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 - 너무 멀리 나간 교실 실험
토드 스트래서 지음, 김재희 옮김 / 이프(if) / 2006년 7월
평점 :
품절



1963년 미국 심리학자 스탠리 밀그램은 흥미로운 실험을 한다. 나치의 유태인 학살에 대한 연구 중에 ‘어떻게 인간이 그토록 잔인해질 수 있는가’를 고민하고 심리실험을 해보기로 한다. ‘징벌에 따른 학습효과’를 연구하기 위한 실험이라고 속이고 사람들을 모집한 뒤 학생이 답을 틀릴 때마다 치명적인 전기충격을 가하라고 명령했다. 고작 4불의 대가를 받는 실험이었는데 과연 몇 명의 사람들이 연구자의 말을 따랐을까? 바로 65퍼센트의 사람들. 그들은 권위 있는 연구자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는 생각에 괴롭지만 끝까지 버튼을 누른 것이다. 내가 만약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미국의 한 고등학교 역사 시간에도 비슷한 실험이 펼쳐진다. <파도-너무 멀리 나간 교실 실험>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가지고 소설로 다시 쓴 책이다.

역사 선생인 벤 로스는 아이들에게 나치들이 강제수용소에서 저지른 일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여주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학살된 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의 비참한 모습.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대부분의 독일 사람들은 나치의 만행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다고 주장했다. 아이들은 질문한다.

“어떻게 그 사람들은 그럴 수가 있나요?”

벤 로스는 나치 시대 독일인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아이들 몰래 아이들이 집단적 공포를 느낄 수 있는 실험을 해보기로 한다. 환상적인 실험이라고 부르지만 실험 과정은 매우 간단하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자주 보던 모습이다.

첫날, ‘훈련’을 통해 힘을 모으는 일로 시작한다. 기본 훈련은 바른 자세, 질문을 하거나 대답을 할 때는 손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반듯하게 서서 “로스 샘!”이라고 선생님을 부른 다음에 자기가 할 말을 한다. 이 간단한 훈련의 결과는 놀랍다. 평소 아이들에게 불가촉천민으로 불리던 왕따 로버트가 바른 자세로 앉아 수업시간에 칭찬을 받는다. 다른 아이들도 규칙에 따라 말하는 법을 익히려고 눈을 반짝이며 숨을 골랐다. 질문을 던지는 교사나 답을 말하는 학생들이나, 가벼운 연산 문제가 나열된 문제집을 풀면서 희열을 느끼는 것처럼 실험에 빠져든다.

다음 날, 벤 로스는 ‘공동체’ 개념을 보탠다. 자신들 집단에 ‘파도’라고 이름을 붙이고, 같이 구호를 외치고, 상징 그림을 만들고, 인사법을 정해 같이 인사를 한다. 실험 이틀 만에 아이들 반응이 무섭게 달라진다. 벤 로스도 자신의 손짓, 말 한 마디에 반응하는 아이들 모습에서 어떤 쾌감을 느꼈다.

세 번째 날, 벤 로스는 아이들에게 파도 회원증을 나눠준다. 그리고 공동체 사람들을 늘리는 ‘실천’을 배운다. 파도 회원들을 많이 확보하고, 파도의 규칙을 이해하고 복종해야 한다. 아이들은 같이 파도를 외치며 ‘생전 처음, 어디에 소속이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며 감동한다.

학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아니 훨씬 더 좋은 공동체가 되었다. 따돌림 당하는 아이도 없고, 이제 파도 회원이기만 하면, 파도 경례만 하면 식당에서 다 같이 둘러앉아 밥을 먹을 수 있다.

이때 단 한 사람 로리는 계속 마음이 찝찝하다. 뭔지 모르겠지만 이건 아닌 것 같은 느낌. 그러다 파도에 들지 않았다는 이유로 괴롭힘을 당했다는 편지 한 통이 로리가 일하는 학교 신문사로 온다. 학교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이제 파도는 살아 꿈틀거리기 시작해 아이들 하나하나 물결이 되어 움직이기 시작하고 아이들 힘이 모아져 점점 커진다. 파도 회원 수는 늘어가고 수업시간에는 질문이 떨어지기 무섭게 답이 나온다. 하지만 아이들은 답만 말할 뿐 의문을 품거나 자기 방식으로 문제를 분석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이때 이 수업이 문제가 있다고 느낀 한 사람, 로리가 있었다. 로리는 그냥 혼자 그 수업에 빠지는 게 아니라 같이 문제제기를 할 친구들을 모으고 자기 생각을 신문에 내고 벤 로스를 찾아가 따진다.

벤 로스는 이제 실험을 마무리할 시간이라고 느낀다. 아이들에게는 전국파도운동연합의 결성을 위해 모여야 한다고 알린다. 전국파도운동연합? 갑자기 미국의 고등학교에 왜 이런 조직이 필요한지도 모른 체 아이들은 지도자를 만나보고 싶어 했다.

두근두근한 시간……, 드디어 지도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건 바로 히틀러와 그에게 환호하는 젊은 나치였다. 아이들은 모두 혼란에 빠진다. 어떻게 사람들이 그럴 수 있냐고 질문했지만, 불과 며칠 사이에 모두들 나치를 묵인한 독일 사람들, 히틀러에 열광한 나치, 어쩌면 히틀러 자신까지 된 것이다. 다 지나버린 역사라고 했던 나치의 모습이 바로 나 자신이었던 것이다.

인간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 돈을 많이 줘서도, 자신의 목숨을 위협받지 않아도 내가 동의하는 막강한 권위 앞에서 내 머리로 생각하는 것을 쉽게 포기해버린다.

미국의 한 교실에서 ‘파도’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월드컵 때 붉은 악마의 모습과 겹쳐졌다. 또 어떻게 보면 회사의 기업이념을 배우기 위한 워크숍 모습과도 닮았다. 사이비 종교를 만드는 과정도 떠오른다. 하지만 이 모든 곳이 다 파시즘이 벌어지는 공간일까? 아니다. 그렇다면 파시즘이 벌어지는 공간과 아닌 곳의 차이는 어디에서 생기는 걸까?

작게는 가족, 학교, 직장, 크게는 나라, 세계까지 공동체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자기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 편안함을 느끼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때 공동체가 타인을 밀어내고,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공동체의 가치만을 주장한다면 그 안에는 히틀러가 싹트고 있는 것이다. 히틀러 혼자 악마라서 천만 명이 학살을 당한 것이 아니다. 그것에 적극적으로 동조하고 행동한 사람들, 그리고 그것을 묵인하고 외면한 사람들이 있었기에 벌어진 일이다.

스스로 생각하고, 차이가 있는 것을 배려하고, 다르다고 생각할수록 더 이야기를 많이 나누고, 차이가 있는 사람들과 더 관계를 만들어 가는 곳에서는 파시즘이 자리 잡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우리에게는 잘못된 일이 벌어졌을 때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고 그건 잘못된 일이다! 라고 자신의 목숨을 걸고 외친 역사적 경험이 있다. 용기, 타인의 고통을 같이 느끼고 나누는 힘, 배려, 소통 사랑 들이 모여 사람이 된다. 학살을 외면했던 경험에서, 학살에 당당히 맞서 싸운 경험에서 배우고 생각하고 깨달으며 사람들은 파도에 지지 않을 힘을 길러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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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가 훔쳐 간 옛이야기 개똥이네 만화방 9
하민석 글.그림 / 보리 / 2009년 5월
절판


(떡 먹기 내기)
"그럼 가장 나이 많은 놈이 혼자 다 먹기!
믿기 힘들겠지만, 난 이 산이랑 나이가 같다고. 나이 세는 거 까먹은 지도 옛날이야."
"그래? 그럼 나보다 어리네. 난 하느님이 이 산을 만들 때 흙 나르는 걸 도왔거든."
"아이고~~엉, 엉. 토끼야, 그럼 네가 내 아들 동무로구나. 내 아들도 흙을 나르다 벼랑에서 굴러 떨어져 죽었거든."
-70쪽

"그러지 말고 (떡을 누가 먹을지)누가 가장 술을 못 먹는지로 가리자!
나는 술 냄새만 맡아도 취해."
"난 밀밭에만 가도 취한다고."
갑자기 두꺼비가 쓰러졌어.
"왜 그래?"
"아휴, 너희가 술 얘기를 하니까 취해 버렸잖아 난 술 얘기만 들어도 취하거든."

-72-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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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선 2011-08-31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 이거 봤는데 재미 있었어요.

고은선 2011-08-31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짱~~~~~~~~~~~~~~재미있어~~~~~~~~~~~~~~~~~~~~~~~~~~~~~
 
그 섬에 내가 있었네 (양장) - 故 김영갑 선생 2주기 추모 특별 애장판
김영갑 지음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이번 여름 휴가를 제주도에서 보내고 온 친구가 권해준 책

《그 섬에 내가 있었네》

김영갑이라는 사진작가가 쓴 글과 사진이 들어있다. 여기가 정말 그 제주도인가 싶은 파노라마 사진들도 멋지지만 우선 글이 좋았다. 사실 되게 유명한 사람이었는데 이제야 알았네. 제주도를 가면 꼭 두모악 갤러리에 가야지. 아니 루게릭 병에 걸려 숟가락도 제대로 쥐지 못하는 몸 상태로 만든 두모악 갤러리에 가기 위해 제주도를 가야지.

책을 펼치고 읽은 글..

‘산다는 일이 싱거워지면 나는 들녘으로 바다로 나간다. 그래도 간이 맞지 않으면 섬 밖의 섬 마라도로 간다. 거기서 며칠이고 수평선을 바라본다. 마라도에선 수평선이 넘을 수 없는 철조망이다.

외로움 속에 며칠이고 나 자신을 내버려둔다. 그래도 모자라면 등대 밑 절벽 끝에 차려 자세로 선다. 아래는 30미터가 넘는 수직 절벽이고, 바닥은 절벽에서 떨어진 바위 조각들이 날카로운 이를 번뜩인다. 떨어지면 죽음이다. 정신이 바짝 든다. 잡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다. 불안과 두려움이 계속된다. 눈을 감고 수직 절벽을 인식하지 않는다. 마음이 편안하다. 수직 절벽임을 인식하면 다시 두려운 마음이 든다.’

*소리내서 읽어본다.
처음부터 끝까지 소리내서 읽고 싶은 책이다.
사진들은 바람...을 담은 사진이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두모악 갤러리 누리집에 들어가 봤다.
언론 보도를 보니 정말 2001년부터 관심을 받았다. 2001년에 루게릭병에 걸렸다.
많이 외로운 사람이지만 자유롭고 긍정적인 사람이다.

‘몸은 부자유스러워도 정신만은 자유롭다. 힘든 몸으로 사진 갤러리를 열었다는 얘기를 듣고 어떤 이는 눈물을 흘리고 어떤 이는 네 번 다섯 번 찾아온다. 그들은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몸이 허락하는 한 그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줄 생각이다. 건강할 때보다 더디고 힘이 들지만 그들이 찾아와준다면 나의 이야기는 계속될 것이다.

이십여 년 동안 모아둔 많은 이야기들을 이제 하나 둘 꺼낼 준비가 되었다. 매서운 겨울바람 속에 피어난 너도바람꽃처럼, 고통의 끝에서 무사히 봄을 맞을 수 있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 두려움 없이 나아갈 것이다. 한겨울 중에 움트는 봄의 기운을 나는 보았다. 자연의 품안에서 생활하는 동안 나는 온몸으로 보고 느꼈다. 자연의 오묘한 조화와 그 경이로움을.‘

*누리집에서 본 기사 속의 한 구절.

“폭풍 치는 밤에 망망대해에 떨어진 느낌이었어. 50년 내다보고 작업했는데 절반도 못 채우고 마감해야 한다는 데!”
“몸은 부자유스러워도 정신은 한없이 자유로워. 아마 아프지 않았다면 나는 여전히 오름 하나 이해하지 못하면서 조급해 하고 있을 거야.”
“운명이라 받아들이나요?”
“음, 기자 양반이나 나나 지금 이 순간 내일이 없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차이라면 당신의 내일이 올 가능성이 99%라면 내 것은 1%뿐이라는 거지. 그렇다면 나는 더 치열하게 살아야지.”

장애를 가진 내 육신이 보인다. 눈을 감으면 지평선과 수평선이 보인다.(중략)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있으면,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여행할 수 있어 좋다.(중략)20년 동안 오름 하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하나도 모르면서 두세 개 욕심을 부렸다. 중산간 오름 모두를 이해하고 아름다움을 사진으로 표현하겠다는 조급함에 허둥댔다. 침대에 누워 지내지 않았다면 그같은 과오를 범했을 것이다.’

*이 사람의 사진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많단다. 예술 작품을 작품 자체로 판단하는 것. 난 사실 그게 잘 안된다. 예술가의 삶과 떨어져서 잘 안 봐진다.
그래서 이 바람, 구름, 햇빛이 가득한 사진이 참 좋다. 내가 제주도 중산간 한 가운데 서 있는 것 같다.
www.dumoa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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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소년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
다케우치 마코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자전거 소년기(다케우치 마코토, 비채)

*가볍게 읽었다. 역시 자전거! 단순하고, 머릿속으로 이것저것 굴리다가 그냥 하고...별로 복잡하지 않은 주인공이 내 속에 있는 인물이랑 닮아서 더 편하게 읽었다.

8
떠날 때는 자전거로 간다. 어느새 그렇게 정해져 있었다.

10
잊을 리가 없다. 처음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되자마자 나는 무서운 체험을 한 것이다. 신이 나서 달리다가 내리막길로 들어서는 바람에, 가속이 붙어 서지도 못하고 쌩 달려 내려가 비탈 아랫집 산울타리에 처박혔다. 그때는 정말 죽는 줄 알았다.
그리고 그때 그 마당에 있던 것이 그 집 외아들 소타였고, 그때부터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그렇게 때문에 처음 자전거를 탄 즐거움도, 몸이 얼어붙는 공포도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한 친구가 다른 친구를 만난 이야기를 했다. 아주 어릴 때 산비탈을 내려와 고물상 같은 데가 있었는데 거기를 들어갔더니 그 애가 마당에 혼자 놀고 있었다고. 그냥 간단한 이야기인데 난 그 장면이 눈에 딱 그려진다. 사실 내 머릿속에서 과장되어서 푸른 비탈길을 달려서 내려오는 5살짜리랑 고물상 마당에 앉아 흙장난을 하던 꼬마를 생각나게 한다. 난 그 기억이 참 마음에 들어서 이따금은 내 기억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나는 쇼헤이처럼 부딪히는 성격은 아니지만 이 장면이 참 마음에 들어서 내 기억인양 굴 것 같다.

14
우리가 다닌 가제가오카 초등 학교에는 1학년은 도로에서 자전거를 타면 안 된다는 묘한 교칙이 있었다. 그 전까지 아무 문제없이 탔는데 초등학생이 된 순간 금지당한 것이다.

-세상에는 이런 게 너무 많다. 그런 걸 규칙을 배우는 거라고 하는데, 이따금씩 이해가 안 간다.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학교 밖은 대낮에 어떻게 흘러가는지 몰랐다. 교문과 담은 거대했다.

51
그러던 어느 날, 아사미는 길고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을 발견했다. 명백히 여자 머리카락인데 아사미 것은 아니었으니 당연히 내가 바람을 피웠다고 의심받았다. 게다가 사실이었으므로, 나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지 않을 수 없었다.

-생각해보면 바람이 별 거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이렇게 담담하게 아무렇지 않게 자기가 바람피운 사실을 쓴 게 재밌다. 뭐랄까, 바람 좀 폈다고 죽네사네 할 정도의 문제는 아닌 것같다. 어디까지나 남의 이야기일 때!

80
먼저 일어난 사람은 나였다. 자는 동안 뭔가 해야 한다는 생각이 점점 부풀어오른 탓인지 모른다.

86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고, 페달을 밟아 자기 세계를 넓혀간다는 기분이 들었다.
어렸을 때도 비슷한 생각을 했던 기억이 있다. 바다까지 자전거 타고 가자고 했을 때, 소타는 먼 곳까지 가면 거기까지가 자기 영역처럼 된다고 했다.

110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친구가 재미있어 보이는 놀이를 시작하면 신경이 쓰이는 법이다.

134
누군가의 마음을 이어받아 달리는 기분은 혼자일때와는 전혀 달랐다. 길을 잃어도 계속 달릴 수 있었던 것은 그 덕분이었다.

144
어떤 시점을 경계로 세계가 달라져 보이는 경험은 인생에 몇 번쯤 있을까.
나도 지금까지 그런 순간을 경험한 적이 몇 번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전거를 탔을 때에는 갑자기 세계가 넓어진 것 같았고, 새벽 바다에서 벌거숭이가 돼서 헤엄치던 때에는 파도와 바람과 하나가 된 느낌을 맛볼 수 있었다. 그 순간에 내 안의 뭔가가 달라지고 세계의 뭔가가 달라졌다. ...편지처럼 뭔가를 표현하는 행위도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다. ... 내가 쓴 글이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조금이나마 세계를 움직인 것 같은 기분조차 들었다.
잘 설명을 못 하겠지만, 그런 다양한 경험이 겹쳐서 내 아들을 자전거에 태워주고 싶다는 소망으로 이어졌다. 호쿠토가 바람을 가르고 달리는 기분을 맛보기를 원했고, 너른 세계로 나아가기를 원했다. 그 아이가 자기 힘으로 세계를 바꾸는 쾌감을 알기를 원했다.

185
어른이 된 지금도 가끔씩 마음 속에 바람이 부는 느낌이 되살아난다. 잘 숙고해서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있듯이, 바람에 몸을 맡겨야 할 때도 있다고 생각한다. 가정이 있으니 무모한 짓을 하면 안 되는 것이 정론이겠지만, 가족 덕분에 모험에 나설 수 있다면 그만큼 고마운 일도 없을 것이다.
..자전거는 자기 힘으로 바람이 될 수 있는 탈것이다. 그리고 가족과 친구들은 바람이 되는 기쁨을 다시금 가르쳐준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오늘도, 내일도 자전거로 달려 나간다.

218
자전거를 타면 왜 기분이 좋을까.
어린아이와 오래 같이 있다 보면 그런 근본적인 의문을 생각해보는 버릇이 생긴다. 없는 지혜를 쥐어짜 글을 쓴다는 작업을 매일 계속하다 보면 더욱 그렇다. ...
바람처럼 될 수 있으면 왜 기분이 좋을까. ...자기 몸을 써서 속도를 높여가는 느낌은 자전거가 아니면 느낄 수 없다. 몸을 움직인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기분 좋은 일이니, 자기 힘만으로 달리는 자전거는 역시 격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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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 톰의 정원에서 시공주니어 문고 3단계 14
필리파 피어스 지음, 수잔 아인칙 그림, 김석희 옮김 / 시공주니어 / 1999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한밤중 톰의 정원에서

44

“신경쓰지 마라, 톰. 이모부는 옳고 그른 것에 유난히 민감한 분이란다. 이모부 자신도 그렇게 말하고 있지. 너도 자라면 그렇게 될 거야.”

그웬 이모가 말했다.

난 지금도 그래요!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안 그렇다구요!

톰이 발끈해서 외쳤다.

톰은 앨런 이모부를 제쳐놓고 그웬 이모만 괴롭힐 생각은 없었다.

그건 신사적인 행동이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너그러운 결심은 조금만 압력을 받아도 쉽게 무너지는 법이다. 게다가 상대편이 짜증스럽게 굴면 그런 결심은 깨끗이 사라져 버린다. 그런데 지금 톰은 몹시 짜증이 났다. 정말 억울한 기분이었다. 나는 잘못한 게 하나도 없는데, 이모랑 이모부 때문에 무슨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듯한 기분이 들잖아.

-어렸을 때 도덕심에 더 충실한 것 같다. 나만 봐도 그렇고.




55

밤과 낮 사이에는 풍경이 잠드는 시간이 있다. 가장 먼저 일어나는 사람만이 그 시간을 볼 수 있다. 또는 밤새 여행하는 나그네가 객차 창문의 블라인드를 올리고 밖을 내다보면, 쏜살같이 지나가는 정지된 풍경을 보게 될 것이다. 나무와 덤불과 식물들은 모두 잠들어, 꼼짝도 하지 않고 숨을 죽인 채 조용히 서 있다. 나그네가 간밤에 외투나 담요로 몸을 감쌌듯이, 바깥 풍경은 잠에 감싸여 있다.

톰이 정원으로 나간 것은 아침이 오기 전의 이 고요한 잿빛 시간이었다. 톰은 분명히 자정에 층계를 내려와 현관을 지나서 뒷문으로 갔다. 그런데 톰이 그 문을 열고 정원으로 나갔을 때는 자정이 훨씬 지난 시간이었다. 휘영청 달 밝은 밤이든, 깊은 어둠에 싸인 밤이든, 정원은 밤새도록 깨어 있었다. 그렇게 밤새 불침번을 서고 나서, 이제 정원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새벽이나 밤은 남들이, 다른 풍경이 다 잠들어있어...꼭 내 것 같은 시간이라 놓쳐버리기가 아깝다. 아이들이 자기 싫어하는 것이나 일찍 일어나서 놀고 싶어 하는 것도 그 시간이겠지.




147

해티와 다툰 날 오후, 톰은 해티가 따지고 드는 투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물론 톰은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해티는 소녀답게 옷차림에 민감해서, 톰과 말다툼을 할 때 옷차림새를 무기로 이용했다. 톰은 자기도 그런 관찰력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톰은 정원에서 만난 사람들의 모습도 그저 어렴풋이 기억할 수 있을 뿐이었다.

-‘아이의 사생활’에 나온 것처럼 남녀 아이들의 차이가 드러나는 장면.




170

피터는 꿈을 꾸고 있는 모양이었다. 잠을 자면서도 얼굴 표정이 변했기 때문이다. 미소를 짓다가, 금세 한숨을 쉬기도 했다. 한번은 넋이 나간 듯이 보여서, 롱 부인은 아득히 먼 곳에 가 있는 피터를 이곳으로 다시 불러 오고 싶었다.

-꿈을 꾸고 있는 아이. 어렸을 때 읽은 책에서 아이들은 꿈을 안 꾸고 어른이 되면서 꿈을 꾼다는 말이 있어서 그 말이 날 너무 가뒀다. 아무래도 틀린 것 같다. 아이들이 꿈을 안 꾸다니....틀린 말임에 분명.




236

톰은 문득, 그 시계를 처음에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중에는 크게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던 그날 밤, 오래 전 그날 밤의 일이 생각났다. 그때 시계를 보고 톰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뒷문까지 갔다가 다시 이층으로 올라오는 데는 몇 분이 걸렸지만, 정원을 돌아다니는 동안에는 시간이 전혀 흐르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정원에서 아무리 오랜 시간을 지내도 부엌 시계는 그 시간을 전혀 헤아리지 않았다....아마도 그것이 괘종시계가 열세 시를 치는 의미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열두 시 이후의 시간들은 통상적인 시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시간, 통상적인 시간의 법칙에 얽매이지 않는 시간, 통상적인 60분 안에 끝나지 않는 시간, 끝이 없는 시간이었다.

-시간에 대한 고민...어떤 순간이 영원같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 시간이 일직선으로만 흐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 그게 어른이 되는 것인가. 하지만 어렸을 때 그런 기억이 더 많다.




266

달각거리는 말발굽 소리를 뚫고 해티와 바티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톰은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았지만, 그건 어른들의 대화여서 재미가 조금도 없었다. 게다가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도 모두 따분한 것들뿐이었다...아니면 해티가 이제는 자기를 조금도 생각해 주지 않는다는 야릇한 느낌 때문에 깨어서 활동하고 있다는 기분이 별로 들지 않은 탓인지도 모른다.




289

“내 나이쯤 되면 누구나 대부분의 시간을 과거 속에서 보내게 된단다. 과거를 추억하기도 하고, 과거를 꿈꾸기도 하면서…….”

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정원에서는 왜 날씨가 항상 화창했는지, ‘시간’이 왜 앞뒤로 왔다갔다했는지, 그 이유도 이제는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지난 몇 주 동안 밤마다 정원이 나타난 게 꼭 바솔로뮤 부인 때문만은 아니었다. 부인이 정원을 그토록 자주 꿈꾼 것은 올 여름이 처음이라고, 어린 시절의 느낌, 함께 놀 친구와 장소를 애타게 찾던 그 기분을 그토록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었던 것도 올 여름이 처음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제가 올 여름에 여기 와서 간절히 바란 것도 바로 함께 놀 친구와 장소였어요.”




295

“톰이 미친 듯이 뛰어올라가더니, 둘이 얼싸안지 뭐예요. 오늘 아침에 처음 만난 사이가 아니라, 오랫동안 사귄 친구 같더라니까요. 그보다 더 신기한 일도 있었다구요. 당신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하겠지만…… 바솔로뮤 부인이 꼬부랑 할머니이긴 하지만, 몸집이 톰과 비슷하잖아요. 그런데 톰이 바솔로뮤 부인을 조그만 소녀라도 되는 것처럼 두 팔로 껴안으며 작별 인사를 하더라구요.”




*홍역을 피해 이모집으로 갔다.

이모집은 같이 놀 친구도 없고, 멋진 정원도 없는 심심한 곳.

현관에 있는 낡은 괘종시계는 종을 멋대로 치고 밤 12시가 넘은 어떤 시간에 열세번 종을 친다.

어느 날 밤 시계 종소리를 듣고 뒷마당으로 나간 톰은 멋진 정원을 발견.

거기서 해티라는 꼬마애랑 친구가 되고, 넓은 정원에서 마음껏 뛰어논다.

톰의 존재를 아는 아벨...이게 실제인지 꿈인지 불안하고 긴장감이 든다.

해티가 넣어놓은 스케이트가 실제 톰에게 전해지는 장면. 아, 이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

바솔로뮤 부인 꿈-오래전 행복했던 정원에서 논 기억.

톰 꿈-놀 친구와 장소가 필요해.

피터 꿈-나도 형이랑 같이 정원에 가고 싶어.

이 세 사람의 꿈이 만나려면 여기는 꿈 속. 그러면서 현실과 선은 이어져있다.

재미있게 읽었다. 중간중간 이야기가 어떻게 풀릴지 긴장.

정원....숲이라고 해도 될만한 정원에 대한 묘사가 아이들이 자연에서 노는 게 얼마나 신나는 일인지를 보여줬다. 아무런 도구가 없어도 자기들이 스스로 만들어 내어 몇 시간이고 빠져들 수 있는 무수한 놀이. 그리고 상상의 세계. 참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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