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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실 - 2005년 제1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김별아 지음 / 문이당 / 2005년 2월
평점 :
절판
'화랑세기'는 540년에서 681년까지의 기간 동안 임명되었던 32명 풍월주의 전기이다. '화랑세기'의 저자 김대문은 대를 이러 풍월주를 배출한 가문이었다. 풍월주 중 1세 위화랑, 4세 이화랑, 12세 보리공, 20세 예원공, 28세 오기공은 김대문의 직계 조상이었다. 681년 김흔돌의 난에 전임 풍월주와 화랑도들이 관여하였던 까닭에 신문왕의 어머니 자의태후가 명하여 풍월주를 우두머리로 하는 화랑도를 폐지하였다. 이는 풍월주를 배출한 김대문의 가문으로서는 커다란 위기였다. '화랑세기'는 바로 그와 같은 김대문 가문의 위기때문에 저술된 책이다. 김대문으로서는 그의 가문이 화랑의 우두머리 풍월주를 배출한 대단한 가문이라는 사실을 밝혀두기 위하여 이 책을 저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당시 신라 최고의 지배세력은 왕을 중심으로 근친 관계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중복된 근친혼을 하며 지배세력으로서의 지위를 다른 세력들에게 개방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화랑세기는 크게 화랑의 세보, 낭정의 대자, 파맥의 정사에 대한 내용을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각 풍월주의 전기에는 풍월주의 가문과 그가 어떤 사람이고 어떠한 일을 하였는지 등에 대한 전기, 풍월주의 행적을 정리한 찬(贊) 그리고 세계(世系)가 나오고 있다. 그 중 세계에는 풍월주의 부모를 비롯한 조상들에 대해 기록하고 있고 그들의 관계를 밝히고 있다. 세계는 각 풍월주의 사회, 정치적 지위를 밝혀주는 좌표였다. 세계는 신라인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장치였고 누구나 알고 있던 사실들이었으며 필요에 따라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신라는 출생에 의하여 사회, 정치적 지위가 정해지는 골품제 사회였기 때문이다. 세계에 대한 이해는 신라사회를 옳게 인식하는 출발점이 된다. 그런데 '삼국사기' 등은 세계가 얼마나 중요한 장치였는지를 이야기하지 앓고 있다. 현재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세계에 나오는 근친혼 등의 관계를 유교적, 기독교적 관점에서 비판하여 '화랑세기'를 위작이라고 한다. 그러나 '화랑세기'를 위작으로 보는 발상 자체가 신라 사회를 움직이던 원리를 옳게 파악하지 못한 것들이다. '화랑세기'는 단순히 풍월주만의 전기일 수 없다. 그 안에 나오는 겹겹이 쌓인 많은 이야기들은 신라의 정치, 사회, 문화에 대한 이야기들일 수 밖에 없다. 다른 어느 사서에서 구할 수 없는 생생한 신라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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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세기'를 통해 본 신라의 역사 - 이종욱(서강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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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실을 읽다보니 '화랑세기'에 가장 많이 등장한 여성이라는 소개글이 있어,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 '화랑세기'를 검색해 보았다. 그 중의 하나가 위에 소개한 이종욱 서강대 사학과 교수의 논문이다. 이교수의 글에 다르면 신라는 골품에 의해 사회, 정치적 지위가 결정되는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으므로 지배계층은 그들의 신분과 기득권을 폐쇄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근친혼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고( 그 결과 당시는 남녀의 문제보다 성골을 왕으로 삼는 일이 더 중요하였으므로 아들이 없던 진평왕을 이어 성골 신분을 가지고 있던 선덕이 여왕이 될 수 있었던 것.) 근친혼이나 사통 관계가 신라인들에게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으며 그러한 관계가 부끄러운 일이거나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는 것.
으흠.....그렇다면 '미실'에서 그려지는 복잡한 근친의 관계도 작금의 우리들에게나 놀랄 노자요 입이 떡 벌어지는 관계였던 것이지 그때 당시로서는 당연한 것이었다는 말이로군.....
하기는 에스키모족 중의 어느 부족은 거의 다른 외부인과의 접촉이 없고 혼인이 부족내부에서 이루어지는 바 멀리서 외부의 사람이 부족을 방문하게 되면 그 사람에 대한 환영의 뜻으로 자기 부족의 처녀와 함께 동침하도록 하고 나중에 그 처녀가 임신을 하면 기뻐하며 자기 부족의 일원으로 그 아이를 길러낸다고 하고 티벳의 고산지대에서는 노동력 확보와 재산의 분할을 막기 위해 형제가 모두 한 여자와 결혼하는 일처다부제를 택하고 있다 하니 일부일처제와 혼인을 통한 성관계의 제도적 규제가 진리는 아닌 바, 당시의 '미실'이라는 여인이 비로서 이해되기 시작한다.
당시의 자유분방한 풍속이나 화랑도의 세부적인 묘사도 충분히 인상적이었지만 이 소설을 읽으면서 더 감탄했던 것은 아름다운 고어(古語)들이었다. 문장의 아름다움에서 오는 매력이라는 게 있다면 바로 이런 소설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이런 매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단원의 막을 내릴 무렵으로 갈수록 흡인력이 떨어지고 너무나 서둘러 마무리를 하려는 작가의 모습에 괜히 서운해졌다. '미실'을 통하여 이야기하려고 했던 것이 도대체 뭐야(버럭!)싶은 생각 - 그만큼 내게는 미실이 역동적으로 다가오지 못했다는 이야기 - , 화랑세기의 내용에 조금 더 살을 붙여 내었을 뿐 온전한 창작의 몫은 부족하지 않았는지........
나야말로 재미있게 읽어놓고 뭣도 모르면서 리뷰 쓴답시고 떠들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으나 이토록 강렬한 이미지의, 그야말로 뚜렷한 개성을 지닌 '미실'을 만났음에도 그녀의 삶을 통해 느껴지는 것이 나를 사로잡지 못했다는 생각을 하는 건 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