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주의는 어떻게 패션이 되었을까 - 지구화, 군사주의, 젠더
신시아 인로 지음, 김엘리.오미영 옮김 / 바다출판사 / 2015년 6월
평점 :
품절


12일째다. 다른 책을 단 한 줄도 읽지 못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겪게 된 난감한 일이다. 책을 읽고 나서 느낌을 쓰는 데 그다지 어려움을 느끼지 않아왔건만.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은데, 무슨 말이든 하고 싶은 것 같기는 한데,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노트북의 빈 문서1을 앞에 두고 깜빡이는 커서만 바라보며 열손가락을 어정쩡하게 멈춘 채 방황하듯 며칠을 서성였다.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은 문제였다. 때문에 나의 생각을 말하거나 내 삶에 적용하기도 어려웠다. 확실한 것 한 가지는 문제가 문제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일상을 지내왔다는 깨달음뿐이다.

 

썩 마음에 드는 책은 아니었다. 직역을 하는 듯한 문장이 군데군데 신경 쓰였다. 의미가 한 번에 들어오지 않아 몇 번씩 도돌이표를 찍으며 불편할 때가 있었다. 외국인 특유의 말투인걸까. 번역의 한계인걸까. 내 의식의 흐름과 잘 맞지 않는 낯선 문체 때문이리라. 다양한 각도와 분야에서 지구화된 군사주의를 바라보게 하는 내용은 알찼다. 우리나라 사람이 쓴 페미니즘 관련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스 신화의 아테나 여신처럼 전사의 이미지로 무장한 여성들에게만 갑옷처럼 장착된 사상이라 생각했다. 페미니즘은 나와는 거리가 먼, 아주 과격한 이들의 전유물이라 여겨왔다.

그나마 비슷한 유형의 책을 읽어본 경험이라고는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 정도랄까. 잘 알지도 못하는 영역에 대하여 나의 얄팍한 지식으로 이것이 옳다 틀리다 말한다는 것은 분명 우스운 일이다. 다만 세상 어딘가에는 나와 비슷하게 무관심했던 사람들도 존재할 것이기에 그저 내 생각과 개인적인 느낌만을 조심스럽게 적어보려 한다.

 

갑자기 깨닫게 되는 사실로 소름이 돋을 때가 있다. 드러내놓고 피 질질 흘리는 귀신은 차라리 덜 무섭다. 아파트 10층에서 공부하다 고개를 들어보니, 창문으로 해맑은 여자 아이가 두 팔꿈치를 괸 채 당신을 바라본다. 심심해 보인다. “나랑 놀까?” 하는 말에 좋아라하며 팔꿈치를 통통 거리며 대가리만 다가온다는 옛날 괴담처럼.

저자의 말대로 페미니스트 호기심으로 바라보니 뭔가 잘못 되었다는 느낌이 훅 다가왔다. ‘여성에 관한 것은 자연스럽거나 사소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p36)’ 라고 했다. 책에 담긴 많은 내용들은 생판 모르는 일이 아니었다. 무심코 지나치던 일상들이었다는 표현이 적절했다.

자연스럽다고 이름 붙여진 것은 무엇이든 우리가 설명하지 않도록 만들기 때문이다.(p56)’ 여성과 관련된 많은 일들은 굳이 설명되지 않았고, 사람들은 설명할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당황했다는 말이 정확한 표현이었을 거다. 그동안 묻혀 졌던 일상들이 하나씩 열리는 포켓볼처럼 깨어났다.

 

어렸을 때 남동생에게 장군의 칼을 선물했다. 누나들은 번드르르한 칼집까지 장착한 플라스틱 칼로 장군 놀이를 하는 동생의 모습을 보며 흐뭇해했다. 탱크 모형을 조립하거나 비비탄을 장난감 총에 넣고 여기저기 쏘아대는 장면은 남자아이들 사이에서 흔히 보이던 모습이었다. 그 옆에서 나는 종이인형의 옷을 만들어 입혔다. 전쟁놀이는 사방치기, 고무줄놀이와 다를 바 없는 남자아이들의 일상적인 놀이었다.

전쟁이 놀이가 되고 게임으로 만들어지는 세상이라니. 조금만 더 생각하면 소름이 돋을 일이다. 칼이란 도구도 곰곰 생각하면 어떤 대상을 베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과일 깎는 과도도 아니고 더군다나 장군의 칼이라면 총과 마찬가지로 사람을 해치기 위함이 아닌가. 민감하게 인식하지 못했다. 사람을 죽이는 도구로 놀이를 해왔다는 사실을, 이런 일상이 자연스러운 풍경으로 기억에 남겨져왔다는 점이 새삼스러웠다.

 

유난히 질문이 많은 책이었다. 그리고 나는 많은 질문에서 움찔거렸다.

가장 먼저 충격을 받았던 내용은 총과 탄약에 관한 이야기였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전쟁을 싫어한다고 생각해왔다. 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건이라고. 하지만 하나의 질문 앞에서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누가 이익을 취하는가?(p30)’ 한쪽에서는 살상이 일어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그들을 죽일 수 있는 총과 탄약을 만들면서 떼돈을 버는 것이다. 나라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군사화에 연루되어 있는 사기업들, 일부러 전쟁을 일으키는 국가들의 행태를 바라보았다.

어렸을 때에는 군인 아저씨들이 든든하게 보였다. 이 책을 읽고 나니 군사화를 통해서만 안보가 이루어질 수 있는 걸까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누구의 안보가 우선되어야 하느냐(p92)’ 라는 질문을 앞에 두고 답답했다. 자신이 속한 나라나 집단의 이익을 위해, 때로는 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한다고 생각하니 화가 났다.

 

침묵도 행동이다. 외치고 싶어도 외칠 수 없는 힘없는 이들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침묵에 귀 기울이는 일(p135)’. 저자는 주목을 가리켜 이렇게 정의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침묵의 소리에 주목하지 않는다. 침묵이란 소리를 내지 않는 것이니 들릴 리 없다고 여기며 보지도 않으려한다. 언어만이 의사소통의 수단은 아니라는 사실을 잊고 있다. 주목만 한다면 비언어적인 표현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것을.

간혹 약한 이들의 모습이 보일 때도 있었다. ‘적어도 나는 강자가 되어 행동하지 않았으니까.’ 생각해왔는데 한 문장을 건널 때 뜨끔했다. ‘보고도 못 본 척하기는 그 자체로 하나의 행동 유형이다.(p190)’ 이제껏 나는 적극적으로 못 본 척하기를 행동해왔던 것이다.

 

페미니즘은 여성주의이며 여성의 입장만을 강하게 주장하는 편협한 사상이라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면 그 중심에는 인간이 있다고 본다. 여성으로서의 권리나 정체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별을 떠나 독립된 인격체를 향해 암묵적으로 행해지는 차별과 불합리를 당당하게 표현하는 사상이라고 생각한다. 그 주변에는 카키색부터 아기 양말에 이르기까지 지구 전체에 공기처럼 스며든 군사주의라는 커다란 마스크가 페미니스트들의 입을 막고 있다.

나이키 운동화에 담긴 여성의 값싼 노동, 군인 아내의 삶, 보호자라 주장하는 사람들에 의해 자행되는 폭력, 가부장제, 모병 과정에서의 모순점, 일본 자위대, 군비에서 무기 판매가 차지하는 압도적인 비율, 남성 자체가 스펙이 되는 사회 분위기를 차례로 생각하며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이 문제들이 과연 여성에게만 해당되는 것인가?

 

남편이 다음 주 월요일부터 56일 동안 태국 여행을 갔다 올 예정이다. 앞 문장에서 주목할 점은 하나의 조사이다. '과'가 아니라 '이'라는 점. 그가 밤늦게 도착하는 날, 오후에 나는 시댁에서 아버님의 저녁 생신 상을 준비할 예정이다. 그의 일정을 전해 듣는 순간 갑자기 화가 난다.

왜 그럴까?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답하며 이유를 찾아간다.

친구들과 혼자만 놀러간다고 부러워서? 나는 추운데 돌아다니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인간이라서 부러운 마음은 아니다.

그의 부재로 인해 생길 빈자리를 상상하니 허전하고 그리울 것 같아서? 그저 웃는다. 결혼한 지 23년째다 라는 말이면 답변으로 충분하리라. 아침마다 토마토 주스 안 갈아줘도 되니까 오히려 더 편할 거라는 건 우리만 아는 비밀이다.

시댁 가서 일하는 것이 억울해서? 방학이니 몸이 그다지 피곤하지도 않을 거고, 요즘에는 어머님과의 관계도 살가워져서 그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한참을 생각하다 답을 찾는다. 나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여행 일정을 잡아서였다. 그가 돌아오면 나도 똑같이 떠나 버려? 순간적으로 생각한다. 내가 여행을 간다면 군말 없이 보내줄 사람이니. 그런데, 나는 그러지 못한다. 가족들의 밥도 신경 쓰이고 잡다한 집안일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확한 이유를 파고드니 내 마음이 불편했던 이유는 나의 동의를 구할 필요 없이 본인만 생각하면 된다는 점이었다. 그건 남편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럴 수 있는 환경으로 굳어진 것은 나의 책임도 크다. 남성 중심으로 형성된 사회적인 분위기 탓도 있고. 내 삶에도 무심코 지나치던 차별이 있어왔던 거다. 어떤 부분부터 변화시켜야 하나. 화석처럼 굳어진 일상에서의 패턴을 지혜롭게 바꿀 수 있는 방법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박노해 시인이 말했다던가. ‘전쟁의 반대말은 일상이라고. 전쟁과도 같은 사회이다. 실제로도 전쟁이 일어나는 이 지구에서 그물처럼 덮여있는 남성 중심의 군사주의를 어떻게 걷어낼 수 있을까. 성별을 떠나 공평하게 쌀을 나눠먹을 수 있는 평화로운 일상은 불가능한 걸까. 젠더의 입장에 서서 다시 이 질문과 마주한다. 여성과 여성, 남성과 남성, 여성과 여성의 문제로 구분 지을 것이 아니었다. 페미니즘은 한 인간이 또 다른 인간에게 손을 내밀며 동등하게 바라보는 마음이었다.

 

 

*오타

p228 6째줄: 유안안전보장이사회 유엔~

p257 11째줄, 12째줄: 히노코 히로코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18-01-09 0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를 읽고나니 저도 꼭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땡투 꾹 누르고 담아갑니다.

나비종 2018-01-09 09:45   좋아요 0 | URL
문장의 흐름이 자연스럽지 않은 부분이 있어서 읽는 내내 주춤거리게 되더군요. 하지만 내용적인 면을 놓고 보았을 때는 리뷰에 적지 못한 방대한 내용들이 많은 질문을 던져주어서 의미있는 책이었습니다.^^

2018-01-09 08: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09 09:5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