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좋지 않은 습관이 있다. 소설을 읽을 때면 앞으로 어찌 될런지가 너무도 궁금해서 글자를 하나하나 짚어보지 않고 휘뚜루마뚜루 지나간다. 묘사를 하는 부분은 통짜로 건너뛰기도 한다. 옛날에는 정말 그렇게 읽었다. 책을 많이 보는 편도 아니면서 좋아한다고 말하고 남들도 그렇다고 인정해줄 때 나는 책을 그런 식으로 읽었고 그래서 늘 기억이 흐릿했다. 한마디로, 헛읽었다고 하겠다. 요즘은 한 문장을 길게 읽으려고 노력한다. 그래도 이 못된 습관은 시도때도 없이 튀어나온다. <그레이스>를 읽을 때도 마찬가지여서 아마도 많은 문장들이 눈에서 머무르지 못하고 쌩 지나갔을 것이다. 


수많은 문장들 속에 유독 눈길을 잡아끄는 문장이 있다. 

"고칠 수 없으면 참아야 한다고." 

그레에스에게, 정말 그러냐고, 그래야 하냐고 묻고 싶었다. 나를 고치고 싶고 주변사람들을 고치고 싶다. 그럴 가능성이 1도 보이지 않으면, 그러면 그냥 참고 살아야 하냐고, 어디에 대고 물을 수도 없는 물음을 지른다. 그렇게 참고 사는 여자들이, 모두가 참고 있는 세상이, 너무 웃겨서 웃기지도 않다. 내 안의 다른 한편에서, 고칠 수 없는 것이 존재하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거기에 대항(?)하면 나만 나가떨어지는 거 아니냐고, 결국 도망치는 것밖에 없지 않냐고, 또 무슨 방법이 있겠느냐고. 맞서지 않고 참는 것처럼 보이면서 틈새를 공략하거나 우회하는 방법이 있기는 하지. 그러나 그런 방법들을 사용하면서 썩어들어가는 내 마음은, 솔직하게 문제를 짚어 말하지 못하는 답답한 내 마음은?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지도 않고 생각할 필요도 없이 사는 사람은 그냥 그렇게 두고? 이브가 저주받은 거라고 그렇게 퉁치면서? 


오래 전부터 소설을 좋아한다고 거리낌없이 말하곤 했다. 소설만 읽었었다. 이제는 소설 읽기가 힘들어진다. 소설을 좋아한다고 말하기가 어려워진다. 나는 그저 이야기 자체를 좋아했던 건가. 살아보지 못한 삶을 대신 본다는 만족감이었나. 지금 나는 소설에서 무엇을 보나. 무엇을 보기는 하는 건가. 소설을 읽고 좋다 좋지 않다를 쉽게 말할 수 없게 되었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소설은 무섭다. <시녀 이야기>를 읽으며 느꼈던 불안함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레이스>도 불안하다. 나는 왜 이 소설들이 불안하고 무서운 것일까? 








「사이먼은 기사를 읽는다.  


길이 이런 상황이건만, 안타깝기는 하나 죄를 저지른 한 인간이 고통스럽게 죽어 가는 광경을 목격하기 위해 이토록 많은 인파가 모이다니 그런 광경을 즐기는 병적인 취향이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런 광경을 공개하면 풍기가 개선되거나 파렴치한 범죄를 저지르고자 하는 성향이 억제될까? 


"저도 여기에 동의합니다." 사이먼이 말한다. 

"제가 만약 그 근처에 살았다면 가서 봤을 거예요." 리디아 양이 말한다. "선생님 같으면 안 그러겠어요?" 

사이먼은 이처럼 단도집입적인 발언에 충격을 받는다. 그는 불건전한 흥분을 유발하고, 지적 능력이 떨어지는 계층에게 잔인한 상상을 심어 주는 공개 처형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하지만 그는 자기 성격을 안다. 그의 호기심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양심의 가책을 이긴다. "직업상 그랬을지 모르죠." 그는 조심스럽게 대답한다. "하지만 여동생이 있었다면 가지 못하게 했을 겁니다." 

리디아 양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왜요?" 

"여성들은 그렇게 끔찍한 광경을 보면 안 됩니다." 그가 대답한다. "그러면 우아한 심성이 다칠 수 있으니까요." 그는 의식적으로 거드름을 피운다.」 (134~135)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항상 어릴수록 고분고분하다고 착각한다. 어머니가 정말 원하는 것은 사이먼이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며느리다. 

... 

가끔 그도 항복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어머니가 내민 어린 아가씨들 중에서 가장 돈이 많은 후보를 고르면 된다. 그러면 일상이 정연하게 이어질 테고, 먹을 만한 아침이 차려질 테고, 그는 아이들의 존경을 받을 것이다. 아이를 만드는 행위는 하얀 이불로 조심스럽게 가려진 채 은밀하게 진행되고 절대 입 밖으로 거론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는 싫어하면서도 의무적으로 응하고, 그는 정당하게 요구할 것이다. 집에는 온갖 문명의 이기가 갖춰질 테고, 그는 호강을 누리며 쉴 것이다. 그보다 못한 운명도 많다.」 (136~137) 



「저는 그때부터 여자들이 그런 깃발 같은 걸 만들어서 침대를 덮는 이유에 대해 생각했어요. 여자들은 원래 방 안에서 침대에 가장 신경을 쓰잖아요. 그러다 문득 깨달았어요. 경고의 의미라는 것을요. 선생님이 침대를 평화로운 곳으로 생각하신다면 그건 침대가 휴식과 편안함과 단잠의 상징이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죠. 침대에서 위험한 일들이 아주 많이 벌어지거든요. 침대는 우리가 태어나는 곳이니 우리가 인생 최초의 위기감을 맛보는 곳이죠. 여자들이 아이를 낳는 곳이니 종종 생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곳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선생님 앞에서 차마 말할 수 없는 남녀 간의 행위가 벌어지는 곳이기도 하죠. 선생님도 무얼 말하는지 아시겠지만, 누구는 그걸 사랑이라 하고, 누구는 절망이라 하고, 또 누구는 참아야 할 모욕일 뿐이라고 하죠. 그리고 마지막으로 침대는 우리가 잠을 자고, 꿈을 꾸고, 대개는 죽음을 맞이하는 곳이에요.」 (240) 



「메리가 너는 이제 여자가 된 거라고 말했을 때 저는 다시 눈물이 났어요. 메리는 저를 감싸 안고 다독여 주었어요. 늘 바쁘거나 지치거나 아팠던 우리 어머니라도 그렇게 다독여 주지는 못했을 거예요. 그러더니 제 것을 살 때까지 쓰라고 빨간색 플란넬 페티코트를 빌려 주면서 어떤 식으로 옷을 접어서 핀을 꽂으면 되는지 가르쳐 주고, 어떤 사람들은 이걸 이브의 저주라고 부르는데 자기가 보기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이브에게 주어진 진짜 저주는 무슨 문제가 생기자마자 그녀 탓으로 돌렸던 바보 같은 아담을 참고 견뎌야 했던 거라고 말했어요.」 (245) 



「그리고 2주 동안 모든 것이 매우 평온하게 흘러갔군요. 조던 박사님이 말한다. 내 진술서를 보고 하는 말이다. 

예, 맞아요. 내가 대답한다. 그럭저럭 별일 없었죠. 

그런데 모든 것이라는 게 뭘 말하는 건가요? 일상이 어떤 식으로 이어졌나요? 

네? 무슨 말씀이세요? 

날마다 어떤 일을 했느냐고요. 

아, 예전과 똑같았어요. 내가 말한다. 제가 해야 할 일들을 했죠. 

미안하지만 하나만 더 물어볼게요. 조던 박사님이 말한다. 해야 할 일들이 어떤 거였나요? 

나는 그를 쳐다본다. 그는 조그만 하얀색 네모가 그려진 노란 넥타이를 하고 있는데, 농담을 하는 게 아니다. 정말 모르는 거다. 그와 처지가 비슷한 남자들은 자기가 어지럽힌 것을 치우지 않아도 되지만, 우리는 우리가 어지럽힌 것뿐 아니라 그들이 어지럽힌 것까지 치워야 한다. 그런 점에서 보았을 때 그들은 어린아이와 같아서 앞날을 걱정하거나 저지른 일의 결과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그건 그들의 잘못이라기보다 그렇게 길러졌을 뿐이다.」 (316) 



「아침이고 일어나야 하는 시간이다. 오늘은 이야기를 계속해야 한다. 아니면 이야기가 그 안에 나를 싣고, 문을 꼭 닫은 채 기차처럼 울면서 무관심하게 한결같이 정해진 선로를 따라 끝까지 달려야 한다. 그러면 나는 그 벽에 몸을 던지며 비명을 지르고, 울음을 터뜨리고, 주님에게 내보내 달라고 애원한다. 

이야기 한가운데 자기 자신이 들어가 있으면 그건 이야기가 아니라 난장이다. 음울한 포효, 앞을 볼 수 없는 상황, 깨진 유리와 갈라진 나무의 잔해. 회오리바람에 휩쓸린 집 혹은 빙산에 부딪히거나 급류에 휩쓸려서 승선한 어느 누구도 어쩔 도리가 없는 배처럼. 그러고 난 다음에야 이것이 이야기 비슷하게 된다. 자기 자신이나 다른 누구에게 이것을 들려줄 때.」 (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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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1-04-03 1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매번 그렇진 않지만 특정 부분은 휘뚜루마뚜루 넘어가요ㅋㅋㅋㅋ워낙 훌륭한 책이 많으니 가끔은 괜찮은것도 같아요.😁

난티나무 2021-04-03 20:21   좋아요 1 | URL
아 미미님 반가워요!ㅎㅎㅎ 저는 워낙에 자주 넘어가서 정신 차리고 다시 읽는 때가 많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 읽히는 부분도 있더라고요. 하하~!!!

라로 2021-04-03 2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2. 😅😅😅 특히 불편한 얘기나 무서운, 잔인한, 등등 문장은 더욱요. 😰

난티나무 2021-04-03 20:24   좋아요 1 | URL
그렇죠. 문장과 이야기 자체가 무서울 때도 있어요. 그런데 이 마거릿 애트우드 소설에서 제가 느끼는 것은... 그것과는 조금 다른 것 같아요. 뭐라 설명하기 어렵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