이야기'가 있어서 그런 시도가 나쁘지만은 않았다는 생각을 했다. 한 페이지를 절반으로 나뉘어 서로 다른 이야기가 진행되다보니 어떻게 읽어야 할지 난감했지만, 일단 소년의 부분부터 한 단락이 끝나는 부분까지 읽고 여자의 단락 둘을 읽고, 다시 소년의 단락 둘을 읽는 식의 반복으로 읽었다. 무척 무난한 소재를 사용했지만 그 서술에 있어서만큼은 상당히 훌륭한 완급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 설득력 있는 '이야기'속에 가볍지 않은 사유가 있었기 때문에 정말로 마음에 든 작품이었다. 그의 장편도 이런 식이라면 상당히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듯하다.

장편을 주로 쓰는 작가의 단편집을 읽었기 때문에 작가의 성향에 대해 딱히 할 말은 없다. 조금 더 읽기로 한다.

 사족. 작품집의 제목은 '센티멘털'인데, 작품명중에 '센티멘털'이라는 작품이 없어 왜 그런지 궁금하던차에 책 저작권 페이지를 보니 원래의 작품집 제목은 '다카세가와'인 듯했다. 왜 멀쩡히 있던 제목을 다른 것으로 누가 바꾸었는지는 모르겠다. 대충 일본어 제목의 위화감 때문에 그랬던 건가, 라고 잠시 생각했지만 설득력이 부족하다. 역시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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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훈 2007-02-10 2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로지 '얼음 덩어리' 때문에 별 다섯.
 
페드로 파라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3
후안 룰포 지음, 정창 옮김 / 민음사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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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시리즈.

마찬가지로 남미 문학을 읽자는 마음에 빌렸다. 작가는 멕시코인. 으례 그렇듯, 책 뒷표지에는 엄청난 찬사들이 쓰여 있었다.

작품은 주인공'후안 쁘레시아도'가 자신의 어머니가 죽으며 찾으라 말했던 만나지 못했던 자신의 아버지 '뻬드로 빠라모'를 찾으러 가는데서 시작된다. 하지만 단순히 '아버지 찾기'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 그 구성이 너무도 복잡하기 때문에. 서술상 이야기 진행 순서를 숫자로 표현해 본다면 처음엔 1-3-2-정도로 어렵게나마 이해할 수 있던 것이 나중에 가서는 13-85-27-이런 수준으로 무척 혼란스럽다. 물론 생소한 작중 인물들의 이름을 계속 상기해가며 꼼꼼하게 읽는다면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그토록 열정을 가지고 읽지 않는 경우엔 대부분 헷깔릴만한 진행을 보인다. 그리고 단순히 사건 구성의 혼란뿐 아니라 서술상의 혼란 또한 존재하는데 누가 살고 누가 죽은 인물인지도 잘 모르겠고, 주인공이 중반부에 죽어버리는 일도 일어난다. 게다가 실제 주인공은 뻬드로 빠라모였고, 서술자는 시도 때도 없이 바뀐다. 그러나 그런 만큼 남미 문학 특유의 환상성은 최고조로 발휘되는데, 작가 특유의 우울함과 맞물려 무척이나 인상적인 부분이 많다. 단지 글을 읽고 있을 뿐이지만, 어떤 종류의 훌륭한 영상미를 갖춘 영화를 보는 것 보다 더욱 생생히 머릿 속엔 서술되는 장면이 그려지는데 무척 놀라운 경험이었다. 이토록 선명히 어떤 장면들이 연상되는 독서는 무척 드물다. 170페이지가 조금 넘는 분량이었는데, 앞서 말한 혼란스런 구성 때문에 보통 170페이지 정도 되는 책보다 읽는데 시간이 더 걸린다. 하지만 다 읽고나서도 어안이 벙벙한 것은 내가 이런 세계문학을 읽을 정도로 모자라서인가. 모르겠다.

그리고 읽다보니 자연스레 그 분위기나 소재의 면에서 '무진기행'이 떠올랐는데, 개인적인 감정을 듬뿍 불어 넣어서 김승옥이 훨씬 낫다는 생각을 했다. 보통 같은 책을 반복해서 읽는다는 것은 그 작가(혹은 작품)의 광적인 독자가 아니고서야 흔히 있는 일이 아니며, 이렇게 많이 읽은 뒤에야 이해가 가능한 책의 경우는 그 존재에 의문을 품게 된다. 나는 문학이란 것엔 기본적으로 일회성이 있다고 본다. 거의 대부분의 책은 고작해야 한 번 읽는다. 그렇기 때문에 한 번 읽을 때 단번에 작가의 말을 알아 듣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물론 깊이 있는 작품의 경우는 단번에 알아채지 못하는 것들을 담고 있어야 한다고도 생각하지만, 소설의 가장 앞에 있는 것-서사 구조만큼은 이해하기 쉽게 독자의 입장에서 쓰여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면에서 김승옥의 '무진기행'은 이 작품보다 좋다. 하지만 내 모든 행동의 원인은 나에게서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단순히 내가 이 작품을 읽기에 부족하다는 것으로 결론 짓는다. 언젠가 다시 읽는다면 다른 생각을 하게 될지 모르겠지만, 첫 독서에서 큰 인상을 남기지 못한 책을 다시 읽는 경우가 전무한 나이기에 다시 읽을지는 모르겠다.

 

번역에 대한 말을 미처 두드리지 못했기에 사족 비슷하게 담는다. 번역은 특별히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만, 각주만큼은 걸렸다. 각주를 읽다보면 번역가가 작가에게 가지고 있는 애정이 느껴질 정도로 각주에 신경을 쓴 티가 역력한데, 그건 결과적으론 오지랖이었다. 작품에 대한 해석은 오로지 독자의 몫이다. 시야를 넓히기 위해 평론가라는 작자들의 글을 읽을 권리는 있지만 말 그대로 권리일 뿐이다. 번역가는 각주에 평론가들의 작품에 대한 보편적인 해석을 그 작품의 독법인 양 달아 놓음으로써 독자의 권리를 침해한다. 번역은 오로지 작가의 언어 사용을 가능한 분명하고도 정확하게 다른 말로 옮기는 것에 있다. '보편적'인 '평론가'들의 '견해'같은 건 대체 지구상에 존재 가치가 있는 것인가. 작가와 독자와의 거리를 가능한 가까이 좁히는 것 이상의 행위를 하는 번역가들은, 선자리에서 일어나야 할 적절한 순간을 알지 못하고 눈치 없이 자리에 앉아 있는 재주 없는 매파와 다를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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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정류장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1
가오싱젠 지음, 오수경 옮김 / 민음사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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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시리즈.

작가는 2000년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 소설가이자 희곡 작가인 작가의 희곡 3편(버스 정류장, 독백, 야인)이 실려있다. 각각 80페이지 20페이지 100페이지 정도가 되는 분량이며, 부록으로 작가가 연극에 대한 생각을 쓴 글 한 개, 자신의 희곡을 공연할 때 당부하고픈 것들을 쓴 글 2개가 수록되어 있다. 

...듣지도 못한 작품을 순간적인 기분으로 빌리는 짓은 관둬야겠다. 게다가 평소 읽지도 않던 희곡을 빌리다니! 작가에게 죄송한 마음이 들 정도로 성의없이 읽었다. 그렇기 때문에 특별히 할 말도 없다. 읽어도 모르는데!

다만 작가가 '나의 <버스 정류장>은 한 편의 연극이지, 반연극(부조리극)은 아니다.' 라고 부록에 분명히 밝힌 글이 실렸음에도 뻔뻔스럽게 뒷표지에 '동양의 전통 사상과 정서를 현대 부조리극으로 형상화'라는 수식어를 가져다 붙이는 건 문제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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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성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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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페이지 정도로 얄팍해 보여서 만만히 보고 빌렸는데, 또 읽기 힘들더라. 초반 50페이지 정도가 재미있게 너무 잘 읽혀서 긴장을 풀었는데, 이게 웬 걸. 그 이후로는 정말로 진도가 안 나갔다. 60페이지 정도를 읽고 2시 정도에 도서관에 갔는데, 안 읽혀서 자고 일어나고 어쩌고 하다 보니 도서관이 닫을 5시가 되어서 열람실에서 내려와 5시 20분 정도에 평생학습실(독서실 같은 분위기)에서 마저 다 읽었다. 역시 독서는 만만히 볼 일은 아닌가보다.

책은 주인공 17세기 이탈리아 인인'나'가 항해하는 도중에 이스탄불 선박들의 습격을 받아 노예로 잡혀가는 데서 시작된다. 비록 노예였지만 적절한 처세술로 그곳의 파샤(아마 이스탄불에서 어느 정도의 권력이 있는 사람들을 부르는 칭호 같다. 일종의 벼슬?)에게 잘 보여서 다른 노예들과 달리 자신의 지식을 활용해 고향으로 돌아갈 꿈을 꾼다. 그러다가 어느 호자(선생이라는 뜻)를 만나게 되는데 너무도 자신과 닮은 그의 모습에 놀란다. 그리고 그의 지식을 높게 산 파샤 덕분에 '나'는 호자와 함께 국가적 행사의 불꽃놀이를 계획, 실행하기에 이르고 그것이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자, 파샤는 일종의 상으로 그를 호자에게 준다. '나'는 바라는대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대체적으로 이런 진행인데, '나'와 '호자' 그리고 '서구 문명'과 '터키 문명' 꼭 닮은 대립을 통해 작가는 정체성을 잃어가는 자신의 나라의 역사를 되짚어보는 게 아닐까. 그리고 '나'와 '호자'를 통해 그것 이상으로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나는 어째서 나인가-을 보인다. 특히 '나'와 '호자'가 서로간의 마주보는 글쓰기를 통해 자신 내면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부분은 '폴 오스터'의 '뉴욕 3부작'이 생각났다. 이러한 식의 작가 자신도 확신할 수 없는 '어떤 것'에 대한 깊이 있는 서술은 항상 오묘한 즐거움을 주는데, 그 즐거움의 뒷면은 일종의 경외심이나 공포, 어떠한 미스테리가 있다. 그리하여 독자에겐 즐거움과 동시에 두려움을 준다. 일테면, 죽기 전엔 알 수 없는 죽음과 같은 것의 공포인데 그것은 너무도 크고 알 수 없는 어떤 것이기에 나 자신이 일종의 막다른 곳으로 몰린다는 기분을 느낀다.

이해했다는 표현을 쓰기엔 나와 이 책의 거리는 너무도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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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집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9
이사벨 아옌데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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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이틀 전까지 읽고 싶었던 책이었지만 타고난 게으름으로 이렇게 이틀을 더 밀고 왔다. 가능했음에도 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는 자신을 자책하는 말 말고는 특별히 더 할 말이 없다.

1권에선 뛰어난 스토리텔링 능력을 유감없이 보여줬다면, 2권에서는 보다 할 말을 확실히 했다는 느낌이다. 1권과 2권 초반부까지는 로사-클라라-블랑카로 이어지는 델 바예가문의 모계 3명의 인물과 로사의 약혼자이자 클라라의 남편, 블랑카의 아버지 에스테반 트루에바를 통해 전근대적인, 그리고 작가의 모국 특유의 분위기를 잘 표현하며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단순히 로사-클라라-블랑카의 여성 작가만이 쓸 수 있는 정교한 여성의 묘사 뿐 아니라 남성 인물인 에스테반 트루에바의 심리나 사건을 너무 재미있게 전개시킴으로 소설이 가진 가장 큰 미덕-이야기 자체의 재미를 확실히 보여준다. 반면, 2권에서는 클라라-블랑카 모녀의 이야기가 일단락되면서 작품 자체의 진정한 주인공(이라고 내가 생각하는)알바의 주된 이야기가 시작된다. 알바의 이야기도 초중반은 클라라나 블랑카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중후반에 돌입하며 작가의 조국-칠레의 역사와 복잡하게 얽히며, 알바는 곧 작가의 분신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결국 작가는 2권의 칠레 근현대사를 위해 여기까지 이야기를 이끌어 오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보다 인상적이다.

아무래도 나의 외삼촌이 대통령이었고, 그 대통령이 지구상 최초의 민주주의적인 방법으로 선출된 좌익인물인데다가, 선출되고 나서 쿠데타에 의해 살해당했다면, 나도 이런 글을 써서라도 세상에 그 이야기를 알리고 싶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작가의 경험에 기반된 엄청난 리얼리즘과, 부르주아였던 작가가 가지고 있던 한계 또한 너무도 적절히 묘사되었던 바, 나는 가능한 최대의 찬사를 보내고 싶다. 무엇보다 칠레의 역사와 우리의 역사는 너무도 닮아 있는 점이 많다는 것, 그리고 그 조국이라는 실체가 있는 지 없는 지도 모르는 것이 그 국가의 국민이라는 것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만약 당신이 세계사에 관심이 없다면 무척이나 지루할 소설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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