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아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5
이반 투르게네프 지음, 이항재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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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주는 선입견이란. 러시아어는 도통 모르니 책 표지에서 이반 투르게네프로 짐작되는 이름 옆의 제목이 거의 직역인 줄 알았다. 에곤 실레의 표지 그림도 한몫했다. 어디서 이런 그림을 적절하게 찾아왔는지. 딱 봐도 아버지와 아들의 대치 상황 아닌가. 표지를 넘기기 전에 했던 상상은 어쩌면 당연했다. ! 아버지와 아들이 대립하는 소설이겠구나.

결론적으로 대립은 맞으나 대상이 살짝 어긋난다. 소설의 중심 무대에서 대립각을 세우는 인물은 주인공의 큰아버지와 친구이기 때문이다. 줄기차게 라떼를 부르짖는 큰아버지와 아아를 연상시키는 친구는 결코 서로에게 섞여 들어가지 않는 중심인물이다.

주인공의 아버지와 아들이 언제 대립하나 하염없이 기다리다 드라마가 끝나버렸다. 작품에 등장하는 아버지와 아들이 각각 두 명씩이라 제목의 <아버지와 아들>이 어느 팀인가 판단하기 어려웠다. 처음 부분에 등장하는 아버지와 아들인가? 싶었는데 나중에 아들의 친구가 급부상하면서 그의 아버지의 비중도 만만치 않아지는 게 아닌가. 뒷부분의 해설을 보니 비로소 이해되었다. 원제는 <아버지들과 아이들>로 주인공을 복수의 인물로 설정했던 거다. 서브로 여겼던 아아도 주인공이었다는 것.

 

러시아 이름은 이름(예브게니), 부칭(바실리예비치), (바자로프)’, 세 부분으로 나뉜다고 한다. 애칭으로 비스므레한 발음도 등장하는데 처음에는 오타인 줄 알았다. 보통 헷갈리는 게 아니라 처음에는 그냥 읽다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가계도를 그려가면서 읽었다. 예브게니 바실리예비치 바자로프를 바실리치였다가 바실리예프였다가 성만 불렀다 이름만 불렀다 부칭을 불렀다. 이런, 된장! 적으면서 짜증났지만 인물들의 관계도는 파악이 되었다. 등장인물의 이름은 대략 ,,,등의 어미로 끝난다. 리뷰에서 그들의 풀네임을 적다 보면 스팸처럼 도배될 것이므로 아버지 1, 2와 아들 1, 2로 적기로 한다.

아들 1과 아들 2 중 앞에서 언급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아들 2로 명명하려고 한다. 그는 니힐리스트이다. 비중으로만 보면 원톱 주인공이다. 아들 1의 친구인 그는 대사량도 많고 액션도 화려하고 사건도 파란만장하다. 순간적이지만 조연급의 여인 1, 2에게 찝쩍대는가 하면 권총으로 결투도 하게 된다. 발진티푸스에 걸린 환자의 시체를 해부하다 손가락을 베이는 바람에 감염이 되어 죽는다는 급작스런 설정은 이건 뭥미? 이다. 허무주의자가 허무하게 죽는다. 복잡하게 여기저기 다 얽히는 인물을 만들어놓고 끝내 감당이 안 되니까 제거해버린 느낌이랄까. 어쨌든 주인공이 죽는 법은 거의 없으니까 끝까지 살아남은 아들 1을 주인공 1으로 여기기로 한다.

 

소설 속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첫째, 라떼를 고집하는 구세대와 모든 권위를 부정하는 신세대 아아의 갈등과 대립 상황이다. 당시 러시아의 시대상과 맞물리며 보수와 진보의 갈등을 가정으로 끌어와서 구현하고 있다. 둘째, 등장인물들의 각기 다른 사랑 방식이다. 사랑에 빠져드는 심리의 그러데이션을 치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사랑의 관점이든 이념의 관점이든 한 가지 관점으로 소설을 음미해도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것으로 짐작된다.

다만 나의 경우는 전반적으로 작가의 문체가 마음에 들지 않아 러브러브한 분위기에 몰입하기가 어려웠다. 작위적인 어투도 사건 전개도 도통 못마땅한 데다 재미도 없어서 집어던지고 싶은 책의 필수 조건을 골고루 겸비한 책이었다.

 

큰아버지와 아들 2의 대립이 선명하게 부각되지만, 나는 상대적으로 희미한 색채로 배경처럼 살아가는 이들의 삶에 더욱 시선이 갔다.

첫째, 아들 1이다. 친구인 아들 2를 존경하다시피 하며 그를 추종하는 인물이다. 얼마간은 주체성 없이 아들 2에 끌려다니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극단적인 아들 2에 비해 이 인물의 내면에는 낭만적인 면모가 자리하고 있다. 소설을 통틀어 가장 많이 갈등하는 인물이다. 나중에는 스스로 일어서서 마이웨이를 걸어가는 모습이 가늘고 길게 걸어가는 인간 승리를 연상케 한다.

둘째, 아버지 1이다. 근본적으로 지닌 이념은 아들 1의 큰아버지인 형과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훨씬 따뜻하고 사랑이 충만한 인물이며 당신의 이념을 아들 1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많이 속고 어리숙해 보이지만 선한 사람의 결이 보여서 마음이 짠했다. 그의 모습을 보며 착한 사람들이 잘사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셋째, 아버지 2와 어머니 2이다. 소설 속의 어머니들은 한결같이 일찍 죽어서 존재감 제로인데 유일하게 등장하는 어머니이다. 물론 아버지 1의 어린 부인도 아들 1의 어머니 급이지만, 그녀는 어머니로서보다 한 남자의 여인으로서의 면모가 더욱 부각 되므로 제외한다. 집을 버스 정류장으로 아는 아들 2의 들락거림에 마음 아파하면서도 묵묵히 맞이하고 기다리고 아들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가슴 졸이는 인물들이다. 헌신적인 그들의 사랑은 아들의 죽음을 지켜보는 모습과 아들의 무덤을 찾는 모습에서 극치를 이룬다. 불효막심한 아들이 뭐라고! 이념, 그게 뭣이 중헌디!

 

라떼의 고지식함과 허세도 밥맛이지만 아아의 극단적인 이념도 마음에 안 들기는 마찬가지이다. 사랑에 빠진 것을 자각하면서도 이념과 모순된다는 이유로 비겁하게 떠나버리는 아들 2의 모습은 이중적이다. 사랑은 이념보다 상위 개념인데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자신의 마음을 배반했던 걸까.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소설의 처음 부분에서 마부를 텁석부리라며 무시하는 모습에 인성 쓰레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말만 번드르르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살아가는데 중요한 건 과연 무엇일까. 커다란 나무로만 보였던 나의 부모님들은 어느덧 자그마한 관목이 되셨다. 어린 시절의 나는 부모님의 말씀이라면 무엇이든 옳은 줄로만 알았다. 부모님의 나이가 되어버린 지금은 부모님 세대의 모순적인 면과 약간은 권위적인 면과 고집이 보인다. 그렇다고 하여 당신들이 무조건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부모 세대가 되어버린 나도 가끔은 라떼를 찾게 되니 자식들이 지금 나를 바라보면 내가 느꼈던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리라. 나의 아이들이 자라면 또 다음 세대들이 아마도 이런 감정을 느낄 것이다. 세대 간의 간극은 어쩌면 반복되는 현상일지 모른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노부부가 죽은 아들의 무덤을 찾는 장면이 오랜 여운으로 남는다.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한결같은 사랑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세대, 이념 따위는 다 날아가 버린다. 작가가 진정으로 말하고 싶었던 주제는 이런 것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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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20-11-01 00: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러시아 문학은 이게 처음이었는데요, 어려운 이름과 지명을 보면서 일본소설을 처음 읽던 때가 떠오르더라구요. 입에도 붙지 않는 이름들을 메모해가며 읽다가, 나름의 노하우가 생긴 것이 바로 인물을 이니셜로 외우는 거에요. 그래서 아르카디는 A군, 바자로프는 B군으로 리뷰에 적었어요 ㅋㅋㅋㅋ 적응되면 생각보다 편합니다. 암튼 저는 올드보이와 영보이로 나누었는데, 나비종님은 라떼와 아메로 나누셨군요! 재밌는 표현입니다 ㅎㅎㅎ

일단 양쪽의 입장이 확고하고 어떻게 다른지는 초반부터 잘 나왔지만, 타협의 기미가 안보이니 이 대결구도가 끝까지 가는 것 같아 지루한 감이 없잖아 있더라구요. 그래서 작가가 ‘사랑‘에 대한 내용으로 방향을 튼 것 같은데, 그게 아니었으면 뭐 별 내용없이 끝나지 않았을까 싶어요.

흑과 백의 중간인 회색으로 살아도 문제없는 세상인데, 모 아니면 도를 외치는 사람들이 꼭 있어요. 웃긴 건 본인들도 힘들고 피곤한 성격인 걸 알더군요. 근데 이렇게 쭉 살아와서 고칠수 없다는 거죠. 그놈의 자존심 때문에요. 그게 다 쓸데 없는걸 형님처럼 총까지 맞아봐야 아는건지 ^^;; B군도 마찬가지죠. 그렇게 신봉하던 니힐리즘도 죽음에 이르고 보니 중요한 게 아님을 알게 되다니요.

작가는 바자로프를 인성 쓰레기로 만들기로 작정한듯 싶어요 ㅋㅋㅋ 사랑도 저버리고, 친구도 잡지 않고, 노인공경도 없고, 귀족도 아니면서 아랫사람들을 막 대하는 모습도 그렇고. 그런데 적어놓고 보니 ‘요즘애들‘이 딱 바자로프를 빼닮았네요. 그리고 아메였던 저는 어느새 라떼가 되어버렸구요 ㅎㅎㅎㅎ 아이가 자라서 부모가 되어봐야 부모마음을 알게 되듯이, 아메는 라떼를 이해 못하니까 라떼들이 이해해줘야 할거 같아요^^

이번에도 책보다 서로의 리뷰와 감상이 훨씬 재미있는 시간이었네요 ㅋㅋㅋ 이번 리뷰는 언제쯤 올라올까 계속 기다렸는데, 아슬아슬하게 성공하셨네요 ㅋㅋㅋㅋ 댓글 적다가 어느새 11월이 되었네요. 10월도 고생하셨어요. 점점 연말이 다가와서 여러모로 바쁠텐데 컨디션 조절 잘하시고 건강하세요^^

나비종 2020-11-01 07:59   좋아요 1 | URL
페테르부르크란 도시를 검색해서 찾아보고 그곳이 레닌그라드인 줄 이번에 알았습니다.^^; 일본소설은 자주 접하지 않은 장르인데요, 매력이 있나요? 오호! A군, B군. 좋은 방법이네요. 예전에 비슷한 문장들을 겹치지 않게 쓸 때 번호를 붙여서 순서쌍으로 돌린 적이 있었거든요. 1,2 7,8 2,5 이런 식으로요. 다음번에 복잡한 이름이 나오면 써먹어보겠습니다. 도통 이름이 헷갈려서 말이죠.ㅎㅎ 올드보이와 영보이도 정체성이 확 드러나서 좋은 표현 방법이네요.^^ 저는 큰아버지 캐릭터를 보고 라떼는 말야~ 를 자꾸 외치시길래 그와 대비되는 차가운 지성을 지닌 친구를 아이스아메리카노로 비유를 했거든요.

맞아요. 갑자기 중간부터 사랑이 툭 튀어나온 느낌이 강하더라구요. 오딘초바의 캐릭터가 그렇게 끝까지 갈 줄 몰랐거든요. 책 뒤에 나오는 작가 연보에 나오는 비아르도라는 여인을 많이 반영한 걸까요. 평생에 걸친 사랑이라는 여인이요.
소설을 시작하기 전에 벨린스키와의 추억에 바친다고 나오잖아요. 바자로프의 캐릭터에 그렇게 공을 들였던 것도 그 친구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여요. 벨린스키 곁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까지 남겼다는 걸 보면요.
그나저나 뜬금없이 결투 장면이 나와서 이건 뭐야 했었는데 작가 연보를 보고 푸시킨이 결투로 사망했다는 것도 처음 알았네요, 톨스토이와 결투까지 갈 정도로 언쟁도 벌였다는 걸 보면 당시 사회적인 분위기 중 하나였더군요.
이런 요소들을 보면서 당연한 얘기이겠지만 글이란 작가의 삶을 많이 반영할 수 밖에 없겠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되었습니다.

형님이나 B군이나 다 쓰잘데기 없는 객기로 보여지더라구요. 신념을 굽히지 않던 박새로이는 멋있기라도 했지ㅋㅋㅋ 아! 이태원클라스의 그분이요~ㅎ 저는 드라매니아^^;

작가 현실의 삶에서도 A군의 모태로 추정되는 작가와 B군과 O양의 삼각구도가 있었던 걸까 잠시 근거없는 상상을 해보았어요.^^;
맞습니다. 저 역시 아메였는데 라떼가 되어버리고 이게 투비컨티뉴드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흐름 같기도 해요.ㅎㅎ

물감님의 리뷰와 댓글로 독서 레벨이 몇 단계 업그레이드 되었습니다.ㅋㅋ 책보다 리뷰가 더 흥미있고 댓글도 만만치 않게 작은 리뷰 수준이니 그나마 이 재미로 고전의 사막을 횡단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ㅎㅎ
아슬아슬^^;;; 네. 이번 달에는 좀 더 분발해볼게요. 11월의 첫 날, 눈 비비고 일어나 대댓글부터 쓰는 이 미친 정성의 클라쓰! ㅎㅎ 물감님도 잘 지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