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조용히 살지 않기로 하다 : 18세기 인동 장씨 부인*19세기 살인하는 여자들 역사 속 여자, ㅇㅇ하다 3
윤민경.한보람 지음 / 푸른역사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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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역사는 곧 이야기라고도 한다. 수없이 되풀이돼 이젠 진부하게까지 느껴지지만, 사실 이 말엔 두 개의 부사가 생략되어 있다. 하나는 그래봤자. 역사란 고작이야기에 불과하단 것이다. 이는 역사에는 방법론이 없다는 자조로 이어지거나, 그런 게 필요 없다는 완고함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역사는 사실을 발굴해 잘 잇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은 여전히 뿌리 깊다. 그것이 역사학의 건전함과 엄밀함을 유지케 해주는 마지막 보루이기도 하겠지만, 때론 어떠한 가공도 허용치 않는 그 추상같음이 갑갑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역사는 곧 이야기앞에 생략된 또 하나의 부사는 그래도. 이러니저러니 해도 역사는 사람들을 웃고 울게 만드는 이야기란 것이다. 역사의 서사성을 강하게 신뢰하는 이런 입장은 최근 공공역사역사콘텐츠의 부상과 맞물려 더욱 힘을 얻고 있는 듯 보인다. 문제는 역사란 결국 이야기란 주장이 서사 자체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지기보다는, 그저 단순하고 자극적인 을 양산하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강담사나 이야기꾼, 스토리텔러를 자처하는 역사콘텐츠 생산자를 삐딱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젠 기세가 한풀 꺾인 것도 같지만, 역사란 전부 이야기라며 환단고기등의 위서를 거리낌 없이 인용하는 사이비 종교인에 가까운 이들도 여전히 존재한다.

 

역사는 곧 이야기앞에 놓인 그래봤자그래도는 얼핏 상반되는 듯 보이기도 한다. 하나는 이야기의 가치를 무한정 깎아내리고, 다른 하나는 무한정 끌어올린다. 하지만 두 부사는 사실 한 가지 중요한 전제를 공유한다. 바로 이야기란 무엇인지 질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봤자 이야기, ‘그래도 이야기든 역사란 결국 이야기란 게 너무나 자명하기에 이야기에 대한 고민은 공백으로 남는다. 이야기란 단수가 아니다. 역사가 이야기라면 어떤 이야기인가, 이야기는 역사를 담는 그릇인가 아니면 역사 자체인가, 이야기에 따라 역사는, 혹은 역사에 따라 이야기는 어떻게 달라지는가. ‘그래봤자그래도는 이런 질문을 담아내지 못한다.

 

최근 푸른역사에서 나온 여자, 하다시리즈는 이야기에 대한 고민을 가장 진지하게, 동시에 발랄하게 풀어낸 시리즈라 반가웠다. 나는 이 시리즈가 단순히 여성사로만읽히지 않기를 바란다. “페미니즘이 아닌 휴머니즘같은 낡은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여자, 하다시리즈는 말할 것도 없이 여성사고, 그렇기에 이야기 자체를 되묻고 다시 쓴다. 여성사라는 주제가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성은 인류의 시작부터 현재까지 역사의 중요한 행위자였음에도 오랫동안 역사를 쓸 수 없고, 역사로 쓰일 수 없었던 대표적인 존재다. 그랬기에 일찍부터 여성사라는 범주가 만들어져 무려 20여 년 전부터 학부에서도 교양 강의가 열리곤 했으나, 여전히 역사의 한 카테고리 이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도 하다.

 

여자, 하다시리즈의 저자들이 문제 삼고 싶었던 것도 이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여성사가 단순히 정치사, 경제사, 사회사, 사상사처럼 역사학의 범주 하나에 그치지 않으려면, 역사를 다시 쓰고 읽는 시각이자 방법론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는 자연히 이야기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진다. 역사에 기록을 남기지 않거나 못한, 설령 남겼더라도 타자에 의한 기록뿐인 존재들의 이야기는 어떻게 쓰여야 하는가? 다시 말해, 이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해선 어떤 서술 방식이 필요한가?

 

당연하겠지만, 여성사라고 다 같은 여성사가 아니다. 이야기의 형식을 정해놓고 탬플릿처럼 시공을 초월해 적용할 수 없다는 뜻이다. 시리즈를 기획한 장지연이 쓴 두 글, 고려 절부 조씨 부인 이야기와 조선 과부 박씨 이야기는 이를 잘 보여준다. 절부 조씨와 과부 박씨 모두 이곡과 박지원이라는 남성 지식인에 의해 그 행적이 기록되었지만, 이를 제외하면 하나부터 열까지 다른 삶을 살았다. 절부 조씨는 개경 환도와 삼별초 진압, 일본 원정과 카디안의 침입 등 숱한 변란을 겪었으나 일흔 줄 할머니가 될 때까지 건강히 생존했다. 과부 박씨는 폐병 걸린 남편과 이름뿐인 혼례를 치르고, 남편이 죽자 처가와 시댁의 만류에도 삼년상을 치르다 상이 끝나는 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비단 두 사람의 삶뿐 아니라, 살아간 시대도 달랐다. 절부 조씨가 살아간 고려 말기는 여전히 기록이 부족해 많은 부분을 상상으로 채워 넣을 수밖에 없지만, 과부 박씨가 살아간 조선 후기는 계속해서 새로운 사료가 나오는 기록의 바다다. 심지어 서술자인 남성 지식인의 시각도 달랐다. 이곡은 아버지와 시아버지, 남편을 잃고도 꿋꿋하게 살아남아 가문을 지킨 조씨의 삶을 기리고자 글을 썼다. 반면 박지원은 박씨가 죽은 남편에 대한 신의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변의 가십거리가 되었다는 울분을 못 이겨 자살한 게 아닌지 의심했다. 그가 당대에는 파격이었던 풍부한 감정 표현과 구체적인 일화를 곁들여 일찍 사별한 큰누이를 거듭 추모했다는 사실에 비추어보면, 퍽 냉소적이고 매정한 평가였다.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른 두 여성의 삶을 어떻게 이야기화할 것인가. 장지연은 두 여성에 대해 별개의 전략을 취한다. 절부 조씨의 경우 그와 이곡이 말하지 않은것에 주목한다. 조씨는 분명 언니나 시어머니를 비롯한 여성 친족의 도움으로 삶을 꾸려왔고, 이들의 존재가 조씨로 하여금 가부장 없이 절부로 남을 수 있게끔 해주는 조건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곡은 이를 기록하지 않았다. 혹은 조씨가 말하지 않았거나. 아버지와 시아버지, 남편을 잃고도 홀로꿋꿋이 살아온 조씨의 이야기가 당시 고려와 원에서 더 먹혔기때문이다.

 

물론 이곡과 조씨의 목적이 오로지 절부 만들기혹은 절부 되기만은 아니었다. 시골 출신 이곡에게 조씨는 자신이 몰랐던 중심의 내밀한 이야기를 전해줄 수 있는 인물이었다. 강화에서 개경으로 수도가 바뀌고, 변발을 한 고려 임금이 자신보다 지위가 높은 몽골 공주와 함께 돌아오는 모습을 직접 보고 겪었을 조씨의 이야기가 왜 흥미롭지 않았겠는가. 뿐만 아니라 조씨는 근래 정치의 잘잘못과 명문가의 내력또한 소상히 알고 있었다. 비록 직접 전해지진 않지만, 조씨를 비롯한 수많은 여성의 이야기가 그렇게 대문자 역사를 이루는 기둥과 서까래로 전해 내려왔다.

절부 조씨와 달리, 과부 박씨는 그가 직접 말한기록이 분명 존재한다. 다만 박지원이 주목하지 않았을 뿐. 장지연은 박씨 스스로 남긴 언문(한글) 유서에서 열녀로 죽기 위한 치밀하고 흔들림 없는 계획을 읽어낸다. 박씨는 남편과 자신이 함께 묻힐 묫자리가 좁지는 않은지 세심히 살폈다. 남편이 사망한 지 2년이 지난 대상(大祥) 날에는 죽은 뒤에도 인연이 끊어지지 않음을 보이고자 남편과 자신의 저고리를 엮어 매듭(동심결)을 만든 뒤 불살랐다. 주변에 자신이 남편의 상을 마친 뒤 자결하겠다고 미리 알린 뒤 남편이 운명한 시각에 맞춰 독을 먹고 목숨을 끊었다.

 

박씨의 죽음은 장지연의 말마따나 세심하게 준비한 자살의 의례였다. 박지원의 빈정거림처럼 세간의 쑥덕임이 두려워, 혹은 일시적 감정에 치우쳐 즉흥적으로 벌인 일이 아니었다. 거창 선비 신돈항이 쓴 열부 박씨 행록에 따르면, 그는 어린 시절부터 언문으로 쓴 책을 읽으며 효녀와 열녀 이야기가 나오면 소리 높여 낭송하며 흠모하던 유교걸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예나 지금이나 자살을 선뜻 옹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장지연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현대의 연구를 통해 자살의 이유를 제시한다. 당시 여성에게도 남성만큼이나 고결한 존재이고 싶은 명예욕이 존재했으며, 이는 신분을 가리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아전 집안 출신의 박씨처럼 양반 아닌 여성은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난 순간 일상적인 희롱과 비난에 시달리는 것은 물론, ‘보쌈이라 불린 납치 강간의 위협도 마주해야 했다. 이를 고려하면 박씨의 자살은 옹호할 수는 없을지언정, 이해할 수는 있는 일이 된다.

 

이렇듯 고려 말기와 조선 후기, ‘말하지 않은 것말한 것을 실마리 삼아 뻗어가는 이야기는 분명 다르다. 한쪽은 적극적인 상상력을 발휘해 빈 부분을 채워가야 하지만, 다른 한쪽은 분명 존재함에도 당대나 지금이나 읽히지 않았던 기록을 꼼꼼히 다시 읽어가야 한다. 자료가 차고 넘치는 근대와 현대로 오면 이야기가 또 달라진다. 숱한 자료 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정말 재밌고 의미 있는 조각들을 속속 골라내는 것이 중요해진다. 고려부터 현대까지, 시대와 필자에 따라 이야기를 풀어가는 스타일과 인용하는 사료의 성격이 달라지는 것을 보는 재미 역시 여자, 하다시리즈를 읽는 즐거움이었다.

 

그럼에도 일곱 명의 저자가 쓴 아홉 편의 이야기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단순히 여성이 주인공인 이야기가 아니라, 여성을 통한 새로운이야기를 쓰고자 한다는 점이다. 저주로 출세하고 저주로 몰락한 인조의 후궁 조 귀인을 다룬 이민정의 이야기에선 유교 사회 조선의 여백을 읽는다. 조선의 17세기는 국가에나 가정에나 주자학적 질서가 깊게 뿌리내린 시대였다. 하지만 바로 그러한 이유로 천하의 주인이 바뀌고, 종래의 믿음이 흔들리며, 임금과 세자가 반목하는 당대의 비합리적불안과 긴장을 달랠 언어가 부재했다. 조 귀인이 파고든 게 바로 이러한 공백이었다. 조 귀인 이야기는 단순한 에피소드가 아니라 주자학적 합리주의가 결코 떼어낼 수 없는 음울한 신경증의 징후다.

 

일제 식민지기 어멈혹은 식모라 불린 여성 가사노동자에 대한 이아리의 이야기 역시 근대에 대한 새로운 상상으로 우리를 이끈다. 근대의 도래와 함께 서울에서 하나의 계급으로 떠오른 행랑살이는 양반의 후예들이 종래의 전근대적삶을 이어가기 위한 근대적인수단이었던 동시에, 일본인과 조선인이 고용인과 피고용인으로 얼굴을 마주하는 장이기도 했다. 교사나 의사 등의 전문직, 혹은 공장에서의 근대적 노동이 아니었음에도 엄연한 임금노동이었을 뿐 아니라 불황에도 유일하게 수요와 공급 모두 높은 수준으로 유지되던 인기 업종이 식모였다. 흔히 근대의 상징처럼 여겨지곤 하는, 남성 생계 부양자와 전업 주부를 두 축으로 하는 핵가족 모델이 한반도에 뿌리를 내린 시점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스마트폰이나 게임 업계에서 신제품이 나오면 반응은 크게 두 개로 나뉜다. 하나는 순수한 소비자로 제품을 오롯이 즐기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업계인 혹은 오타쿠로 제품을 하나하나 뜯어보며 분석하고 탐구하는 것이다. “여자, 하다시리즈에 대한 내 반응은 후자, 그러니까 업계인과 오타쿠에 가깝다. 어설프게나마 역사를 공부하고 있는지라 이 재미난 이야기들을 순수하게 즐기지 못하는 슬픔도 있지만, 업계인에게는 또 업계인의 즐거움이 있다. 최근 출시된 펄어비스의 붉은 사막을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게임 개발자나 콘텐츠 제작자와 얼추 비슷하다. 나 역시 그들처럼 이야기에 푹 빠진다기보다는, 이야기를 통해 생각과 고민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뻗어나간다.

 

최근 역사학이 다루는 대상은 여성 정도는아무 것도 아닐 만큼 넓어졌다. 그래도 여성은 사람이기라도 하지! 이제 역사학은 은행나무나 다람쥐 같은 동식물은 물론 라디오나 아파트 같은 인공물까지 기꺼이 주인공으로 불러세운다. 문제는 이처럼 서술 대상의 확장에 발맞추어 서술의 방식 역시 달라졌는지다. 가령 남성 지식인이 주인공일 때와 여성 노동자가 주인공일 때, 물고기와 손목시계가 주인공일 때 이야기는 서로 달라질 수밖에 없다. 여기에 시대라는 변수가 추가되면 참고할 수 있는 사료의 양과 성격 역시 크게 바뀐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역사학은 다루는 대상(주인공)의 폭에 비해 이에 맞는 서술(이야기)의 폭은 넓어지지 않은 듯하다.

 

나는 여자, 하다시리즈가 넓어진 주인공의 폭에 맞춰, 이야기의 폭 역시 넓힐 수 있는 매개가 되면 좋겠다. ‘무엇을써야 하는가뿐 아니라, ‘어떻게써야 하는가도 함께 고민하는 광장을 만들어주기를 바란다. 앞서 업계인 이야기를 잠깐 했지만, 한 업계에 몸을 담는다는 건 업종을 불문하고 자기가 속한 판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전체 그림을 잘 보지 못하게 되는 일이기도 하다. 어쩌면 그것이 전문성을 길러가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 통과의례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아쉬운 점은, 최소한 역사학계에 한정하자면 이런 업계인화혹은 전문화가 다양한 이야기에 대한 감각을 사그라들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래도 역사를 업으로 삼은 이들 대부분은 이야기가 좋아서 여기 온 사람들일 텐데, 정작 이야기에 대해 고민할 겨를이 없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물론 이는 그냥 되는 일이 아니다. ‘말하지 않은 것을 읽어내기 위해서든, 이미 말한 것을 새롭게 읽어내기 위해서든, 기존의 이야기를 무식하리만치 꼼꼼히 읽어내는 일이 필요하다. 그렇게 켜켜이 공부를 쌓아간 뒤에야, 비로소 이야기를 다르게 쓸 여지도 생기는 것일 터다. 그 점에서 여자, 하다시리즈를 기획하고 함께 쓴 일곱 명의 저자가 기울인 노력이 무척이나 고맙게 느껴진다. 같은 업계인들로 하여금 다른 이야기를 마주하고 고민할 여지를, 나아가 그런 이야기에 도전해 볼 여지를 주었으므로. “여자, 하다시리즈가 꾸준히 읽히며,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들을 계속해서 만들어주기를 바라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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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기록을 가로채다 : 고려 절부 조씨 부인*조선 기생 가련 역사 속 여자, ㅇㅇ하다 1
장지연.윤민경 지음 / 푸른역사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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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역사는 곧 이야기라고도 한다. 수없이 되풀이돼 이젠 진부하게까지 느껴지지만, 사실 이 말엔 두 개의 부사가 생략되어 있다. 하나는 그래봤자. 역사란 고작이야기에 불과하단 것이다. 이는 역사에는 방법론이 없다는 자조로 이어지거나, 그런 게 필요 없다는 완고함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역사는 사실을 발굴해 잘 잇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은 여전히 뿌리 깊다. 그것이 역사학의 건전함과 엄밀함을 유지케 해주는 마지막 보루이기도 하겠지만, 때론 어떠한 가공도 허용치 않는 그 추상같음이 갑갑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역사는 곧 이야기앞에 생략된 또 하나의 부사는 그래도. 이러니저러니 해도 역사는 사람들을 웃고 울게 만드는 이야기란 것이다. 역사의 서사성을 강하게 신뢰하는 이런 입장은 최근 공공역사역사콘텐츠의 부상과 맞물려 더욱 힘을 얻고 있는 듯 보인다. 문제는 역사란 결국 이야기란 주장이 서사 자체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지기보다는, 그저 단순하고 자극적인 을 양산하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강담사나 이야기꾼, 스토리텔러를 자처하는 역사콘텐츠 생산자를 삐딱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젠 기세가 한풀 꺾인 것도 같지만, 역사란 전부 이야기라며 환단고기등의 위서를 거리낌 없이 인용하는 사이비 종교인에 가까운 이들도 여전히 존재한다.

 

역사는 곧 이야기앞에 놓인 그래봤자그래도는 얼핏 상반되는 듯 보이기도 한다. 하나는 이야기의 가치를 무한정 깎아내리고, 다른 하나는 무한정 끌어올린다. 하지만 두 부사는 사실 한 가지 중요한 전제를 공유한다. 바로 이야기란 무엇인지 질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봤자 이야기, ‘그래도 이야기든 역사란 결국 이야기란 게 너무나 자명하기에 이야기에 대한 고민은 공백으로 남는다. 이야기란 단수가 아니다. 역사가 이야기라면 어떤 이야기인가, 이야기는 역사를 담는 그릇인가 아니면 역사 자체인가, 이야기에 따라 역사는, 혹은 역사에 따라 이야기는 어떻게 달라지는가. ‘그래봤자그래도는 이런 질문을 담아내지 못한다.

 

최근 푸른역사에서 나온 여자, 하다시리즈는 이야기에 대한 고민을 가장 진지하게, 동시에 발랄하게 풀어낸 시리즈라 반가웠다. 나는 이 시리즈가 단순히 여성사로만읽히지 않기를 바란다. “페미니즘이 아닌 휴머니즘같은 낡은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여자, 하다시리즈는 말할 것도 없이 여성사고, 그렇기에 이야기 자체를 되묻고 다시 쓴다. 여성사라는 주제가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성은 인류의 시작부터 현재까지 역사의 중요한 행위자였음에도 오랫동안 역사를 쓸 수 없고, 역사로 쓰일 수 없었던 대표적인 존재다. 그랬기에 일찍부터 여성사라는 범주가 만들어져 무려 20여 년 전부터 학부에서도 교양 강의가 열리곤 했으나, 여전히 역사의 한 카테고리 이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도 하다.

 

여자, 하다시리즈의 저자들이 문제 삼고 싶었던 것도 이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여성사가 단순히 정치사, 경제사, 사회사, 사상사처럼 역사학의 범주 하나에 그치지 않으려면, 역사를 다시 쓰고 읽는 시각이자 방법론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는 자연히 이야기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진다. 역사에 기록을 남기지 않거나 못한, 설령 남겼더라도 타자에 의한 기록뿐인 존재들의 이야기는 어떻게 쓰여야 하는가? 다시 말해, 이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해선 어떤 서술 방식이 필요한가?

 

당연하겠지만, 여성사라고 다 같은 여성사가 아니다. 이야기의 형식을 정해놓고 탬플릿처럼 시공을 초월해 적용할 수 없다는 뜻이다. 시리즈를 기획한 장지연이 쓴 두 글, 고려 절부 조씨 부인 이야기와 조선 과부 박씨 이야기는 이를 잘 보여준다. 절부 조씨와 과부 박씨 모두 이곡과 박지원이라는 남성 지식인에 의해 그 행적이 기록되었지만, 이를 제외하면 하나부터 열까지 다른 삶을 살았다. 절부 조씨는 개경 환도와 삼별초 진압, 일본 원정과 카디안의 침입 등 숱한 변란을 겪었으나 일흔 줄 할머니가 될 때까지 건강히 생존했다. 과부 박씨는 폐병 걸린 남편과 이름뿐인 혼례를 치르고, 남편이 죽자 처가와 시댁의 만류에도 삼년상을 치르다 상이 끝나는 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비단 두 사람의 삶뿐 아니라, 살아간 시대도 달랐다. 절부 조씨가 살아간 고려 말기는 여전히 기록이 부족해 많은 부분을 상상으로 채워 넣을 수밖에 없지만, 과부 박씨가 살아간 조선 후기는 계속해서 새로운 사료가 나오는 기록의 바다다. 심지어 서술자인 남성 지식인의 시각도 달랐다. 이곡은 아버지와 시아버지, 남편을 잃고도 꿋꿋하게 살아남아 가문을 지킨 조씨의 삶을 기리고자 글을 썼다. 반면 박지원은 박씨가 죽은 남편에 대한 신의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변의 가십거리가 되었다는 울분을 못 이겨 자살한 게 아닌지 의심했다. 그가 당대에는 파격이었던 풍부한 감정 표현과 구체적인 일화를 곁들여 일찍 사별한 큰누이를 거듭 추모했다는 사실에 비추어보면, 퍽 냉소적이고 매정한 평가였다.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른 두 여성의 삶을 어떻게 이야기화할 것인가. 장지연은 두 여성에 대해 별개의 전략을 취한다. 절부 조씨의 경우 그와 이곡이 말하지 않은것에 주목한다. 조씨는 분명 언니나 시어머니를 비롯한 여성 친족의 도움으로 삶을 꾸려왔고, 이들의 존재가 조씨로 하여금 가부장 없이 절부로 남을 수 있게끔 해주는 조건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곡은 이를 기록하지 않았다. 혹은 조씨가 말하지 않았거나. 아버지와 시아버지, 남편을 잃고도 홀로꿋꿋이 살아온 조씨의 이야기가 당시 고려와 원에서 더 먹혔기때문이다.

 

물론 이곡과 조씨의 목적이 오로지 절부 만들기혹은 절부 되기만은 아니었다. 시골 출신 이곡에게 조씨는 자신이 몰랐던 중심의 내밀한 이야기를 전해줄 수 있는 인물이었다. 강화에서 개경으로 수도가 바뀌고, 변발을 한 고려 임금이 자신보다 지위가 높은 몽골 공주와 함께 돌아오는 모습을 직접 보고 겪었을 조씨의 이야기가 왜 흥미롭지 않았겠는가. 뿐만 아니라 조씨는 근래 정치의 잘잘못과 명문가의 내력또한 소상히 알고 있었다. 비록 직접 전해지진 않지만, 조씨를 비롯한 수많은 여성의 이야기가 그렇게 대문자 역사를 이루는 기둥과 서까래로 전해 내려왔다.

절부 조씨와 달리, 과부 박씨는 그가 직접 말한기록이 분명 존재한다. 다만 박지원이 주목하지 않았을 뿐. 장지연은 박씨 스스로 남긴 언문(한글) 유서에서 열녀로 죽기 위한 치밀하고 흔들림 없는 계획을 읽어낸다. 박씨는 남편과 자신이 함께 묻힐 묫자리가 좁지는 않은지 세심히 살폈다. 남편이 사망한 지 2년이 지난 대상(大祥) 날에는 죽은 뒤에도 인연이 끊어지지 않음을 보이고자 남편과 자신의 저고리를 엮어 매듭(동심결)을 만든 뒤 불살랐다. 주변에 자신이 남편의 상을 마친 뒤 자결하겠다고 미리 알린 뒤 남편이 운명한 시각에 맞춰 독을 먹고 목숨을 끊었다.

 

박씨의 죽음은 장지연의 말마따나 세심하게 준비한 자살의 의례였다. 박지원의 빈정거림처럼 세간의 쑥덕임이 두려워, 혹은 일시적 감정에 치우쳐 즉흥적으로 벌인 일이 아니었다. 거창 선비 신돈항이 쓴 열부 박씨 행록에 따르면, 그는 어린 시절부터 언문으로 쓴 책을 읽으며 효녀와 열녀 이야기가 나오면 소리 높여 낭송하며 흠모하던 유교걸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예나 지금이나 자살을 선뜻 옹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장지연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현대의 연구를 통해 자살의 이유를 제시한다. 당시 여성에게도 남성만큼이나 고결한 존재이고 싶은 명예욕이 존재했으며, 이는 신분을 가리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아전 집안 출신의 박씨처럼 양반 아닌 여성은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난 순간 일상적인 희롱과 비난에 시달리는 것은 물론, ‘보쌈이라 불린 납치 강간의 위협도 마주해야 했다. 이를 고려하면 박씨의 자살은 옹호할 수는 없을지언정, 이해할 수는 있는 일이 된다.

 

이렇듯 고려 말기와 조선 후기, ‘말하지 않은 것말한 것을 실마리 삼아 뻗어가는 이야기는 분명 다르다. 한쪽은 적극적인 상상력을 발휘해 빈 부분을 채워가야 하지만, 다른 한쪽은 분명 존재함에도 당대나 지금이나 읽히지 않았던 기록을 꼼꼼히 다시 읽어가야 한다. 자료가 차고 넘치는 근대와 현대로 오면 이야기가 또 달라진다. 숱한 자료 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정말 재밌고 의미 있는 조각들을 속속 골라내는 것이 중요해진다. 고려부터 현대까지, 시대와 필자에 따라 이야기를 풀어가는 스타일과 인용하는 사료의 성격이 달라지는 것을 보는 재미 역시 여자, 하다시리즈를 읽는 즐거움이었다.

 

그럼에도 일곱 명의 저자가 쓴 아홉 편의 이야기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단순히 여성이 주인공인 이야기가 아니라, 여성을 통한 새로운이야기를 쓰고자 한다는 점이다. 저주로 출세하고 저주로 몰락한 인조의 후궁 조 귀인을 다룬 이민정의 이야기에선 유교 사회 조선의 여백을 읽는다. 조선의 17세기는 국가에나 가정에나 주자학적 질서가 깊게 뿌리내린 시대였다. 하지만 바로 그러한 이유로 천하의 주인이 바뀌고, 종래의 믿음이 흔들리며, 임금과 세자가 반목하는 당대의 비합리적불안과 긴장을 달랠 언어가 부재했다. 조 귀인이 파고든 게 바로 이러한 공백이었다. 조 귀인 이야기는 단순한 에피소드가 아니라 주자학적 합리주의가 결코 떼어낼 수 없는 음울한 신경증의 징후다.

 

일제 식민지기 어멈혹은 식모라 불린 여성 가사노동자에 대한 이아리의 이야기 역시 근대에 대한 새로운 상상으로 우리를 이끈다. 근대의 도래와 함께 서울에서 하나의 계급으로 떠오른 행랑살이는 양반의 후예들이 종래의 전근대적삶을 이어가기 위한 근대적인수단이었던 동시에, 일본인과 조선인이 고용인과 피고용인으로 얼굴을 마주하는 장이기도 했다. 교사나 의사 등의 전문직, 혹은 공장에서의 근대적 노동이 아니었음에도 엄연한 임금노동이었을 뿐 아니라 불황에도 유일하게 수요와 공급 모두 높은 수준으로 유지되던 인기 업종이 식모였다. 흔히 근대의 상징처럼 여겨지곤 하는, 남성 생계 부양자와 전업 주부를 두 축으로 하는 핵가족 모델이 한반도에 뿌리를 내린 시점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스마트폰이나 게임 업계에서 신제품이 나오면 반응은 크게 두 개로 나뉜다. 하나는 순수한 소비자로 제품을 오롯이 즐기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업계인 혹은 오타쿠로 제품을 하나하나 뜯어보며 분석하고 탐구하는 것이다. “여자, 하다시리즈에 대한 내 반응은 후자, 그러니까 업계인과 오타쿠에 가깝다. 어설프게나마 역사를 공부하고 있는지라 이 재미난 이야기들을 순수하게 즐기지 못하는 슬픔도 있지만, 업계인에게는 또 업계인의 즐거움이 있다. 최근 출시된 펄어비스의 붉은 사막을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게임 개발자나 콘텐츠 제작자와 얼추 비슷하다. 나 역시 그들처럼 이야기에 푹 빠진다기보다는, 이야기를 통해 생각과 고민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뻗어나간다.

 

최근 역사학이 다루는 대상은 여성 정도는아무 것도 아닐 만큼 넓어졌다. 그래도 여성은 사람이기라도 하지! 이제 역사학은 은행나무나 다람쥐 같은 동식물은 물론 라디오나 아파트 같은 인공물까지 기꺼이 주인공으로 불러세운다. 문제는 이처럼 서술 대상의 확장에 발맞추어 서술의 방식 역시 달라졌는지다. 가령 남성 지식인이 주인공일 때와 여성 노동자가 주인공일 때, 물고기와 손목시계가 주인공일 때 이야기는 서로 달라질 수밖에 없다. 여기에 시대라는 변수가 추가되면 참고할 수 있는 사료의 양과 성격 역시 크게 바뀐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역사학은 다루는 대상(주인공)의 폭에 비해 이에 맞는 서술(이야기)의 폭은 넓어지지 않은 듯하다.

 

나는 여자, 하다시리즈가 넓어진 주인공의 폭에 맞춰, 이야기의 폭 역시 넓힐 수 있는 매개가 되면 좋겠다. ‘무엇을써야 하는가뿐 아니라, ‘어떻게써야 하는가도 함께 고민하는 광장을 만들어주기를 바란다. 앞서 업계인 이야기를 잠깐 했지만, 한 업계에 몸을 담는다는 건 업종을 불문하고 자기가 속한 판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전체 그림을 잘 보지 못하게 되는 일이기도 하다. 어쩌면 그것이 전문성을 길러가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 통과의례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아쉬운 점은, 최소한 역사학계에 한정하자면 이런 업계인화혹은 전문화가 다양한 이야기에 대한 감각을 사그라들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래도 역사를 업으로 삼은 이들 대부분은 이야기가 좋아서 여기 온 사람들일 텐데, 정작 이야기에 대해 고민할 겨를이 없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물론 이는 그냥 되는 일이 아니다. ‘말하지 않은 것을 읽어내기 위해서든, 이미 말한 것을 새롭게 읽어내기 위해서든, 기존의 이야기를 무식하리만치 꼼꼼히 읽어내는 일이 필요하다. 그렇게 켜켜이 공부를 쌓아간 뒤에야, 비로소 이야기를 다르게 쓸 여지도 생기는 것일 터다. 그 점에서 여자, 하다시리즈를 기획하고 함께 쓴 일곱 명의 저자가 기울인 노력이 무척이나 고맙게 느껴진다. 같은 업계인들로 하여금 다른 이야기를 마주하고 고민할 여지를, 나아가 그런 이야기에 도전해 볼 여지를 주었으므로. “여자, 하다시리즈가 꾸준히 읽히며,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들을 계속해서 만들어주기를 바라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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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병과 마법사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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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단 20년을 맞이한 배명훈이 그동안 써온 작품들의 집대성이란 생각이 들었다. 전체적인 얼개는《신의 궤도》를 잇고 있지만, 미증유의 재난을 막는 것이 이야기의 핵심이라는 점에서는 《고고심령학자》를 떠올리게 한다. 아버지-스승과 딸-제자라는 구도, 몸짓과 움직임의 역동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춤추는 사신》의 연장선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신의 궤도》에서 날렵하고 경쾌하게 그려진 정주와 유목의 관계는, 《기병과 미법사》에서는 좀 더 복잡하고 무거워졌다. 가장 큰 차이는 정주와 유목이 비로소 동등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는 데 있다. 《신의 궤도》의 초점은 거대하고 무거운 정주의 세계를 교란하고 무너뜨리는 작고 날렵한 유목의 세계에 맞춰져 있다. 반면 《기병과 마법사》는 두 세계를 나름의 장단이 있는, 그렇기에 서로에게 끝없이 침투하며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로 그려낸다.

그렇기에 《기병과 마법사》 속 정주의 세계는 《신의 궤도》처럼 압도적이지 않다. 유목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신의 궤도》의 정주 세계와 유목 세계는 한나라와 흉노를 연상케 했다. 반면 《기병과 마법사》에서 그것은 조선왕조와 누르하치의 등장 이전 여진 부락들 수준으로 작아졌다. 둘 다 고만고만해진 셈이다. 작가 역시 한반도 왕조를 염두에 두고 정주 세계를 그려냈다고 한다. 흥미로운 변화다.

정작 내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정주-유목보다는 몸짓의 역동성이었다. 나는 배명훈을 국제정치학의 시각에서 SF를 쓰는 작가, 세계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SF 작가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새삼 생각해보니 그는 몸짓이 만들어내는 리듬과 역동성에도 굉장히 관심이 많았고, 이를 활자에 담아내려는 (범인에게는 거의 불가능해보이는) 목표에 끝없이 도전해온 작가이기도 했다. 판소리 SF라는 기이한(!) 장르를 시도했던 것 역시 그래서였을 테고. 그동안 그를 너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만 읽어왔구나 싶었다.

다만 정주와 유목, 몸짓과 리듬 모두 배명훈 소설에서 그렇게까지 새로운 것은 아니다. 둘 다 이전까지 배명훈이 관심을 가져온 주제들의 연장선 위에 있다. 그 점에서 《기병과 마법사》는 다소 심심한 소설일지도 모른다. 그가 《미래과거시제》와《화성과 나》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더욱.

하지만 《기병과 마법사》에는 배명훈의 이전 소설들에선 찾아볼 수 없는, 아주 중요한 차이가 있다. 바로 '마법'이다. 그러니까 그는 판타지에 도전한 것이다. 정주와 유목, 몸짓과 리듬이라는, 이전까지 배명훈 소설들을 읽어온 사람에게는 익숙한 주제들을 가져온 것도 이를 위해서일 수 있다. 허허벌판에서 완전히 새로운 장르를 시도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일 수 있으므로.

그렇다면 마법을 다루려는 배명훈의 시도는 성공적이었느냐, 그건 잘 모르겠다. 그는 《SF 작가입니다》에서 판타지와 SF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판타지는 별다른 이유 없이 드래곤이 등장해도 뭐라 하지 않는다. 반면 SF에서 드래곤은 어떤 식으로든 설명되어야 한다. 어떤 점에서 《투명드래곤》은 판타지의 문법을 충실히 따른 작품이다. 드래곤 중 최강이라 누구와 붙어도 이겨버리는 투명드래곤이 '어쨌든' 울부짖는 것이야말로 판타지의 논리이므로.

배명훈은 얼핏 이러한 판타지의 규칙을 잘 따르는 듯 보인다.《기병과 마법사》에서 마법에 별다른 이유와 설명을 붙이진 않으니까. 다만 독자에겐 이유가 없어도 소설에는 이유가 있어야 할 텐데,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니까 독자만큼이나 소설 속 인물들에게도 마법이 낯설고 이질적으로 느껴졌달까. 판타지의 드래곤에게 별다른 설명이 필요없다는 건 이쪽 세계 사람들에게 드래곤이란 우리의 비둘기만큼이다 당연하고 자연스런 존재라는 의미다. 판타지는 이를 깔고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러나 《기병과 마법사》 속 인물들은 독자만큼이나 마법을 처음 본 것처럼 허둥대고, 어색해한다. 마법이 이야기의 전제가 아닌 설명의 대상이 되는 것. 배명훈에 따르면 이는 판타지가 아닌 SF의 문법이다. 물론 SF에서도 마법을 다룰 수 있다. 하지만 《기병과 마법사》에서 마법은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정확히는 전제를 생략하고 설명한다. 말해 소설에서 마법은 누구나 당연히 여길 만큼 자연스럽지 않은데, 갑자기 마법에 대한 설명으로 넘어가 버린다.

그렇기에 《기병과 마법사》는 배명훈의 이전 소설이 그러했듯 세계 자체가 주인공으로 등장하지도 않고, 다른 판타지 소설들처럼 마법을 전제로 깐 상태에서 다른 이야기를 하지도 않는다. 요컨대, 판타지를 SF처럼 썼다. 그럼에도 나는 이 이야기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후반에 너무 확 몰아치는 감이 있지만 배명훈의 소설답게 정교했고, 무엇보다 무척 공들여 쓴 흔적이 느껴졌다. 그렇기에 나 역시 페이지를 휙휙 넘기지 않고 찬찬히 읽게 되고.

배명훈의 가장 멋진 점은 도전을 멈추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이 소설이란 장르로 할 수 있는 것들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끝없이 실험해왔고, 언제나 이전보다 더 멋진 글들을 보여줬다. 《기병과 마법사》도 그런 실험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이 글을 딛고 그가 새롭게 나아갈 지점이 어딜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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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온 미래 - AI 이후의 세계를 경험한 사람들
장강명 지음 / 동아시아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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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읽은 책 중 손꼽히게 좋았다. 논픽션이라기보다는 인문학, 혹은 철학서에 가깝다. 중국어나 일본어로도 번역되어 더 많은 사람이 읽는다면 좋겠다.

난 장강명 작가님(이하 존칭 생략)의 책에서 작가가 그리 강조하지 않은 대목에 꽂히는 경향이 있다. 처음엔 그가 정말 중요하고 하고 싶은 이야기는 슬쩍 숨기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냥 내가 장강명의 책을 살짝 꼬아서 읽는 것도 같다. 작가가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내가 그의 책에서 읽어낸 중요한 이야기가《당선, 합격, 계급》에서는 '피드백 공동체'였다면, 《먼저 온 미래》에서는 '모호함의 소멸'이었다.

인간은 생각보다 이성적이고 합리이지도, 명료하지도 않다. 오히려 인간 문명을 떠받친 건 모호함이었다. 바둑이든, 소설 창착이든 인간 활동은 탁월함이나 기세, 가치, 낭만, 인간다움 등 우리가 똑부러지게 설명하지도 못하는 수많은 개념에 기대 이루어졌다. 그게 뭔지 잘은 알지 못했지만, 대충 어떤 뜻이라는 것 정도는 공유했고, 오히려 이런 모호함 덕에 끝없는 창조나 변주가 이뤄지기도 했다. 비단 언어만 그랬던 게 아니다. 언어로 담아내지 못하는 암묵지 역시 근본적으로는 매뉴얼화할 수 없는, 몸으로 굴러야 체득할 수 있는, 하지만 모두 그런 게 있다는 건 알았던 지식이었으니까.

인공지능의 등장은 이런 모호함의 영역을 크게 줄였다. 사람들은 알파고가 바둑기사의 개성이나 예술성을 죽이고 모두 천편일률적으로 바둑을 두게 만들었다며 비판한다. 하지만 알파고 이전에도 다들 몇몇 거장의 기보를 따라해 저마다의 개성이 사라지고 있다는 한탄이 나왔다. 오히려 알파고가 가져온 중요한 변화는 모든 게 수치화되었다는 데 있다. 기사가 두는 한 수 한 수마다 이길 확률이 몇 프로로 딱 찍혀 나오니 바둑은 수치 게임이 되었고, 바둑 중계는 심하게 말해 경마와 다를 바가 없어졌다.

물론 여전히 모호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그게 인간의 것이 아닐 뿐. 그렇기에 기사들은 AI와 바둑을 두며 초반 포석을 외우다시피 한다. AI가 신의 자리에 오르며 역설적으로 기사들 사이의 격차는 줄었고, 바둑은 민주화되었다. 이는 바둑이라는 행위 자체를 변화시키는 데까지 나아갔다. 뛰어난 천재들의 예술이 아니라, 지독한 공부벌레들의 암기력 테스트가 된 것이다. 이는 AI에 의해 바둑이 기대고 있던 모호함의 영역이 사라지거나 적어도 크게 줄어들었기에 발생한 결과다. 이런 표현을 써도 될지 모르겠지만, 난 AI가 바둑을 '해킹했다고' 생각한다.

이렇듯 AI는 모호함을 잠식한다. 문제는 인간 문명이 지금껏 모호함에 너무나 많이 의존해왔다는 데 있다. 따라서 AI의 발전은 인간의 존립 기반을 흔든다. 아니, 정확히는 그것이 텅 비어있다는, 모두가 알지만 쉬쉬해온 진실을 폭로한다. 비유하자면 오랜 세월 켜켜이 쌓아올린 엄청나게 높은 젠가블럭이 있는데, 그 첫 단에 사실 아무 것도 없다는 게 드러난 셈이다.

모호함의 실체가 드러났다면, 선택은 두 가지다. 그것이 소멸할 수밖에 없음을, 다시 말해 인간 문명을 완전히 새롭게 구성해야 함을 받아들이거나, 이를 보다 정교한 형태로 계속해서 보존하거나. 장강명의 선택은 후자다. 책을 읽은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하거나 아쉬움을 드러낸, 인간만의 가치를 강조한 책의 9장과 10장은 그 점에서 지극히 자연스런 결말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떤 점에서 AI의 등장은 그동안 우리가 모호하게 퉁치고 넘어갔던 가치들, 가령 탁월함이나 예술, 인간다움 등을 보다 진지하게 성찰할 기회를 제공한 셈이다. 애써 덮어온 구멍을 강제로 들여다보게 되었으니, 이젠 어떻게 이를 완전히 메우지 않을지 고민해야 한다.

기실 장강명은 이런 모호함을 아주 오래 전부터 붙들고 고민해온 작가이기도 했다. 《먼저 온 미래》 말미에 나오는 《재수사》가 그랬고, 그에게 한겨레문학상을 안겨준 《표백》이 그랬고,《뤼미에르 피플》과 더불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의 소설인 《열광금지, 에바로드》가 그랬다. 장강명이 《재수사》를 쓰기로 결심한 이유도 더 늦기 전에 도스토예프스키와 같은 탁월함에 도전해보기 위해서였으니. 그는 이과 출신의 냉정한 현실주의자라는 선입견과 반대로, 혹은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충동이나 열정, 영성에 주목해온 작가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 그는 지독한 올드스쿨이다.

그런 만큼 나는 9장과 10장이 다소 성길지언정, 지극히 장강명다운 결말이라 생각한다. 특히 바둑을 주제로 삼는다면 더더욱. 그의 책에 등장하는 바둑기사들의 인터뷰 역시 같은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 책도 그렇게 모호함을 부여잡고 탁월함에 이르고자 분투한 결과로 읽힌다. 갑작스레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평정심을 유지하며 무언가를 해내는 것의 어려움을, 아주 조금은 안다고 생각한다. 작가님의 분투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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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모노
성해나 지음 / 창비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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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이 남지 않는 작가다.

성해나의 《혼모노》를 정신없이 읽어가는 가운데서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생각이었다. 보통 작가들은 여기가 '본진'이구나 싶은 영역이 있다. 그게 작가의 경험이든, 문제의식이나 취미든 한 번 '담그지' 않는 이상 절대 이렇게 쓰기 어려운, 작가 스스로도 쓰면서 엄청 신나보이는 대목이 거의 대부분 나온다.

내가 요 몇 년 사이 읽었던 작가들만 떠올려봐도, 박상영은 첫 직장이었던 잡지사 경험, 김초엽은 연구실 생활과 독서, 장류진은 '연대 감성'과 판교 테크노밸리, 서이제는 시네필 생활과 90년대 초반생 감성, 김사과는 먹물인데다 돈도 많은 엘리트에 대한 (내부자만 가질 수 있는) 환멸, 김금희는 노동과 동식물에 대한 애정, 그리고 천주교, 황정은은 "여씨 아저씨"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아버지와 전파상, 가난, 좋든 싫든 대를 이어가는 (비)혈연 가족, 고영범은 실향민 정서와 교회 등, 그리 섬세하지 않은 독자라도 작가가 어디에 꽂혔는지, 혹은 뿌리를 박고 있는지 대강은 알 수 있다. 작가들 역시 이를 드러내는 데 크게 거리낌이 없는 편이고.

하지만 《혼모노》는, 정말 이상하리만치 작가가 '담갔던' 영역이 느껴지지 않는 소설집이었다. 굉장히 치밀하고 꼼꼼한 조사를 거쳐 소설을 썼다는 것까지는 알겠는데, 그 어디서도 작가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성해나는,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와 상관없이, 모든 주제에 '공정하게' 같은 관심과 정성을 주고 있는 듯 보였다. 심지어 인터뷰에서 관심이 많다고 밝힌 건축을 소재로 한 단편 <구의 집> 역시 다른 작품들과 거의 비슷한 애정이 느껴졌다.

이런 '공정함'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혼모노》에 실린 단편들은 그 다음이 궁금하지 않았다. 재미없거나 밋밋한 소설이란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한 단편에서 어디까지 보여줄 수 있는지를 미리 계산한 뒤, 이를 정교하고 날렵하게 연출하기 때문에 소설을 읽고 남는 '앙금'이나 '여지'가 없다는 이야기다. 이 주제를 가지고 이 이상의 이야기를 할 수 없다는, 이게 끝이라는 걸 너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달까? 작가가 "이게 전부입니다."라고 친절하게, 하지만 건조하게 알려주는 기분이었다.

《혼모노》의 뜨거운 인기 역시 이런 건조함 때문일지도 모른다. "넷플릭스 왜 보냐. 성해나 보면 되는데."란 박정민의 추천사가 너무 충격적이라 그랬는지 몰라도, 나는 성해나 소설이 쇼츠 보는 '요즘 세대' 구미에 맞게 굉장히 강렬하고 감각적일 줄 알았다. 94년생인 작가 역시 이런 새로운 감각에 익숙하리라 지레짐작했고. 하지만 《혼모노》는 오히려 굉장히 고전적이랄지, 기성 소설의 문법을 충실히 따른다. 인터뷰에서도 드라마를 거의 보지 않았다고 이야기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모노》가 '책 안 읽는' 젊은 세대를 끌어들인 이유는, 역시 그 바삭거림 때문일 것이다.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고, 작가의 정교한 설계에 따라 주어진 목표를 향해 단숨에 내달리는 쾌감이 있달까. 이건 김사과 소설의 무자비함과 그로테스크함과는 조금 다른 것 같다. 《혼모노》가 딱히 유머가 돋보이는 책은 아님에도 굉장히 재밌게 읽히는 까닭 역시 그래서라 생각한다. (그럼 유머가 돋보이는 소설가는 누구냐고 물으신다면, 정세랑과 이기호, 그리고 남들이 잘 모르지만 김금희.. 김금희는 특유의 '아재 개그'가 있는데다 상황 자체를 굉장히 웃기게 그려내는 힘이 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혼모노》를 읽으며 등장인물의 얼굴이 잘 그려지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이 소설을 다른 장르로 옮긴다면 뭐가 좋을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서이제의 《0%를 향하여》는 웹툰, 고영범의 《서교동에서 죽다》는 그래픽노블, 박상영의 《대도시의 사랑법》은 드라마, 김금희의 《첫 여름, 완주》는 애니메이션 등 작품마다 이렇게 바꾸면 좋겠다는 장르가 있었는데, 《혼모노》는 그게 없었다.

역설적인 건, 이처럼 성해나가 《혼모노》에서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기 때문에 작가에 대한 궁금증은 더 커진다는 점이다. 원래 뭐 하던 분인지, 왜 작가가 되기로 마음먹었는지, 한 번 '담근' 곳은 어디인지 등. 그래서 지난 1주일 동안 작가 인터뷰도 보고, 공저자로 참여한 소설집까진 아니더라도 책으로 나온 작가의 모든 소설들을 찾아 읽었다. 다소 의외였지만, 다른 작품들에선 작가의 '흔적'이 퍽 잘 느껴졌다. 가령 학습지 교사였던 어머니, 86세대를 향한 애증, 언젠가 깨질 수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는 인간 본성 등. 작가가 인터뷰도 많이 하는 등 신비주의를 고수하지도 않고.

내가 이상한 탓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혼모노》보다는 작가의 '흔적'이 드러나는 소설이 더 좋았다. 건조하게 웃으면서 "이게 전부에요."라 말하는 소설보다는 다소 성길지언정 여운을 남기는 소설이 좋았고. 내가 가장 재밌게 읽은 성해나 소설은 《두고 온 여름》이었다. 《혼모노》에서도 뭔가 덜 완성된 것 같던 <길티 클럽>이 가장 좋았고. 그렇다면 성해나는 왜 '여지'를 주지 않는, 날렵하고 정교한 소설을 쓰게 되었을까? 그 이유가 계속 궁금했다. 주제넘은 호기심일 수 있겠지만.

나는 성해나가 자신이 한 번 '담갔던' 무언가를 갖고 장편을 써주면 좋겠다. 지금까지 써온 글만 봐도 그렇고, 그는 단편에 특화된, 혹은 단편에 맞는 몸을 의도적으로 만들어온 작가로 보인다. 애초에 등단도 중편으로 했고. 《두고 온 여름》역시 민음사의 "오늘의 젊은 작가" 분량에도 못 미치는 중편에 가까운 소설이다. 그런 성해나가 다소 성기고 들쑥날쑥할지언정, 자기가 정말 좋아하는 주제로 끝까지 밀고나간 장편을 읽고 싶다.

단순히 단편은 많이 읽었으니 이젠 장편을 읽고싶단 마음은 아니다. 《혼모노》를 봐도 그렇고, 인터뷰를 읽어도 그렇고, 성해나는 굉장히 성실하고 안정적인 사람인 듯 보인다. 자료 조사도 꼼꼼하고 철저하다. 공부를 했어도 훌륭한 연구자가 되었으리라 생각할 정도로. 괜히 건축을 좋아하는 게 아니구나 싶달까. 늘 불안하고 잘 흔들리는 사람으로서 이런 안정감과 뚝심은 굉장히 부러운 재능인데, 이는 단편만큼이나 장편에도 어울린다 생각한다. 장기인 자료조사를 살릴 수 있는 역사소설도 좋고, 의외로 추리소설도 굉장히 잘 쓸 것 같다. 뭐가 되었든 성해나가 계속 소설을 써주면 좋겠다. 앞으로도 그의 글을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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