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의 언덕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6
에밀리 브론테 지음, 김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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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부터가 우주인가. 지표로부터 350km 높이에 떠있는 국제우주정거장에 상주하는 사람들도 우주인이라 지칭한다. 실상 우주는 담벼락처럼 경계가 지어진 것이 아니기에 그 시작이 모호하다. 팽창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기에 어디까지라는 범주를 정하기도 어렵다.

사랑에도 범주가 있다면 어디부터 어디까지일까. 드라마에 등장하는 달콤한 장면도 사랑을 연상시키지만 증오로 얼룩진 스릴러물의 어두에도로맨스라는 말이 등장한다. 사랑이 시발점이 되어 이야기가 전개된다. 다른 성격을 지닌 사랑의 일종인 것이다.

지금보다 젊었을 때에는 수채화를 좋아했다. 도화지의 바탕이 비칠 것 같은 투명함이, 하늘거리는 보드라움이 좋았다. 비슷한 이유로 하프 소리와 고운 울림의 목소리도 좋아했다. 사랑 역시 솜사탕 맛이 날 것 같은 감정, 20대였던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사랑의 범주는 딱 거기까지였다.

세월은 나의 범주를 점점 넓혀주었다. 빈센트의 유화가 뿜어내는 노란빛이 강렬함으로 다가왔고, 베이스기타의 저음과 락 음악의 압도적인 사운드에 심장이 뛰었다. 허스키한 목소리에 매료되었고 파스텔 톤과 다른 느낌을 주는 색채들을 알게 되었다. 사랑의 다른 빛깔에도 마음이 끌렸다.

 

소설폭풍의 언덕은 사랑의 범주를 생각하게 한다. 책이 담고 있는 사랑은 강렬하다. 사랑에 메이저와 마이너가 존재한다면 극한의 마이너 쪽에 가깝다. 칙칙한 분위기를 선호하지는 않지만 소설이 전해주는 묵직한 의미는 외면할 수 없는 매력으로 다가온다.

1권의 전반부에 들어서면 머릿속이 온통 뒤죽박죽이 된다. 복잡하게 얽힌 혼인 관계와 동명인 캐서린 때문이다. 성씨만으로 지칭되는 인물이 등장하면 린턴이 할아버지 린턴인지 아버지인 에드거 린턴인지 딸인 캐서린 린턴인지 심지어 린턴 부인인 캐서린인지 헷갈린다. 언쇼도 만만치 않은 양대 산맥이다. 캐서린 언쇼인지 힌들리 언쇼인지 할아버지 언쇼인지 언쇼 부인인 프랜시스 언쇼인지 헤어턴 언쇼인지를 파악하기 위해 책장은 몇 번이나 도돌이표를 찍는다. 흐름을 따라가다 어느 순간 방심하면 다른 인물로 뒤집어지는 게 뫼비우스의 띠 위를 걷는 기분이다. 결정적인 난코스는 히스클리프 부인이다. 히스클리프의 아내인 줄 알았다가 아무래도 이상해서 보면 인물이 꼬여버린다. ! 엄마와 딸 이름을 똑같이 짓는 작명 센스라니! 캐서린이 캐서린 언쇼인지 캐서린 린턴인지. 캐서린 언쇼가 린턴과 결혼했으니 캐서린 린턴으로 불러도 된다. 엄마도 딸도 캐서린 린턴이 되어버리는 상황이다. 게다가 죽은 남편과 사촌 지간인 아씨 캐서린은 한 분은 외가 쪽, 한 분은 친가 쪽이라는 게 당최 무슨 거미줄스러운 관계란 말인가. 안 되겠다! 종이 한 장을 준비하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유전 법칙에 등장하는 가계도를 소설을 읽으면서 써먹을 줄이야. 문장을 짚어가면서 찬찬히 가계도를 그린다. 인물들 사이의 관계도를 파악하고 나서야 이야기의 전개가 이해되기 시작한다.

먼저 언쇼 가문을 정리하면, 1권의 여주인공은 캐서린 언쇼. 오빠는 힌들리 언쇼. 힌들리의 아들이 헤어턴 언쇼이다. 린턴 가문을 정리하면, 1권과 2권의 서브남주인공은 에드거 린턴. 여동생은 이사벨라 린턴이며, 에드거 린턴과 캐서린 언쇼의 딸이 2권의 여주인공 캐서린 린턴이다.

여기까지는 깔끔한 가계도의 배치를 보이는데 복잡한 가계도를 만들어내는 장본인이 바로 폭풍의 언덕집을 음산하게 만든 남주인공 히스클리프이다. 히스클리프가 사랑하지도 않는 이사벨라 린턴과 결혼하면서 복수극이 시작된다. 1부의 캐서린을 향해 린턴 가문에 다리 하나를 걸친 셈인데, 히스클리프와 이사벨라 사이에 아들 린턴이 태어나면서 히스클리프는 문어발식 확장을 도모한다. 자신의 아들과 캐서린의 딸을 결혼시킨 것이다.

린턴 히스클리프와 캐서린 린턴을 부부 관계로 연결한 가계도가 만들어지면서 바둑판에서의 집짓기처럼 폐쇄회로가 완성된다. 가계도의 가장 왼쪽에 자리한 히스클리프는 이제 관계의 사다리를 종횡무진으로 왔다 갔다 하면서 등장인물들에게 강력한 장풍을 뿜어댄다.폭풍의 언덕이라는 소설의 맛을 제대로 음미하자면 가계도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첫 번째 관문이다. 일단 이 문을 무사히 통과하면 이야기는 자못 흥미진진하고 빠르게 흘러간다.

 

사람의 몸은 탄소를 포함하는 유기체이다. 살아있는 생명체는 세포로 구성이 되어있고 세포의 주성분은 단백질이니 결국 우리의 몸은 단백질이 주를 이루고 있을 터이다. 당신이나 나나 몸의 구성 성분은 거의 비슷할 거라는 얘기다. 1부 캐서린이 딘 부인에게 히스클리프에 대하여 말하는 장면에 이런 문장이 있다. ‘그 애가 나보다 더 나 자신이기 때문이야. 그 애의 영혼과 내 영혼이 뭘로 만들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같은 걸로 만들어져 있어.(p130)’ 작가는 소설을 통해 인간의 영혼이 각기 다른 것으로 만들어져 있다고 말한다. 영혼의 구성 성분이라. 영혼이 가시적일 수 있다면, 그것이 사람마다 다르다면? 상상을 하자 기분이 묘해진다. 그렇다면 사랑에 빠지게 되는 두 사람의 영혼은 같은 성분으로 되어있기에 서로 공명을 일으키는 걸까. 그러다 성분의 수명이 다하면 화학 변화를 일으켜 성질이 변하기에 공명이 사라지고 마음이 멀어지는 걸까.

사랑이든 삶이든 범주를 뛰어넘는 역할을 하는 것은 용기인가보다. 2부 캐서린은 이제껏 가보지 못했던 폭풍의 언덕을 바라보면서 딘 부인에게 말한다. ‘하지만 여기는 내가 아는 데고, 저기는 내가 모르는 데잖아.(p300)’ 여기, ‘티티새 지나는 농원을 세상에서 가장 좋은 곳이라 말하며 캐서린의 시선을 돌리려는 딘 부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캐서린은 모르는 데를 향한다. 이로 인해 린턴 히스클리프와 이어지면서 복잡한 복수극의 희생자가 되지만 그녀의 입장이라면 후회하지 않았을 것이다. ‘저마다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선택한 것이고, 자신이 선택한 운명을 정당하게 감수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p291)’ 모르는 데를 선택할 정도의 용기를 지녔다면 스스로 선택한 운명을 감수할 준비도 되어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선택한다. 피선택자에 가까워 보이는 헤어턴도 소설 말미에서는 당당한 선택자로 마무리된다. 헤어턴을 향한 히스클리프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바람이 휘몰아치는데 굽는 나무가 있고 안 굽는 나무가 있는지 두고 보자!(p294)’ 히스클리프가 만들어내는 바람에도 굽지 않는 나무로 남는 헤어턴의 모습은 찡한 울림으로 남는다. 책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재산을 빼앗긴 줄도 모르는 모습이 처음에는 억울하게 굽은 나무로 보이지만, 죽은 히스클리프를 진심으로 애도하는 장면은 그가 굽지 않는 나무로 자라났음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소설은 내내 음산한 분위기와 괴팍한 등장인물들로 둘러싸여 각기 다른 인물들의 입장에서 사랑의 다채로운 색깔을 보여준다. 히스클리프의 극단적인 행동도 마냥 악마 같은 본성으로 치부하기 어렵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 조금은 이해된다. 사랑하는 히스클리프 대신 현실적인 상황에 걸맞는 에드거를 선택한 캐서린의 심리도. 히스클리프의 사랑, 캐서린 언쇼의 사랑, 이사벨라 린턴의 사랑, 에드거 린턴의 사랑, 캐서린 린턴의 사랑, 린턴 히스클리프의 사랑, 헤어턴 언쇼의 사랑, 힌들리 언쇼의 사랑에 이르기까지 온통 사랑이다.

초반에는 정서가 안 맞는 것처럼 삐그덕대다 고비를 무사히 넘기니 사랑에 관한 묵직한 느낌이 오래 머문다. 이런 것이 고전의 매력일까. 마지막 장을 덮고 나니 태풍을 뚫고 지나온 듯 여운이 길다. 비바람이 휘몰아치며 온통 흔들려도 중심에는 맑은 하늘을 품고 있는 태풍처럼 작품의 껍질을 벗기며 파고들면 중심에 사랑이 있다. 기본적인 뼈대는 같은데 지점토, 찰흙 등 사람마다 각기 다른 재료로 덧대는 소조처럼 사랑은 천차만별의 모습을 보이지만 근본적으로는 공통적인 것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인간 영혼이 지닌 맑은 본성 같은 것 말이다.

사랑. 이토록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닌 감정을 단 두 글자로 지칭한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다. 사랑이 포용할 수 있는 범주를 생각한다. 우주 공간이 떠오르며 겹쳐진다. 사랑을 한다는 건 우주를 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가슴이 뻐근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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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19-06-23 14: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랑의 범주는 우주의 범주처럼 가늠하기도, 구분짓기도 어렵군요. 이제는 사랑이란 주제로 수많은 사연과 사례들을 듣는 현대지만, 히스클리프의 사랑은 또 처음보는 형태였어요. 이런 설정을 만들어낸 브론테도 참 대단합니다ㅎㅎ

아 저도 이름때문에 몇번이나 되감기 했는지 몰라요. 이게 무슨 언쇼인지, 이 린턴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정신이 하나도 없더군요... 내 작품에 집중하라는 작가의 의도였는지도 몰라요^^;

그러고보니 나비종님 말대로 ‘용기‘가 모두의 운명을 좌우했네요. 살아가는것도 죽는것도 누구와 함께할건지도 모두 본인들이 선택을 했고 운명을 받아들였어요. 누구하나 내 운명은 왜 이런건지 탓하지는 않았네요. 어쩌면 제가 발견하고자 했던 작가의 메시지가 이거였나 싶어요. 이렇게 나비종님의 리뷰로 많은걸 배워갑니다. 6월도 수고하셨어요ㅎㅎ

나비종 2019-06-23 16:25   좋아요 1 | URL
썩 호감이 가는 사랑은 아니었습니다. 제 정서에는 맞지 않는 인간들이었지요. 소설 속 인물이지만 저런 인간도 있을까 싶더군요. 드라마화된다면 조금보다가 냉큼 채널을 돌리고 싶을 정도의..ㅎㅎ

맞아요. 가계도로 가시화하지 않으면 무지 헷갈리는 설정입니다.

같은 책을 읽고 이렇게 서로 느낌을 공유하고 그 어렵고 짜증났던 난코스를 같이 넘었다고 생각하니 동지애가 느껴지네요. 이게 바로 함께 까는 즐거움인가 봅니다.ㅋㅋ

우리, 2번째 코스도 무사히 통과한 건가요? <설득>도 그렇고, <폭풍의 언덕>도 그렇고 깊이 생각하게 하는 메시지와는 별개로 공감이 가는 내용들은 아니었어요. 그래도 이렇게 함께 읽으니 책을 집어던져버리지 않고 끝까지 갈 수가 있어서 참 좋습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