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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된 농담
박완서 지음 / 실천문학사 / 200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쉽게 읽히는 재미나는 소설임에도... 읽고 난 후의 느낀 점을 쓰려고 하니 막막함이 앞선다. 어디부터 시작해야하는 걸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작가가 삶의 참 많은 부분을 건드리고 있었구나 싶다.
먼저 소설의 큰 축은...
영빈과 현금의 불륜, 송경호의 죽음과 그것을 둘러싼 송씨네 집안의 모습이 가장 큰 축이다. 대략의 줄거리는 그렇지만 내용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작가의 인생과 삶에 대한 깊은 눈을 느껴볼 수 있다.
먼저...
요즘은 너무나도 흔하디 흔한 불륜이라는 이야기. 하지만 이 소설에서 불륜이라는 단어는 조금 부적합하단 생각이 든다. 불륜이라기 보다는, 늘 정해진 길만을 걸어 온 그래서 조금은 지루하고 때론 허무감이 들 수도 있는 고지식하고 소심한 중년 남성의 일탈이라는 표현이 적합할 듯 싶다. 일탈... 얼마나 유혹적인 말인가..요즘은 직장생활이 고달프고 지겨워진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그래서인지 영빈의 허무함을 이해하기가 너무나 쉬웠다. 하지만 중년 남성의 일탈은 꼭 불륜이여야만 하는 것인지.. 여자의 입장에선 그리 달갑지 않은 거 같다.
영빈은 초등학생일 때,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떠난 현금이를 다시 만나 일탈을 시도한다. 이는 단순히 조강지처가 아닌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준다는 것을 넘어서서, 현금이와의 시간은... 책임을 벗어 던지는, 가장, 남편, 아버지로써의 모든 책임을 던져버릴 수 있는 자유의 시간이며 오로지 현금이의 남자로서의 역할만 하면 되는 그런 시간인 것이다. 그러고 보면 결혼이란 서로를 얼마나 옭아 메는 것인가? 연애를 하면 단순히 남자와 여자로 만나면 되는 것을, 결혼이란 문만 통과하면 단순하던 모든 것들이 복잡성을 띄게 되니...그렇다고 이 소설에서 결혼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마지막 부분에서 영빈의 형의 입을 빌려 작가는 가족의 소중함을 말하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가족이란 울타리가 외국에 비해 강하기 때문에 더욱 성공할 가망성이 많다고 말이다. 나도 동감한다. 아무리 지지고 볶아대더라도 가족이란 울타리가 얼마나 소중한지 아니까...
두번째 축은 송경호의 죽음과 그것을 둘러싼 송씨네 집안의 모습이다.
영빈의 여동생 영묘의 남편 송경호가 암에 걸리면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송씨네 집안 인물들을 살펴보면 자본주의의 왜곡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아들의 죽음, 장례식장에서도 캠코더를 통해 장례식이 얼마나 성대했는지 남겨줘야 한다고 믿는 송씨네의 모습은 찌그러진 자본주의의 단면을 보여주고, 어리석은 그들의 모습에 혀를 차게 만든다. 조금은 과장된 모습이겠찌만 우리의 일상에서도 돈으로 인한 어리석음이 얼마나 많던가... 돈이 전부인 양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 송씨 집안보다야 덜하겠지만 우리도 돈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지...
세번째...
나는 "아주 오래된 농담"이라는 제목이 의미하는 바를 알고 싶었다. 심각한 병에 걸려 있는 환자에게 자신의 병명을 알려줘야 하는지 주인공인 의사인 탓에 이에 대한 말이 많이 나온다.
자신의 죽음을 끝까지 모른 채 눈을 감아버린 송경호의 죽음과 자신의 병을 알고 자살을 택한 치킨 박의 죽음...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치킨 박의 죽음이 나오기 이전엔 자신의 죽음...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해 환자가 선택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솔직해져야 한다는 뜻인 줄 알았다. 하지만 치킨박의 죽음을 대하고서도... 그래야 하는건지 영빈 또한 회의감이 들었겠지.. 내가 헷갈렸듯이 말이다. 작가가 어떤 의도로 그런 얘기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영빈과 같은 생각이다. 자살이든 끝까지 병과 싸우다 죽든 우리에겐 우리의 인생을 선택할 권리가 있지 않을까 하는 영빈의 생각과 같은 입장이다.
소설 속에서..
현금은 영빈에게 농담을 권한다. 환자를 속이는 가족들에게 경멸을 느끼는 영빈에게 현금은 그것은 거짓말이 아닌, 그저 농담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어쩜... 자신의 병을 농담처럼 웃어 넘기며 이겨낸 현금의 친척 할머니처럼..
인생을 한순간 농담처럼 웃고 즐길 수 있는 사람만이 그것의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한번 왔다 가는 인생..죽음도 농담처럼 그렇게 웃으며 담담하게 받아들이라는 뜻일까?아니면..어떤 방법도 옳고 그른 건 없다고 말하는 걸까?
나는... 명줄은 타고난 거다..라는 결론을 내릴 뻔도 했다 ^^;;;
어쨌거나 나는 이 제목에 대해 몹시 궁금증을 느꼈고, 현재도 느끼고 있다. 하지만 답은 잘 모르겠다.
작가는 한바탕 재미난 이야기를 쏟아내었다. 그래서 쉴 새 없이 재미를 느끼며 책을 붙들고 있었다. 하지만 한마디로 말하기엔..너무나 힘든 책이다.
인생이 허무해지려 할 때...일탈이 느껴질 때 읽으면 좋을 책이 아닐까 싶다.
영빈의 심정에 대공감할 수 있을테니... 결국은 영빈처럼 제자리로 돌아오고 마는 것도 우리의 모습..그것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