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파도 - 너무 멀리 나간 교실 실험
토드 스트래서 지음, 김재희 옮김 / 이프(if) / 2006년 7월
평점 :
품절
1963년 미국 심리학자 스탠리 밀그램은 흥미로운 실험을 한다. 나치의 유태인 학살에 대한 연구 중에 ‘어떻게 인간이 그토록 잔인해질 수 있는가’를 고민하고 심리실험을 해보기로 한다. ‘징벌에 따른 학습효과’를 연구하기 위한 실험이라고 속이고 사람들을 모집한 뒤 학생이 답을 틀릴 때마다 치명적인 전기충격을 가하라고 명령했다. 고작 4불의 대가를 받는 실험이었는데 과연 몇 명의 사람들이 연구자의 말을 따랐을까? 바로 65퍼센트의 사람들. 그들은 권위 있는 연구자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는 생각에 괴롭지만 끝까지 버튼을 누른 것이다. 내가 만약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미국의 한 고등학교 역사 시간에도 비슷한 실험이 펼쳐진다. <파도-너무 멀리 나간 교실 실험>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가지고 소설로 다시 쓴 책이다.
역사 선생인 벤 로스는 아이들에게 나치들이 강제수용소에서 저지른 일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여주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학살된 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의 비참한 모습.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대부분의 독일 사람들은 나치의 만행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다고 주장했다. 아이들은 질문한다.
“어떻게 그 사람들은 그럴 수가 있나요?”
벤 로스는 나치 시대 독일인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아이들 몰래 아이들이 집단적 공포를 느낄 수 있는 실험을 해보기로 한다. 환상적인 실험이라고 부르지만 실험 과정은 매우 간단하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자주 보던 모습이다.
첫날, ‘훈련’을 통해 힘을 모으는 일로 시작한다. 기본 훈련은 바른 자세, 질문을 하거나 대답을 할 때는 손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반듯하게 서서 “로스 샘!”이라고 선생님을 부른 다음에 자기가 할 말을 한다. 이 간단한 훈련의 결과는 놀랍다. 평소 아이들에게 불가촉천민으로 불리던 왕따 로버트가 바른 자세로 앉아 수업시간에 칭찬을 받는다. 다른 아이들도 규칙에 따라 말하는 법을 익히려고 눈을 반짝이며 숨을 골랐다. 질문을 던지는 교사나 답을 말하는 학생들이나, 가벼운 연산 문제가 나열된 문제집을 풀면서 희열을 느끼는 것처럼 실험에 빠져든다.
다음 날, 벤 로스는 ‘공동체’ 개념을 보탠다. 자신들 집단에 ‘파도’라고 이름을 붙이고, 같이 구호를 외치고, 상징 그림을 만들고, 인사법을 정해 같이 인사를 한다. 실험 이틀 만에 아이들 반응이 무섭게 달라진다. 벤 로스도 자신의 손짓, 말 한 마디에 반응하는 아이들 모습에서 어떤 쾌감을 느꼈다.
세 번째 날, 벤 로스는 아이들에게 파도 회원증을 나눠준다. 그리고 공동체 사람들을 늘리는 ‘실천’을 배운다. 파도 회원들을 많이 확보하고, 파도의 규칙을 이해하고 복종해야 한다. 아이들은 같이 파도를 외치며 ‘생전 처음, 어디에 소속이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며 감동한다.
학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아니 훨씬 더 좋은 공동체가 되었다. 따돌림 당하는 아이도 없고, 이제 파도 회원이기만 하면, 파도 경례만 하면 식당에서 다 같이 둘러앉아 밥을 먹을 수 있다.
이때 단 한 사람 로리는 계속 마음이 찝찝하다. 뭔지 모르겠지만 이건 아닌 것 같은 느낌. 그러다 파도에 들지 않았다는 이유로 괴롭힘을 당했다는 편지 한 통이 로리가 일하는 학교 신문사로 온다. 학교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이제 파도는 살아 꿈틀거리기 시작해 아이들 하나하나 물결이 되어 움직이기 시작하고 아이들 힘이 모아져 점점 커진다. 파도 회원 수는 늘어가고 수업시간에는 질문이 떨어지기 무섭게 답이 나온다. 하지만 아이들은 답만 말할 뿐 의문을 품거나 자기 방식으로 문제를 분석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이때 이 수업이 문제가 있다고 느낀 한 사람, 로리가 있었다. 로리는 그냥 혼자 그 수업에 빠지는 게 아니라 같이 문제제기를 할 친구들을 모으고 자기 생각을 신문에 내고 벤 로스를 찾아가 따진다.
벤 로스는 이제 실험을 마무리할 시간이라고 느낀다. 아이들에게는 전국파도운동연합의 결성을 위해 모여야 한다고 알린다. 전국파도운동연합? 갑자기 미국의 고등학교에 왜 이런 조직이 필요한지도 모른 체 아이들은 지도자를 만나보고 싶어 했다.
두근두근한 시간……, 드디어 지도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건 바로 히틀러와 그에게 환호하는 젊은 나치였다. 아이들은 모두 혼란에 빠진다. 어떻게 사람들이 그럴 수 있냐고 질문했지만, 불과 며칠 사이에 모두들 나치를 묵인한 독일 사람들, 히틀러에 열광한 나치, 어쩌면 히틀러 자신까지 된 것이다. 다 지나버린 역사라고 했던 나치의 모습이 바로 나 자신이었던 것이다.
인간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 돈을 많이 줘서도, 자신의 목숨을 위협받지 않아도 내가 동의하는 막강한 권위 앞에서 내 머리로 생각하는 것을 쉽게 포기해버린다.
미국의 한 교실에서 ‘파도’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월드컵 때 붉은 악마의 모습과 겹쳐졌다. 또 어떻게 보면 회사의 기업이념을 배우기 위한 워크숍 모습과도 닮았다. 사이비 종교를 만드는 과정도 떠오른다. 하지만 이 모든 곳이 다 파시즘이 벌어지는 공간일까? 아니다. 그렇다면 파시즘이 벌어지는 공간과 아닌 곳의 차이는 어디에서 생기는 걸까?
작게는 가족, 학교, 직장, 크게는 나라, 세계까지 공동체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자기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 편안함을 느끼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때 공동체가 타인을 밀어내고,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공동체의 가치만을 주장한다면 그 안에는 히틀러가 싹트고 있는 것이다. 히틀러 혼자 악마라서 천만 명이 학살을 당한 것이 아니다. 그것에 적극적으로 동조하고 행동한 사람들, 그리고 그것을 묵인하고 외면한 사람들이 있었기에 벌어진 일이다.
스스로 생각하고, 차이가 있는 것을 배려하고, 다르다고 생각할수록 더 이야기를 많이 나누고, 차이가 있는 사람들과 더 관계를 만들어 가는 곳에서는 파시즘이 자리 잡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우리에게는 잘못된 일이 벌어졌을 때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고 그건 잘못된 일이다! 라고 자신의 목숨을 걸고 외친 역사적 경험이 있다. 용기, 타인의 고통을 같이 느끼고 나누는 힘, 배려, 소통 사랑 들이 모여 사람이 된다. 학살을 외면했던 경험에서, 학살에 당당히 맞서 싸운 경험에서 배우고 생각하고 깨달으며 사람들은 파도에 지지 않을 힘을 길러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