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공사에서 나온 로버트 하인라인 선집 가운데 아직 구하지 못해 아쉬웠던 <프라이데이>를 운 좋게도 알라딘 우주점에서 구입해 주말에 받아보았다. 이미 구입한 다른 네 권을 꺼내서 나란히 진열하려다 보니, 이참에 <여름으로 가는 문>은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다 싶어서 일단 밖으로 빼놓았다.
아주 오래 전에 고려원 판본으로 처음 읽었고, 나중에 나온 (표지가 영 꼴불견이라 생각되는) 곤조 판본도 사다 놓았지만 아직 읽지 않은 차였다. 곤조 판본의 공역자 가운데 한 명의 이름이 새로 나온 시공사 판본의 번역자로 올라와 있던데, 결국 예전 번역을 손질해 재활용했다는 이야기인가 싶다.
이 작품을 지금 와서 새삼 다시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은 시공사 판본에 들어 있는 역자후기에서 상당히 의아한 구절을 하나 발견했기 때문이다. "댄[주인공]이 겪는 로맨스의 세부 내용을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여성혐오와 소아성애의 흔적이 꽤 있다."(323쪽)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
내가 기억하는 줄거리로는 딱히 이상하다 할 만한 내용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는 고발이었다. 천재 공학자인 주인공은 애인과 동업자에게 배신당해 강제로 냉동인간이 되어 30년 후에 깨어나고, 우여곡절 끝에 빼앗긴 재산을 되찾고 이제 성인이 된 동업자의 의붓딸과 결혼한다.
그렇다면 번역자의 비난은 십중팔구 주인공이 딸뻘인 여자와 결혼했다는 것, 즉 서두에서는 12세였던 소녀가 결말에서는 20세의 성인이 되어 30세의 주인공을 다시 만난다는 것을 겨냥한 듯한데, 이건 비슷한 소재의 다른 작품처럼 나이차를 시간여행으로 극복한 것이니, 뭔가 과도한 트집 같다.
그래서 혹시 주인공이 12세 소녀를 보며 성적 매력을 느끼는 노골적인 묘사가 작품에 나오나 싶어 살펴보니, 막상 그런 대목까지는 없었다. 12세 소녀와 (심지어 그녀가 먼저 청혼해서!) 결혼을 약속하는 대목도 미래에서 20세의 모습을 보고 마음을 굳힌 채 돌아온 다음의 일이니 이상하지 않다.
주인공이 6세 때의 소녀를 '애인'이라고 부르고 '결혼 약속'까지 했다는 대목도 나오지만, 문맥상 생모를 잃고 의붓아버지와 사는 외로운 아이와 친근하게 장난을 치며 한 농담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게다가 어린아이가 멋모르고 아빠나 오빠를 결혼 상대로 지목하는 일은 현실에서도 흔하니까.
여하간 나귀님이 보기에 번역자의 주장처럼 <여름으로 가는 문>에서 소아성애의 징후를 발견한다는 것은 지나친 과장, 또는 트집일 수밖에 없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나이와 종족 등의 큰 차이를 초자연적 능력으로 극복하는 것은 <도깨비>나 <별에서 온 그대>에서도 나왔던 장치였으니 말이다.
굳이 문학 작품 속의 소아성애를 가지고 논란을 만들고 싶다면 차라리 가르시아마르케스의 <백 년의 고독>에서 아우렐리아노가 초경도 치르기 전의 소녀 레메디오스를 아내로 삼았던 것을 물고 늘어지는 게 낫지 않을까. 마침 조만간 넷플릭스에서 드라마로도 제작해 방영할 예정이라 하니까.
여성혐오라는 비난도 마찬가지인데, 이 책에서 주인공의 견해가 영 불편한 사람이라면 아마 기독교의 성서라든지, 호메로스나 플라톤의 작품처럼 노골적으로 여성을 하대하고, 외국인 혐오를 당연시하고, 심지어 노예제까지 긍정한 책들이 버젓이 유통된다는 사실에 경악하고도 남을 것 같다.
하지만 성서나 호메로스나 플라톤이 지금까지도 고전으로 평가되는 이유는 여성 폄하나 외국인 혐오나 노예제 긍정 같은 단점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다른 장점 때문이 아닐까? 마찬가지 맥락에서 <여름으로 가는 문>이 지금도 명작으로 손꼽히는 이유 역시 뭔가 다른 장점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오늘날의 잣대로 과거의 작품을 재단하는 것이야말로 무의미한 일일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사소한 잘못으로 교사에게 가혹한 체벌을 당한 톰 소여는 아동 학대의 피해자일까? 평소에 담배를 즐겨 피우고 심지어 동네 아이들의 삥을 뜯고 일까지 시켰으니 세인트피터스버그의 일진일까?
번역자의 태도도 이상하다. 그토록 영 불편하게 느낀 책이라면 왜 굳이 번역을 맡았느냐고 반문하고 싶다. 게다가 개인의 생각을 굳이 역자후기에 밝힌 것은 지나치게 무례하지 않은가? 만약 고양이 싫어하는 번역자가 '고양이를 등장시킨 것이 영 불편했다'고 썼다면, 그건 정당하다고 봐야 할까?
번역자의 역할은 저자와 독자 사이를 중개하는 것이며, 이 과정에서 부득이한 개입이 필요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번 책의 경우처럼 저자와 독자를 이간질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시간여행이라는 장르의 클리셰조차 이해하지 못해 나온 오해라면 더욱 곤란하지 않겠나.
번역자의 태도가 더욱 괘씸한 까닭은 사실 번역 자체가 좋지도 않기 때문이다. 당장 첫 페이지에서 주인공이 자기 집을 소개하면서 "바깥으로 나가려면 문을 열한 개나 거쳐야 한다는 게 결점이기는 했다. 피트[고양이]가 드나드는 문까지 헤아리면 열두 개지"(9쪽)라고 오역한 대목이 그렇다.
이건 상식적으로도 말이 안 된다. 무슨 교도소도 아닌데 집 한 번 드나드는 데 문을 열한 개인지 열두 개씩 지나가야 한다는 걸까? 원문을 대조하니 이건 결국 '밖으로 나가는 문이 열한 개. 고양이 문까지 열두 개였다'라는 뜻이었다. 아마 현관문, 뒷문, 베란다문, 창문까지 다 합친 게 아닐까.
이건 제목의 유래인 고양이의 행동을 묘사한 구절만 봐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있다. 즉 겨울이 되어 바깥에 눈이 쌓이면 고양이가 자기 문으로 나가려 하지 않고, '네가 쓰는 문을 열어보라옹, 닝겐!' 하면서 보챈다는 뜻이다. 즉 다른 열한 개의 문 중에서 '여름으로 가는 문'을 찾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주인이 하나하나 열어서 보여준 다른 열한 개의 문 바깥에도 여름 대신 겨울만 온통 펼쳐져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면, 그제야 못마땅하다는 듯 투덜대며 고양이 문으로 혼자 나가서 용변을 해결하고 돌아와 얼음을 털고는 한동안 삐진 채 주인 곁으로 다가오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웃기는 점은 같은 번역자의 곤조 구판에서도 똑같은 오역이 등장하고, 심지어 더 먼저 나온 다른 번역자의 고려원 판본에서도 똑같은 오역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곤조 구판은 표지도 영 무성의하게 만들어서 못마땅했었는데 번역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다행히 아작 신판은 제대로 옮겼다).
이것 외에도 문맥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해 딴소리를 하는 문장도 여럿 눈에 띄었으니, 저자를 겨냥한 무의미한 비판을 내놓을 시간에 자기 문장이나 다시 한 번 살펴보지 그랬느냐는 핀잔을 받아도 할 말이 없을 법하다. 여하간 곤조 판본과 시공사 판본 모두 절판된 것이 차라리 다행인가 싶다.
[*] 고약한 점은 시공사 판본이 선집의 일부이기 때문에 이제 와서 버리기도 곤란하다는 것이다. 하라는 번역은 제대로 안 하고 공연한 시비만 걸어서 멀쩡한 책을 버려 놓았으니 한심한 일이다. 고려원 판본도 시리즈의 일부이기 때문에 버리기가 곤란한데, 이제 와서 원문과 대조해 보니 군데군데 부연 설명을 빼버리기도 해서 완역본까지는 아니었다. 가장 최근의 아작 판본도 번역은 무난하지만 역주에 오류가 있다. 고양이 이름의 유래인 고대 로마인을 설명하면서 네로 황제의 "법정 조신"이었다고 서술한 대목이 그런데, 십중팔구 "궁정"(court)을 "법정"(court)으로 오해한 까닭인 것으로 보인다. 이건 출판사에서 잡아냈어야 하는 오류인데, 아작이야 원래 편집 실력이 형편없는 곳이니 애초에 무리이지 않았을까. 여하간 예나 지금이나 이놈의 나라에서 장르 독자로 살아가기는 참으로 고달프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 사실 로버트 하인라인으로 말하자면 성 문제에 대해서 개방적이다 못해 급진적이기까지 한 견해를 표명한 인물로 유명하며, 일부 작품에서는 근친상간까지도 묘사해서 논란이 된 바 있다. 하지만 그는 성 문제뿐만 아니라 정치나 종교에 대해서도 남다른 견해를 제시했던 인물임을 감안해 보면, 전체적인 맥락을 무시한 채 지엽적인 묘사만 가지고 소아성애자니 여성혐오자라는 비난을 가하는 것은 부당해 보인다. 한편으로는 과거 '빨갱이'나 '무신론자'라는 비난이 무분별하게 적용되었던 것만큼, 지금은 '소아성애자'나 '여성혐오자'라는 비난이 똑같이 적용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즉 이름만 달라졌지 우상은 그대로인 셈이다. 비난을 하더라도 아무렇게나 남발할 것이 아니라, 진짜 필요한 곳에다가 할 수 있도록 제발 좀 생각들을 하고 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