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겨울 나는
어땠나.
이젠 잊었다고 생각할 때쯤 찾아오는 무기력 상태, 온몸에 힘이 빠지고 곧 쓰러져 죽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몸, 몇 년에 한번씩 그랬는데도 매번 새로운. 얼마간 아프고 나서 이건 갱년기 증세다, 스스로 진단을 내렸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른 지금, 그건 과연 갱년기 증세였을까, 묻는다. 비슷한 증상, 특히 한국에 다니러 갔을 때 자주, 그랬다. 예전 한번은 초기공황이라고 생각했다. 더 폭넓게 불안장애라고 하자. 그렇게 혼자 명명하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다. 불안하게 만드는 모든 요소들, 불안해서 몸이 아픈 모든 증상들이 딱 들어맞게 설명되는 단어였다. 확실히 지난 겨울에는 호르몬에 이상이 생겼었다. 시기도 딱 맞다. 들쑥날쑥하던 월경을 한 달 내내 했다. 이렇게 명료한 증거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장애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내내 불안했기에. 불안이 아픔을 가져왔는지, 호르몬이 불안을 가져왔는지가, 중요할까.
잠깐, 어린 시절의 경험이 어떻게 사람을 형성하는가, 생각한다. 담대하지 못해서, 용기가 없어서, 고난과 역경을 헤쳐나갈 만한 꿈과 포부가 없어서, 나는 나를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했는데, 그것 역시 어린 시절 때문이라 말할 수 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불안은 나와 함께 했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것도, 학교를 다니는 것도, 집에 돌아가는 것도, 밤에 잠드는 것도, 꿈 속에서도, 항상. 내가 그렇지, 성격 어디 가나, 이런 식으로 나를 외면했던 시절이 길었다. 언젠가부터 내 감정, 내 생각, 내 몸을 이루고 있는 팔할이 불안이라는 생각이 들자, 많은 부분들이 이해되었다. 이해한다는 말은 그저 말 뿐이라 그것이 행동을 바꾸거나 생각을 변화시키지는 않는다. 정확히 무엇을 이해했는가, 하는 질문이 남는다. 아무도, 그것이 내 자신이라 하더라도 한 치 오차 없이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주관적 판단일 뿐. 그래도 이해되었다고 쓴다. 어쨌거나 납득은 되니까. 바깥에서 이유를 찾고 원망하다가 드디어 안으로, 안으로.
불안은 상상을 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일어난 상황을 가정한다. 상상은 불안을 낳는다. 무한 반복이다. 어떤 일이 일어나면 온갖 증거를 가지고 상황을 증폭시킨다. 눈빛 하나, 동작 하나, 말 한 마디에 엄청난 무게를 부여한다. 그것들은 모두 나를 구덩이에 파묻는다. 정확하게 보이는 것들은 정확하게 보여서, 그렇지 않은 것들은 그렇지 않아서, 괴롭다. 그러나 정확하게 보인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건 얼마나 정확할 수 있는가?
지난 겨울, 나는 불안했다.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이라고 하면 적절한 표현일까. 혹은 드러내고 싶은 마음 때문이라고 하면. 지금 이렇게 불안을 쓰는 이유는 어느 쪽일까. 어느 쪽이든 불안은 말과 행동과 생각을 잠식한다. 불안에 사로잡혀 있을 때 나는 하고 싶은 말, 하고 싶은 행동을 꺼내지 못하고 엉뚱해진다. 불안하다는 건 대상이 누구건 무엇이건 나를 대상 아래에 위치시키는 일이다. 나는 그 대상 앞에서 잃을 것이 있다. 그 대상이 두렵다. 그러므로 불안하다는 건 대상이 누구건 무엇이건 대상 아래에 위치시킨 나를 대상과 동등한 위치로 혹은 그 이상으로 끌어올리고 싶다는 욕심이다. 잃고 싶지 않아서, 두려워하지 않기 위하여. 그래서, 불안은 자주 실패한다. 실패함으로 일상을 지배한다. 불안한 이유를 어렴풋이 알면서 흘려보내지 못하는 마음이 다시 불안이 된다. 깨닫는 것으로 얼마나 나아질 수 있을지, 올 봄은 좀 환해질 지.
마당의 수선화 한 줄기를 꺾어다 갈색 맥주병에 꽂아 책상에 두었다. 봉오리는 하룻밤 사이에 만개한 꽃이 되었다. 집안 온도가 너무 높은가, 좀 천천히 피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 노란 꽃을 가까이서 들여다본다. 아름다운 대칭. 중심의 정확함. 나무랄 데 없이 선명한 색. 코를 스치는 향. 경이롭다. 그 생각을 하는 순간엔 불안하지 않다. 애석하게도 너무 짧은 순간. 때를 안다는 건 직관적 능력이다. 식물처럼,이라는 생각이 도움이 될까. 파묻힌 구덩이에서 새로운 싹을 올려보내고 그렇게 내린 뿌리로 구덩이가 가득 차는 날이 올까. 봄은 매번 오고 있는데. 매번 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