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행관람차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7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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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상은 단 하나.

애도할 상대도, 책망할 상대도, 위로할 상대도

전부 가족이라는 사실. 그뿐이다.  p.326

  

 


 

 나름의 독립을 선언하지도, 벌써 삼년째다. 골목마다 즐비했던 주택단지에서 벗어나 복도식 아파트로 거주지를 옮기면서 소박하긴 하지만 꿈꿔본 적 없던 '내 집'을 갖게 되었다. 더 이상은, 부모님의 소소한 간섭에서 벗어났다 생각하여 기뻤고 그런 부모님에게서 멀어진다는 생각에 슬프기도 했다.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가족에 관해서는 더욱이나 내 부모님에 관해서는 나는 좀 각별하다. 어릴때부터 그러했지만, 지금도 내 부모님은 불로장생 할 운명이라 생각하고 있다. 스치는 바람 한 점도 절대적으로 내 부모, 가족을 다치게 할 수 없다. 설사, 미나토 가나에게 풀어 낸 이번 작품 「야행관람차」의 사건의 당사자가 내 부모의 일일지언정. 어디까지나 내 부모, 내 가족의 문제일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아무리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시대에 발을 딛고 살아간다 한 들, 시대와 개개인의 가족은 별개다. 가족이라는 틀 안에 엉글어진 사이가 아니라면 모두가 타인일 뿐 제 2,3의 단체에서 조차도 끌어안을 수 없다면 모른체 살아가면 그만인것이다.

 

 장르소설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미나토 가나에의 「속죄」를 읽고서부터다. 연이어 그녀의 작품인 「고백」을 읽고 뒤이어 「소녀」도 구입했지만, 책장에 고스란히 꽂혀 있을 뿐 읽지 못한 채로 이번 작품 「야행관람차」를 먼저 읽었다. 그녀의 신간이라는 점도 한 몫했지만 간헐적인 문학 슬럼프도 요즘들어 심해진 탓이다. 전작들도 그러했지만 이번에도 '아이들'이 사건의 중심에 서 있다. 엔도 가족의 버르장머리없는 히스테리 소녀 아야카와 다카하시 가족의 노력파 모범생 신지, 유명한 시립고에 다니는 히나코가 그들이다. 평범하고 조용했던 다카하시 가족의 주택에서 새어나오던 신지의 고함소리와 신지의 부모인 준코의 비명에 가까운 절규가 터져나오면서 사건은 시작된다. 살인 사건, 그것도 엘리트 의사 남편을 아름답고 조용하기만 했던 아내가, 부부간의 말다툼으로 인해 트로피로 남편의 뒷통수를 내리찍어 살해한 살인사건이다. 발칵, 고급 주택들이 자리매김 하고 있는 히바리가오카가 뒤집어진다. '히바리가오카', 그곳은 부의 상징 혹은 명문교 학생들이 모여사는 엔도 가족의 꿈이자 아야키의 히스테리의 이유이며 다카하시 가족의 엉거주춤식 무언의 강압이 존재하는 터전이다. 그곳에 오르려는 엔도 가족에게는 그저 '이웃'에 일어난 살인사건이고, 그곳을 내달리고만 싶은 다카하시 가족에게는 당장 눈 앞에 떨어진 자신들의 부모의 살인 사건이다. 소설은 '이웃'과 '가족'을 매치시켜 이야기를 풀어간다. 이웃의 살인 사건으로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하는 히스테리 아야카, 사건이 터진 날 행방불명 된 신지, 이모네집에 맡겨진 히로키 그리고 연락이 닿지 않는 또 다른 남매 요시유키. 애초부터,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고 몸에 맞지 않는 터전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전에 살던, 주택이 즐비했던 곳에서는 앞 집이고 맞은편 집이고 번갈아 시끄러운 싸움 소리가 난무했었다. 심지어는 냄비, 후라이팬, 가전제품 뭐든 상관없이 현관문을 통해길바닥으로 내동댕이 쳐 질 정도였다. 그때마다 내 방 창문을 슬며시 열고는 조심스레 지켜보다 소리가 잦아들면 창문을 닫고 잠이 들었다. 신고를 할까, 몇 번 휴대폰을 손에 쥐었다가 내려놓기를 반복하면서도 안방까지 들릴 이 소리에 아무런 미동도 없이 모른체 주무시는 부모님을 보며 그저 지켜보기만 했었다. 비록, 그 맞은편 집에 같은 학교에 다니는 친구가 살고 있었음에도. 어느 한 사람의 외마디 비명이 아닌 이상 그러니까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나지않는 한 내게는 그 싸움에 끼여들만한 명분이 없었던 것이다. '이웃'에 사는 동갑내기 친구일지언정. 아야카의 히스테리를 견디다 못한 엄마의 갑작스런 행동을 저지시킨 또 다른 이웃인 고지마 사토코처럼 그 동네에 대한 애정 또한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니, 있다 한 들 히로키의 친구 아유미처럼 사건 당사자가 되어버린 친구에게 쉽사리 다가갈 수 없는 것 또한 현실일것이다. 가장 친한 친구에게 가장 보여지기 싫고, 보여서도 안되는 일을 들킨 히로키의 마음을 어떤식으로 위로를 해야하는지 지금조차도 모르고 그런 위험 수위에 찬 일에는 닥쳐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히바리가오카로 오르는 언덕길 병을 앓고 있던 아야카에게 축적되어있던 명문교에 속하지 못한 상처와, 한계에 부딪힌 자신과 맞닥뜨린 신지의 꿈이 박탈되어지는 것은 소설을 넘어선 현실과도 같다. '치열하게, 좀 더 치열하게.' 이것이 세상이 청소년들에게 부여한 과제가 아니었던가. 좀 더 안정적인 생을 원한다면 자신의 가치를 높여줄 수 있는 기본과 기반을 닦으라는 공통분모의 첫 걸음을 새겨놓은 것이 아니었던가 말이다. 수도 없이, 용의 꼬리가 될 바에야 차라리 뱀의 머리가 되라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구태여 상위권이 아니어도 좋으니 하고 싶고, 품은 꿈이 있다면야 세상이 닦아놓은 기반이 아닐지언정 자신이 세워놓은 기준안에서는 최선을 다하는 최고가 되라는 말이다.  누구도 대신 해 줄 수 없는 소년, 소녀들의 꿈을 짓밟는 건 결코 그 부모가 되어서는 안된다.  부모 자신의 바람과 꿈이 아닌 그들의 꿈에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일, 그것이 어르며 달래야 할 부모의 자식이 아닌 세상으로 내보내야하는 가족의 일원으로서의 할 일이다. 믿음, 소망, 사랑. 타인과 엉글어지는 우리네 인생사라 해도 맹목적으로 믿어주고 소원해주고 품어주고 다가서는 것이 가족이 아닌 이상 또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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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 판타지
무라야마 유카 지음, 김성기 옮김 / 문학의문학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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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하다. 외설적이다. 음란하다. 도발적이다. 짜릿하다. 유쾌하다. 검은 활자 사이로 '색()'이 돋는다. 그리고, 서른 다섯의 그 여자처럼 자유롭고 싶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느낀 짤막한 감상이다. 오로지, 여자의 폭발적인 성욕으로 그려지는 끈적거리는 스토리는 단박에 온 몸을 화끈, 달아오르게 만든다. 파격적이다. 읽은 책 중, 이 보다 더 '색' 짙은 소설은 처음이다. 일본의 기성작가가, 그것도 자전적 성향이 짙은 관능적인 소설을 여성 작가가 집필했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이며 일종의 커밍 아웃을 한 셈이다. 책의 뒤 표지를 보면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와 함께 일본의 3대 여류작가라는 타이틀이 걸려있다. 심심한 에쿠니 가오리의 문체와 종잡을 수 없는 요시모토 바나나의 문체를 염두에 두고 생각한다면 무라야마 유카라는 작가는 그리 달갑지 않다. 심심하거나 종잡을 수 없는 간결한 문체는 에쿠니 가오리와 요시모토 바나나로 충분하다고 생각했고 좀 더 솔직해지자면, 매혹적인 표지와 선정적인 표지 글귀가 아니었더라면 책을 들춰보지도 않은 채 미뤄두었을 것이다. 그렇다. 이 소설은 순도 100% 짜리다.

 

 나는 이 책을 단순히 '포르노 소설'로 치부하지 않는다. 로맨스 혹은 일반적인 소설에서 사랑이라는 소재와 그 사랑이 불러일으키는 짜릿한 애정 행각의 모습을 좀 더 깊게 그리고 좀 더 야릇하게 과감히 스케치 한 것이지 아주 작정하고 '섹스소설'을 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소설의 여 주인공이 비단 자신의 성적 만족감만을 위해 남자와의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먼저가 아닌 몸이 먼저 사랑을 일깨우는 것, 그 또한 사랑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10년 남짓, 남편과의 결혼 생활에서 독립을 선언한 여 주인공이 도쿄로 이주하면서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여자의 삶 혹은 작가 자신의 여정을 토로한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떠한 삶을 살고 싶은지에 대해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묻고 답하며 자신의 성 정체성과 마주하며 몸과 마음을 하나의 사랑으로 일치시킨다. 그저 '좋은 감정'에서 시작한 마음들이 '연애 감정'을 키우고 그것이 짙은 '사랑'으로 번지는것이 흔히들 하는 플라토닉 사랑이라면 이 소설에서 보여주는 사랑은 격정적인 부딪힘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사랑한 후, 그 정체성을 보듬어주고 끌어안아주는 이를 만나 더 깊이 자신과 더불어 타인을 끌어안는 것, 이것이 소설 「더블 판타지」에서 보여주는 인간의 혹은 여자의 본능적 사랑이다.  

 

 누군가는 사랑은 곧 섹스라 말하고 다른 누군가는 섹스를 인간의 짐승적 욕정이라 말한다. 물론, 소설에서 말하는 사랑은 섹스와 하나로 일치한다.  다만, 동인지나 포르노에서나 등장할법한 사디즘, 마조히즘을 거침없이 자유롭게 다룬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섹스가 사랑에 있어 필수사항이라면 사랑에 있어 섹스는 선택사항에 불과한다고 생각한다. 옮긴이는 이 작품으로 인해, 무라야마 유카의 팬들이 등을 돌리거나 새로이 다른 팬층이 확대될거라 확신했다. 물론 나는 후자 쪽이다. 더불어 기회가 닿는다면 얼마든지 그녀의 전작들을 찾아 찬찬히 읽어 볼 생각이다. 이보다 더 자극적이지도 강렬하지않아도, 스토리를 이어나가는 그녀의 필력 또한 다른 여류 작가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확연히 느꼈기 때문이다. 또한, 그녀의 자전적 성향이 짙은 작품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애기하자면 내 개인적인 취향과도 하나 다를바 없다는 것이 본격적으로 이 작가, 무라야마 유카를 더 없이 좋아하는 계기로 삼아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한 장 한 장 넘기는 페이지가 아쉬웠던만큼, 앞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이런 작품들을 다루어주기를 개인적으로 바라는 바다. 덧붙이자면, 경멸스러울수도 있고 수치스러울수도 있다. 충분히 변태적인 소설로도 치부될 수도 있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모든것들은 소설의 결말이 달래 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극구 추천하는 바이다. 되려, 독자의 성향을 찾아줄지도 모를 일임을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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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심장부에서>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나라의 심장부에서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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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니까, 나는 이 책을 정확히 삼등분으로 잘라 읽었다. 문단마다 이어진 숫자를 따라 80페이지 가량을 넘겼고, 망설임없이 마지막 페이지로 넘겨 옮긴이의 말을 읽고는 뒷장부터 앞으로 80페이지를 읽었으며 마지막으로, 책의 딱 절반부분을 갈라 앞, 뒤 순서없이 마구잡이로 읽었다. 여자의 끊임없는 망상과 고독에 찬 독백, 부리는 하인에 의한 성폭행과 부적절한 관계에 선 아버지를 향한 총알까지 모두 여자의 독백을 통해 들으며 읽었다. 고백컨데, 이런식의 갑갑하기만 한 문자배열식의 글은 진저리가 난다. 한 작가에게 두 번은 주지 않는 부커상을 두 번 받았다는 명성조차도 잔뜩 힘이 들어간 내 눈의 긴장을 풀지는 못했다. 책을 펼칠때마다 '그래, 그래도 한 번 부딪혀 보자' 라는 식의 각오를 세우고는 읽기 버거운 책을 읽는 첫 번째 방법을 나는 시도한거다. 앞서 말했듯 마구잡이로 읽기, 그것이다. 국외소설은 좀처럼 읽히지가 않는데, 갑작스런 미션과 함께 받아 든 이 책은 훑어보는 단계에서 부터 막막하기 그지없었다. 읽다가 막히는 종종 기이하게도 로맹 가리를 떠올리기도 하고 다자이 오사무를 오버랩시키기도 하면서 자기 세뇌까지 하며 읽었으니 책장을 모두 넘겼을때는 왈칵, 하니 긴 숨을 뱉어냈다.

 

 여자의 일생이라고 해도 될런지. 끊이없이 이어지던 여자의 과대망상과 환멸에 사로잡힌 여자의 독백은 흥미로웠던 반면 꽤나 괴팍했다. 순간, 미스터리를 읽는 기분인가 싶으면 여자의 처지가 안타까워 마음을 쓸어내릴라 치다가도 다시금 미간을 한껏 좁히게 된다. 옮긴이의 말을 토대로 하자면 인종의 차별과 식민지 시대를 미화시킨 작품이라는데, 좀 더 개인적으로 솔직해지자면 그 어느 부분에서도 주인공들의 비애를 눈치 챌 수 없었다. 어쩌면, 옮긴이의 말 처럼 너무도 완벽하게 미화된 작품으로서, 그들의 애증과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는지도 모를일이다. 단, 내가 느꼈던 건 글이 굉장히 절제적이고 단단하다는 거였다. 문체 자체도 그러했지만 헨드릭의 말투에서는 가장 진득하게 묻어났음은 물론, 아버지의 절도적인 언행들이 머릿속으로 그려질만큼 굉장히 둔탁하고 강한 메리트였다고 볼 수 있다. 페이지를 쉽사리 넘길 수 없었던 점과 더불어 같은 문단을 몇 차례 반복하여 읽어내려도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는가 하면, 어처구니없고 돌연한 행동에 웃음이 나기도 했다.

 

 「나라의 심장부에서」의 책은 그저 어떤 시대, 어떤 인물, 어떤 풍경을 막연하게 그려내는 것이 아니다. 여자의 보이지않는 내면의 창을 누군가가 걷어 올려주는 것으로서 제2의 삶과 구원에 대한 손짓이다. 비록 마구잡이식의 작품에 대한 가당찮은 독서였다 할지언정, 결코 여자의 목소리를 쉬이 흘려보낸 것이 아니다. 여자의 독백에서 시작해 여자의 독백이 끝이 아니듯, 독백은 또 다른 독백을 낳는다. 이야기의 흐름에 발을 맞출 수는 없었지만 오히려 맥을 끊고 읽는 것이 부자연스러운 그녀의 공간속에서나마 살아남을 수 있는 비법이 아니었나싶다. 여자의 갈망, 혹은 구원이 사랑이었는가 싶다가도 결국, 끝은 고독으로 남겨지는 것은 그녀의 삶이 아닌 여자다운 혹은 여자의 삶을 그린 하나의 자화상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본다.  

 

 한 번더 그리고 다시 한 번 더 읽어봐야 할 책임을 안다. 여자의 형성과 고독으로 이루어진 여자의 생이 조금 더 마른 가슴으로 차오를때즈음, 망설임없이 다시 한 번 이 책을 읽을 생각이다. 첫 시작부터 동의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었던 여자의 와해 된 생활을 나 역시 겪을테고, 언젠가는 일어날 일임을 알기 때문이다. 구태여 찾아 읽지 않아도 내 몸이, 내 가슴 밑바닥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수 많은 말들이 한꺼번에 터져나와 그을려 타닥타닥 타들어갈지도 모를일. 그저, 형체의 중심부를 잃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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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
박범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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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 시장 상인들의 처절한 시위와 굳건한 반대를 무릎쓰고 ㄷ사의 주상복합 아파트내에 대형마트가 들어섰다. 내가 거주하는 ㅎ시에서의 ㄷ사의 주상복합 아파트는, 건물을 지을 당시부터 '부자 아파트'라는 이름으로 주민들의 입에 오르내렸었다. 그도 그럴것이 높은 분양가로 인해 입주시기가 몇 차례씩 밀려나며 분양가가 급격히 하락했고 가까스로 아파트 전 세대에 불이 켜진것이 불과 채 두 달도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런 부자 아파트에 지하 5층짜리 대형마트의 입점은 당연한 결과로 납득할 수 있겠지만 300미터 반경에 있는 전통시장은 그야말로 폭격탄을 맞은것과 다름없었다. 이에 따른 시장 상인들과 대형마트는 극단적인 갈등에 부딪히며 불철주야 시위로 번져가려는 찰나 겨우내 대형마트의 오픈은 시장 상인회와의 상생안 타결이라는 명목하에 수차례 진행되어 온 양측의 협상이 마무리되었다. 그 상생안 타결이라는 것이- 점포자체의 과도한 행사 자제를 비롯 가두판매, 무료 배달 서비스, 지역방송 홍보 금지등에 협력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합의서, 그 종이 한 장 달랑이었다. 오픈 이틀 째, 구경도 할 겸 장을 보고 나오는데 세상에나, 수십 년 동안 교통 편의를 위해 존재했던 지하도가 그냥 묻힌게 아니구나 싶었다. ㄷ사의 주상복합 아파트를 중심으로 구도시와, 신도시로 나뉘는 것이었다. 아파트 앞으로는 시청을 비롯한 높은 아파트들을 바로보고 뒤로는 아파트 하나 없이 울퉁불퉁 낡고 스러질듯한 시멘트집이 전부였다. 전통 시장으로 향하는 골목 지름길이 단번에 모습을 감추고, 출구 조차도 그쪽으로는 통하지 못하게 오로지 지하철 개통 확정이라는 커다란 현수막이 몇 년째 펄럭이는 시청을 향해 있었다. 불현듯, 버려진 마을이구나 하는 생각이 쓸쓸히 가슴께로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흔히들 떠드는 강남과 강북의 경계 편차는 결단코 그곳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닌, 이 작은 시 마저도 몸살을 앓게 만들었다.

 

 아들의 과외비를 벌기 위해 매춘을 하는 여자의 삶은 소설 「비즈니스」가 겨냥하는 그 첫 번째, 자본주의의 폭력에 대한 이야기다. 전혀, 우습지도 몰상식하지도 않은 이야기다.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시절 그러니까 갓 중학교를 졸업했 때, 궁핍하고 어려웠던 생활고가 못 견뎌워 생각의 끝에 걸린 것은 단연 몸을 파는 것 뿐이었다. 어디까지나 스스로가 갖는 마음가짐의 문제였고 직업의 좋은 예든 나쁜 예든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때의 나에겐 오로지 돈, 목적은 그뿐이었다. 소설 속 여자의 삶 또한 그랬다. 가정의 기둥이 되어야 할 기반은 뭉개져 주저 앉아버린지 오래였다. 뒷걸음질 쳐 끌어앉힐 수 있다면야 좋을 대파, 쪽파하며 서로 사랑해를 부르던 시절의 남편은 메마른 삶을 사는 것이 아닌 의 삶을 견디고 있었음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쓰레기더미로 전락해가던 여자가 사는 구시가지에서 적어도, 자신의 아들만큼은 매춘을 하는 여자 자신과 무능력한 남편의 삶처럼 무력하게 살게 하고 싶지 않은 꿈, 그것, 바로 마지막으로 품을 수 있는 여자의 희망이자 세상 모든 부모의 간절함일 것이다. 여자에게, 걸어서도 뛰어서도 향할 수 없는 신시가지는 네 발로 기어서라도 가야 하는 자본주의 시대의 현 주소였다. 여자에게 물어야 할 것은 매춘을 왜 했느냐가 아니라, 어떠한 시대가 여자, 어머니가 매춘을 하게 하느냐는 것이다. 시대가 행하는 폭력, 그것은 비단 얼굴에 멍이 들고 팔 다리가 부러지는 것이 아닌 가슴에 포도알 같은 피멍을 방울방울 안고 사는 것이다.  

 

 아내를 잃고 초로한 횟집에서 자폐아 아들과 사는 남자의 삶은 소설 「비즈니스」가 겨냥하는 그 두 번째, 자본주의의 정당성에 대한 이야기다. 유독성 폐기물을 싫고 달리는 차들의 악취로 인해 아내를 잃은 남자는 결국 자신의 아들을 공해로 인한 자폐아로 품에 안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거처인 구시가지의 버려진 횟집, 그 횟집을 찾기 위해 남자는 부유한 이들의 재산을 훔치는 도둑질을 감행한다. 밀림에서나 나올 법한 '타잔', 남자의 삶. 한 때, 그런 자가 있었다. 부유한 이들의 재산만을 훔치는 현실 세계의 '타잔'말이다.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청춘의 길목에 발을 들인 시기였고 소설 속 주민들이 그러하듯 나 또한 '타잔'을 마냥 나쁜 놈이라 치부하지는 않았다. 더 말할 것 없이, 도덕성을 따지기 전 통쾌하게 쓸려내려가던 자본주의에 대한 반감이 본능적으로 끓었기 때문이다. 매춘을 통해 만난 여자와의 만남과 피어나던 동질성 사랑은 그야말로 자본주의를 버틸 수 있는 단 하나의 출구와도 같다. 무더기무더기 피던 이팝나무 한 그루가, 현재를 견디게 하는 과거이 듯 무더기무더기 불어나는 자본주의의 폭력을 견딜 수 있게 하는건 마음을 나누는 이의 작은 어깨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소설 「비즈니스」가 겨냥하는 마지막 세 번째는, 자본주의의 퇴폐와 파멸이다. 남자의 아들이 유독성 폐기물로 인한 자폐증상이 퇴폐요, 스스로 비즈니스 맨을 자처했던 시장은 파멸이라 할 수 있다. 매춘을 하는 여자가 입은 자본주의 폭력의 결과는 퇴폐를 불러오기 마련이고 남자가 행하던 자본주의 정당성은 비즈니스만이 자본주의에서 우선시되던 것에 대한 파멸을 불러온다. 신시가지를 위해 존재했던 구시가지의 모습은 낯설지않다. 현재 사회에서도 빈번히 일어나는 일면이 겨우내 소설에서 부각이 된 것이다. 시인인 황지우 선생님의 말을 잠시 빌리자면 '문학은 혁명에 관여하지않고 혁명의 조짐에 관여한다고' 했다. 소설은, 그저 허구가 아니다. 현실은 언제나 소설의 모티브가 되기 마련이고, 언론이 말하지 않고 모른척 하는 것에 대한 소수자들의 진실 된 언어의 소통이다. 자본주의 사회가 폭력을 휘두르는 가해자라면 알면서도 등 떠밀려 휘말려가는 현대인들은 피해자다. 남자의 '타잔'을 모방하는 열망의 범죄가 결코 도덕성에 어긋나는 것이라 확신 할 수 없 듯, 자본주의는 몰락 직전까지 이율배반의 성격을 뛸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사는 서러운 하층민들의 딜레마적인 삶이다.

 

 올해, 스물 여덟이 된 나이가 우스워질때가 있다. 스무 살이 되었을 때 처음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월급을 받아 쥐던 봉투의 감촉은 그야말로 짜릿 그 자체였다. 어디까지나 일한 만큼의 댓가였고 더 열심히, 더 많이 하고 받고 싶은 욕심 또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졌다. 적어도, 그 때에는 백 만원도 채 되지 않는 돈으로도 훗날에는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갈망하는 이른 바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지금의 나는 지리멸렬한 이 사회의 자본주의를 모르고 살아야 했다. 돌고 도는 돈에 쩔쩔매는 삶은 살지 않아야 맞는 것이다. 스무 살이 그러했듯 스물 여덟의 지금 역시, 달라진 것 하나 없이 버티고 있다. 한 살 한 살, 내 나이가 많아질수록 이 사회 역시 좀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내 나이보다 열곱절은 더 많이 높아진다. 그것이 내가 하층민에서 위로 오를 수 없는 이유이다. 그저, 좀 더 나은 내일을 바라는 것. 그저, 그런 희망 하나 등불처럼 달고 이 사회를 걸어나가야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사회의 무언의 폭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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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시대
장윈 지음, 허유영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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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랭보의 시를 블로그에 필사를 하면서 돌연 국내 시에 눈길을 돌리다 시인 박인환과 김수영의 작품들을 몇 차례나 반복하여 읽었던 적이 있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2004년도에 EBS에서 방영했던 '명동백작'이라는 문화사 프로그램을 몇 차례 다시보기로 접하면서 부터였다. 난해하고 허무할거라 생각했던 시에 대한 선입견은 김수영의 「풀」이라는 시로 하여금 왈칵, 눈물을 쏟아내게 하기에 충분했다. 시는 그저 운율과 심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형용할 수 없는 어떠한 울림과도 같은 고요한 외침이었다. 닥치는대로 읽는것이 아닌 마음에 고이 담아 쌓을 수 있는 문학은 단연코 시 뿐이다. 불안한 시대를 시로 노래하던 박인환의 구슬픈 선율이 가슴 깊이 먹먹함으로 그득해지는 찰나의 감정은 그 어떤것으로도 비할 수 없는 깊은 슬픔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소설 「길 위의 시대」를 마주하기 전, 훑어보기 조차 하지 않은 탓에 박범신의 「비즈니스」와 같이 시대 고발적인 소설인 줄만 알았지, 낭만과 순수가 공존하는 소설인 줄은 가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국외작품은 달가워하지 않는지라 별뜻없이 펼친 소설은 단박에 무심히 잊고 지냈던 박인환과 김수영의 시어들이 눈 앞에 잘게 토막되어 펼쳐지게 했음은 물론, 소설 속에서나마 시인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한량없이 페이지를 넘기는 손길이 가벼웠다.

 

 소설 「길 위의 시대」 속엔 낭만의 시대가 펼쳐진다. 시를 쓰는 사람이라면, 문단의 거장이든 무명이든 환대받던 시절의 낭만이 춤을 추며 그들 주위를 배회하던 때, 대학 졸업반이었던 천샹이 시인 망허라는 사람과의 하룻밤의 정을 통하게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작가가 말했 듯, 인간의 본성과 금기의 충돌은 구태여 80년대로 거슬러 오르지 않아도 어느 시절이든 존재하기 마련이다. 망허의 떠남 역시, 시인이라면 으레 그럴수도 있는 환멸로 인정 될 수 있듯이 말이다. 하룻밤으로 인한 천샹의 임신과 천샹의 모든 상황을 품어주는 이와의 결혼은 마냥 낭만적일 수 만은 없다. 시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천샹이 가슴안에 세월만큼이나 쌓았을 망허가 아닌 시인에 대한 그리움은 결국 거짓말로 인한 파국을 맞게 되기 때문이다. 아이를 낳고도 젖이 돌지 않은 천샹의 극진했던 노력은 모성애가 빚어낸 사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믿고 그리워했던 시인 망허의 아들이 아님을 알고는 단박에 수치감과 자괴감, 천샹 자신의 생 전체를 부인하게 만들었다. 아이를 죽이려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려했던 천샹의 파괴는 자신이 낭만이라 믿었던 시대에 대한 배신으로 몰락하게 된다.

 

 천샹이 믿었던 시인 망허의 삶은 천샹과는 다르게 순수의 시대를 걷고자 한다. 우울하고 융합되어지지 않았던 현실을 도피하여 떠난 망허의 방랑은 산베이의 작은 도시에서 자신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는 예러우와의 만남에서부터 시작한다. 예러우 역시 천샹과 같이 망허가 시인이라는 것에 매료되어 하룻밤을 보내지만 시인에게는 바랄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결여로 망허를 떠난다. 순수는 결코 희고 맑음이 아니다. 찬란한고 빛이 머무는 순수, 마음이 말하고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순백의 눈 같은 찬란함이다. 예러우의 떠남이 완전함을 보여주지 않은 것 또한 망허의 그리움이 순수하고자했던 것임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재회, 그리고 다시 여행. 북부 변방으로 펼쳐진 평범한 지역들으 돌며 예러우와 망허는 숱한 사람들과 이야기들을 만나게 된다. 작가는 이들의 여행으로 인해 많은 곳을 한국 독자들에게 알려주고 시대의 슬픔을 이야기 한다. 방랑하는 길 위의 순수와 중국의 버려진 순수가 예러우와 망허의 귀를 통해 고즈넉히 흐르 듯 펼쳐진다. 자궁 외 임신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예러우와 그녀를 기리는 시를 작품으로 펴내는 망허의 그리움들로 인해 천샹의 낭만과 예러우의 순수의 시대는 장렬하게 파괴되어 진다.

 

 읽는 내내, 주인공들로 하여금 수 없이 흔들리고 위태로이 휘청였다. 그들이 말하는 낭만과 순수가 무엇인지, 시대가 앓는 시의 유약함이 과연 갑갑하기만 한 이 시대의 위로 날아오를수는 있는건지. 사실, 책을 덮는 순간까지도 천샹과 예러우의 구구절절한 사연들을 가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좀 더 솔직히 얘기하자면 '시'의 불가항력적인 감정의 소모들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일수는 없었다. 대학 시절, 자신의 본질과 나아갈 길을 묻는 질문에 쉬이 대답 할 수 없었던 것 처럼, 소설이냐 시냐, 하는 무의미한 갈림길 앞에서도 선뜻 선택의 기로에 올곧게 설 수 없었다. 가면 가는대로 흐르면 흐르는대로 주어진 길만이 전부라 여겼고 그저 평행선을 걷듯 나만의 안전한 길만을 걷기를 원했었다. 천샹이 자신의 아들 샤오촨에게 남기던 편지의 한 구절,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왜 평생토록 그런 수수한 길만 걷고 싶어 하는지 이해 할 수 있을거야.'라고 했던 것 처럼 유유히 뭉개지는 구름처럼 흐르고만 싶었다. '소설'이 아닌 '시'를 먼저 만났더라면 나았을까. 그러면 지금의 내가 사는 이 시대에 대해 끄적이는 위로라도 받을 수 있었을까.

 

 낭만과 순수의 시대위에 시인이 있다. 잃어버리거나 혹은 버려진 시대를 토굴해야만 하는 시인이 기리는 시대가 소설 속에 존재한다. 천샹과 망허와 예러우의 사랑만이 아닌 그들이 지나치고 걸어 온 길 위에 그 모든 낭만과 순수는 부딪혀 흩어진다.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가 아닌, 존재하기에 운율에 따라 노래하는 시인처럼 끊임없음을 야기시켜야 한다. 작가는 천샹과 예러우와 망허를 다정하게 품어주기를 바란다. 금기와 충돌하고 시대에 불변하는 그 이상의 것의 날개를 달고 활개하기 바란다. 시대가 품는 낭만과 순수의 본질적인 의미를 완연한게 그리고 좀 더 나르시시적인 유약함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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