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나온 지 조금 됐지만 드디어 읽는다. 뭐 그간에도 문예지에 꾸준히 단편소설들을 실었던 걸로 기억하지만 책이 출간된 것은 무척 오랜만인 것 같다. 장편은 핑퐁 이후로 3년만인가. 척 작품이 크게 성공했던 사람들은 모두 마찬가지겠지만 박민규 또한 (첫 작품은 아니라도)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의 대성공 이후 그 작품을 계속 등에 엎고 작품 활동을 한 느낌이 강하다. 그 스스로는 큰 부담이나 책임감이 없어 보였기도 했지만, 적어도 독자쪽에서 보기에는 항상 삼미를 벗어나느냐 마느냐가 새로운 작품이 등장할 때마다 가졌던 가장 큰 기대감이었다. 나 개인적으로는 카스테라를 너무 좋아해서 그 이후로는 뭐 될대로 되라,정도로 어중간하게 생각하긴 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항상 그의 새로운 작품들이 나올 때마다 삼미보단 못하다,며 악평하기를 서슴치 않았던 것 같다. 무튼 한국 작가들 중에서는 꽤나 애정과 관심을 가진 작가이기 때문에 이 작품이 나왔을 때도 상당히 여러 가지 면에서 기대를 했었고, 드디어 읽는다.

대략적인 시놉시스는 인터넷을 통해 꽤 알려졌으니 차치하기로 하고, 나 자신의 총체적인 감상에 대해 말해보자면 초중반부까지는 무척 좋았지만 종반부에서는 별로였다. 못 생긴 여자가 등장하는 것부터 박민규 소설 특유의 화두가 여지없이 들어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그것에 대한 여러 가지 묘사와 서술은 정말 좋았었다. 잘생겼다는 이야기를 별로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세상에 사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공감이 가는 이야기들이었다. 형식의 측면에서도 원래 쉼표와 줄 바꿈, 글자 크기 조절 등 원래 여러 가지 시도를 하는 작가였으니 만큼 이젠 글자에 색깔까지 넣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또한 아무리 정적인 인쇄매체라 하더라고 세상이 바뀌어가니 만큼 어느 정도의 변화가 오는 것도 당연하다고 믿는다. 거기에 주인공과 여주인공의 말들이 서로 다른 색깔의 글씨로 쓰여진 것을 통해 보다 쉽게 누가 한 말인지를 가리는 것에도 편의는 있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그것들이 조악해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들어보니 시디, 엽서 등 책과 같이 주는 것들이 많았다고 하는데, 이젠 정말 책 한 권으로 승부를 보기엔 너무 힘든 시절이 왔나, 하는 아쉬운 기분이 많이 들었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종반부에 너무 통속소설처럼 흘러가던 사건의 진행과 서술 등은 너무 별로였다. 그 절정은 될 대로 되라,라는 감정밖에 느껴지지 않던 writer's cut에서 절정을 맞이하는데 이런 식의 결말을 대체 어쩌라는 건지 따져 묻고 싶다. 물론 생각해보면 삼미도 막판에 가서는 결국 모두 행복하게 블라블라, 식의 결말이긴 했으나 그것은 그 작품 자체가 그렇게 흘러가도 좋을 모습으로 굴러왔기 때문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 작품은 그렇게 마무리 했으면 안 됐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저 종반부가 너무 아쉬웠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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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브라이슨의 재밌는 세상
빌 브라이슨 지음, 강주헌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08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책 뒤쪽에 있던 찬양 일색의 서평이 떠오른다.(찬양 일색이지 않은 책이 어딨겠냐마는) 이 책은 빌 브라이슨 자신의 어렸을 적에 대해 쓰는 에세이인데, 그의 이 책을 읽고 많은 한국의 작가들 또한 자신의 어렸을 적을 떠올렸다고(이우일, 김려령 등) 말을 한다. 당시(194-50년대) 미국은 2차 대전의 피해를 입지도 않았었고, 미국이 가장 크게 성장하던 시기였던 만큼 부유했다. 사실 미국이고 뭐를 떠나서 그는 뭐랄까-보편적인 어린이의 삶에 대해서 쓴다. 그 자신의 지극히 개인적인 어린 시절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80년 중반에 태어나 자라온 나조차 공감이 갈 정도로 사람의 삶은 거기서 거기인가보다. 혹은 브라이슨의 글솜씨가 그토록 뛰어난 것일 수 있지만. 브라이슨 특유의 과장과 비유가 여지없이 발휘되는 책으로, 이런 문장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그의 책을 읽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너무 오래 전에 읽고 지금 독후감 쓰려니 글도 잘 안나오고, 내용도 병맛이다. 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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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으로 아는 것들
호어스트 에버스 지음, 김혜은 옮김 / 작가정신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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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전체적으로 전작과 비슷한 느낌의 에세이. 최근에 빌 브라이슨의 글을 읽다보니 그가 생각나서 도서관에 간 김에 있길래 빌려왔다. 우리는 조급해 하지 말고 느리게 걸어야 하며 사람 사는 곳은 다 거기서 거기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특별히 많은 이야깃거리를 주는 책은 아니다. 그의 전작(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지)이나 빌 브라이슨의 에세이, 에프라임 키숀 등의 책을 좋아한다면 읽으면 좋을 법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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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수집하는 노인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이현정 옮김 / 아고라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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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상당히 유명한 미국 현대 여류 소설가라고 하는데, 처음 들었다.

이 소설은 다섯 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각의 테마는 동일하다. 대문호, 그리고 죽음.

작품은 마크 트웨인, 어니스트 헤밍웨이, 헨리 제임스, 에드거 앨런 포, 에밀리 디킨스 등 다섯 사람의 유명한 작가들의 말년의 죽음을 둘러싼 이야기를 말한다. 물론 이 책은 평전이나 전기가 아닌 소설이지만, 실존했던 작가들을 다뤘기 때문에 단순한 허구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물론 이야기의 대부분은 허구이나 그 뼈대를 이루는 소재만큼은 실제 기록에 기반했다고 한다. 그런 덕분에 우리는 그 유명한 대문호들의 의외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며 (소설이란 것을 알고는 있지만)실제 그들의 마지막 모습이 그와 닮았을 것 같다는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지금 쓴 소개글은 무척 흥미로와 보이나, 그렇게 즐겁게 읽은 작품은 아니었다. 죽음에 대한 이야기여서 그런지 몰라도 작품 전체적으로 어둡고 습한 분위기를 풍기며, 다소 두서없고 혼란스러운 서술이 이어진다. 다소 실험적이고 새로운 형식의 진행도 많아 네러티브를 따라가기도 힘들고, 영미 문화권에서는 당연한 자가로 느껴질 그들이 나에게는 썩 가깝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 또한 이유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작품이었던 ‘에밀리 디킨스 레플리럭스’만큼은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다만 내가 재미없었다는 것은 분명히 취향이나 인내심의 문제였다고 생각한다. 매번 반복하는 말이지만 문화에 있어서는 보편적인 평판보다 개인적인 취향이 더 큰 영향을 주기 때문에 그렇다. 하지만 보편적인 관심의 영역에서는 분명 나쁘지 않은 작품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영미문학에 관심이 많고 인내심이 좋다면 읽어봐도 나쁘지 않을 작품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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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의 남자
폴 오스터 지음, 이종인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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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얼마 전에 유리의 도시(뉴욕 삼부작) 만화판을 보면서 뉴욕 삼부작을 보던 때가 떠올랐다. 소설가 퀸이 점점 자기를 잃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도 아주 흥미로웠지만, 역시 그 작품의 백미는 종반부의 골목신이었고 그때의 감동을 못잊어 오스터의 또 다른 작품을 빌렸다. 내 기억으론 뉴욕 삼부작을 보고 재미있어서 공중곡예사와 타자기를 치켜새움을 보았었다. 그리고 본 고독의 발명이 이상하게 너무 읽기 힘들어서 한동안 읽지 않다가 전역할 때 즈음에 후임의 환상의 책을 본 후 다시금 애정이 살아났었다. 전역하고 안 그래도 봐야지 봐야지 하다가 결국, 좀 얇아보이는 이 책을 빌린다.

오스터의 소설은 내면의 탐구를 빼놓고 생각하기 힘들다. 오스터의 분신들은 외부의 자극 혹은 어떠한 사건을 계기로 철저히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게 되는데 그 과정이 지극히 개인적이며 매력적이다. 이 작품에서의 주인공은 과거 퓰리처 상까지 받았던 칼럼과 에세이를 주로 쓰는 작가인데, 그는 노년에 삶에 대한 애정을 상당부분 잃게 된다. 이유는 살면서 겪은 여러 가지 풍파에 질린 것도 있겠지만, 결국 오랜 시절 함께 한 아내의 죽음이 결정적이었다. 거기에 더해 단 둘뿐인 딸과 손녀가 각각 이혼과 남자친구의 죽음으로 너무도 큰 고통을 받는 것을 보면서 그 또한 큰 아픔을 겪는다. 결국 딸은 아버지와 함께 살길 바란다고 말했고, 노작가는 그러기로 한다. 여러모로 생의 의지가 있던 시절에는 자신의 전기를 써봐야겠다는 생각까지 하지만 그런 일들로 인해 노작가는 글을 쓰는 행위 자체에도 질려버린다. 그러나 잠이 오지 않는 밤에 그는 잠들기 위해, 혹은 밤을 보내기 위해 이야기를 만들기 시작한다. 이 부분에서 오스터 특유의 사실과 허구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러나 교차적으로 진행되는 노작가와, 그가 만든 이야기는 결국 수렴되지는 않는다. 노작가의 이야기는 어설프게 종결되며 그는 결국 남은 자신과 딸과, 손녀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오스터의 소설은 물론 지극히 개인적이고 또 자기 탐구적이나 그렇다고 해서 자신에 갖혀 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내가 이해한 것에 따르면) 자신을 이해함으로써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 보다 나은 소통을 하려는 것이 아닐까. 종반부, 누구도 다른 사람보다 작은 상처를 가졌다 말할 수 없는 노작가와 딸과 손녀는 상처 입은 개처럼 서로의 상처를 핥는다. 서로의 상처를 과시하거나 하지 않는다. 오스터의 다른 소설을 조금 더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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