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조용히 살지 않기로 하다 : 18세기 인동 장씨 부인*19세기 살인하는 여자들 역사 속 여자, ㅇㅇ하다 3
윤민경.한보람 지음 / 푸른역사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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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역사는 곧 이야기라고도 한다. 수없이 되풀이돼 이젠 진부하게까지 느껴지지만, 사실 이 말엔 두 개의 부사가 생략되어 있다. 하나는 그래봤자. 역사란 고작이야기에 불과하단 것이다. 이는 역사에는 방법론이 없다는 자조로 이어지거나, 그런 게 필요 없다는 완고함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역사는 사실을 발굴해 잘 잇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은 여전히 뿌리 깊다. 그것이 역사학의 건전함과 엄밀함을 유지케 해주는 마지막 보루이기도 하겠지만, 때론 어떠한 가공도 허용치 않는 그 추상같음이 갑갑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역사는 곧 이야기앞에 생략된 또 하나의 부사는 그래도. 이러니저러니 해도 역사는 사람들을 웃고 울게 만드는 이야기란 것이다. 역사의 서사성을 강하게 신뢰하는 이런 입장은 최근 공공역사역사콘텐츠의 부상과 맞물려 더욱 힘을 얻고 있는 듯 보인다. 문제는 역사란 결국 이야기란 주장이 서사 자체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지기보다는, 그저 단순하고 자극적인 을 양산하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강담사나 이야기꾼, 스토리텔러를 자처하는 역사콘텐츠 생산자를 삐딱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젠 기세가 한풀 꺾인 것도 같지만, 역사란 전부 이야기라며 환단고기등의 위서를 거리낌 없이 인용하는 사이비 종교인에 가까운 이들도 여전히 존재한다.

 

역사는 곧 이야기앞에 놓인 그래봤자그래도는 얼핏 상반되는 듯 보이기도 한다. 하나는 이야기의 가치를 무한정 깎아내리고, 다른 하나는 무한정 끌어올린다. 하지만 두 부사는 사실 한 가지 중요한 전제를 공유한다. 바로 이야기란 무엇인지 질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봤자 이야기, ‘그래도 이야기든 역사란 결국 이야기란 게 너무나 자명하기에 이야기에 대한 고민은 공백으로 남는다. 이야기란 단수가 아니다. 역사가 이야기라면 어떤 이야기인가, 이야기는 역사를 담는 그릇인가 아니면 역사 자체인가, 이야기에 따라 역사는, 혹은 역사에 따라 이야기는 어떻게 달라지는가. ‘그래봤자그래도는 이런 질문을 담아내지 못한다.

 

최근 푸른역사에서 나온 여자, 하다시리즈는 이야기에 대한 고민을 가장 진지하게, 동시에 발랄하게 풀어낸 시리즈라 반가웠다. 나는 이 시리즈가 단순히 여성사로만읽히지 않기를 바란다. “페미니즘이 아닌 휴머니즘같은 낡은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여자, 하다시리즈는 말할 것도 없이 여성사고, 그렇기에 이야기 자체를 되묻고 다시 쓴다. 여성사라는 주제가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성은 인류의 시작부터 현재까지 역사의 중요한 행위자였음에도 오랫동안 역사를 쓸 수 없고, 역사로 쓰일 수 없었던 대표적인 존재다. 그랬기에 일찍부터 여성사라는 범주가 만들어져 무려 20여 년 전부터 학부에서도 교양 강의가 열리곤 했으나, 여전히 역사의 한 카테고리 이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도 하다.

 

여자, 하다시리즈의 저자들이 문제 삼고 싶었던 것도 이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여성사가 단순히 정치사, 경제사, 사회사, 사상사처럼 역사학의 범주 하나에 그치지 않으려면, 역사를 다시 쓰고 읽는 시각이자 방법론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는 자연히 이야기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진다. 역사에 기록을 남기지 않거나 못한, 설령 남겼더라도 타자에 의한 기록뿐인 존재들의 이야기는 어떻게 쓰여야 하는가? 다시 말해, 이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해선 어떤 서술 방식이 필요한가?

 

당연하겠지만, 여성사라고 다 같은 여성사가 아니다. 이야기의 형식을 정해놓고 탬플릿처럼 시공을 초월해 적용할 수 없다는 뜻이다. 시리즈를 기획한 장지연이 쓴 두 글, 고려 절부 조씨 부인 이야기와 조선 과부 박씨 이야기는 이를 잘 보여준다. 절부 조씨와 과부 박씨 모두 이곡과 박지원이라는 남성 지식인에 의해 그 행적이 기록되었지만, 이를 제외하면 하나부터 열까지 다른 삶을 살았다. 절부 조씨는 개경 환도와 삼별초 진압, 일본 원정과 카디안의 침입 등 숱한 변란을 겪었으나 일흔 줄 할머니가 될 때까지 건강히 생존했다. 과부 박씨는 폐병 걸린 남편과 이름뿐인 혼례를 치르고, 남편이 죽자 처가와 시댁의 만류에도 삼년상을 치르다 상이 끝나는 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비단 두 사람의 삶뿐 아니라, 살아간 시대도 달랐다. 절부 조씨가 살아간 고려 말기는 여전히 기록이 부족해 많은 부분을 상상으로 채워 넣을 수밖에 없지만, 과부 박씨가 살아간 조선 후기는 계속해서 새로운 사료가 나오는 기록의 바다다. 심지어 서술자인 남성 지식인의 시각도 달랐다. 이곡은 아버지와 시아버지, 남편을 잃고도 꿋꿋하게 살아남아 가문을 지킨 조씨의 삶을 기리고자 글을 썼다. 반면 박지원은 박씨가 죽은 남편에 대한 신의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변의 가십거리가 되었다는 울분을 못 이겨 자살한 게 아닌지 의심했다. 그가 당대에는 파격이었던 풍부한 감정 표현과 구체적인 일화를 곁들여 일찍 사별한 큰누이를 거듭 추모했다는 사실에 비추어보면, 퍽 냉소적이고 매정한 평가였다.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른 두 여성의 삶을 어떻게 이야기화할 것인가. 장지연은 두 여성에 대해 별개의 전략을 취한다. 절부 조씨의 경우 그와 이곡이 말하지 않은것에 주목한다. 조씨는 분명 언니나 시어머니를 비롯한 여성 친족의 도움으로 삶을 꾸려왔고, 이들의 존재가 조씨로 하여금 가부장 없이 절부로 남을 수 있게끔 해주는 조건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곡은 이를 기록하지 않았다. 혹은 조씨가 말하지 않았거나. 아버지와 시아버지, 남편을 잃고도 홀로꿋꿋이 살아온 조씨의 이야기가 당시 고려와 원에서 더 먹혔기때문이다.

 

물론 이곡과 조씨의 목적이 오로지 절부 만들기혹은 절부 되기만은 아니었다. 시골 출신 이곡에게 조씨는 자신이 몰랐던 중심의 내밀한 이야기를 전해줄 수 있는 인물이었다. 강화에서 개경으로 수도가 바뀌고, 변발을 한 고려 임금이 자신보다 지위가 높은 몽골 공주와 함께 돌아오는 모습을 직접 보고 겪었을 조씨의 이야기가 왜 흥미롭지 않았겠는가. 뿐만 아니라 조씨는 근래 정치의 잘잘못과 명문가의 내력또한 소상히 알고 있었다. 비록 직접 전해지진 않지만, 조씨를 비롯한 수많은 여성의 이야기가 그렇게 대문자 역사를 이루는 기둥과 서까래로 전해 내려왔다.

절부 조씨와 달리, 과부 박씨는 그가 직접 말한기록이 분명 존재한다. 다만 박지원이 주목하지 않았을 뿐. 장지연은 박씨 스스로 남긴 언문(한글) 유서에서 열녀로 죽기 위한 치밀하고 흔들림 없는 계획을 읽어낸다. 박씨는 남편과 자신이 함께 묻힐 묫자리가 좁지는 않은지 세심히 살폈다. 남편이 사망한 지 2년이 지난 대상(大祥) 날에는 죽은 뒤에도 인연이 끊어지지 않음을 보이고자 남편과 자신의 저고리를 엮어 매듭(동심결)을 만든 뒤 불살랐다. 주변에 자신이 남편의 상을 마친 뒤 자결하겠다고 미리 알린 뒤 남편이 운명한 시각에 맞춰 독을 먹고 목숨을 끊었다.

 

박씨의 죽음은 장지연의 말마따나 세심하게 준비한 자살의 의례였다. 박지원의 빈정거림처럼 세간의 쑥덕임이 두려워, 혹은 일시적 감정에 치우쳐 즉흥적으로 벌인 일이 아니었다. 거창 선비 신돈항이 쓴 열부 박씨 행록에 따르면, 그는 어린 시절부터 언문으로 쓴 책을 읽으며 효녀와 열녀 이야기가 나오면 소리 높여 낭송하며 흠모하던 유교걸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예나 지금이나 자살을 선뜻 옹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장지연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현대의 연구를 통해 자살의 이유를 제시한다. 당시 여성에게도 남성만큼이나 고결한 존재이고 싶은 명예욕이 존재했으며, 이는 신분을 가리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아전 집안 출신의 박씨처럼 양반 아닌 여성은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난 순간 일상적인 희롱과 비난에 시달리는 것은 물론, ‘보쌈이라 불린 납치 강간의 위협도 마주해야 했다. 이를 고려하면 박씨의 자살은 옹호할 수는 없을지언정, 이해할 수는 있는 일이 된다.

 

이렇듯 고려 말기와 조선 후기, ‘말하지 않은 것말한 것을 실마리 삼아 뻗어가는 이야기는 분명 다르다. 한쪽은 적극적인 상상력을 발휘해 빈 부분을 채워가야 하지만, 다른 한쪽은 분명 존재함에도 당대나 지금이나 읽히지 않았던 기록을 꼼꼼히 다시 읽어가야 한다. 자료가 차고 넘치는 근대와 현대로 오면 이야기가 또 달라진다. 숱한 자료 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정말 재밌고 의미 있는 조각들을 속속 골라내는 것이 중요해진다. 고려부터 현대까지, 시대와 필자에 따라 이야기를 풀어가는 스타일과 인용하는 사료의 성격이 달라지는 것을 보는 재미 역시 여자, 하다시리즈를 읽는 즐거움이었다.

 

그럼에도 일곱 명의 저자가 쓴 아홉 편의 이야기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단순히 여성이 주인공인 이야기가 아니라, 여성을 통한 새로운이야기를 쓰고자 한다는 점이다. 저주로 출세하고 저주로 몰락한 인조의 후궁 조 귀인을 다룬 이민정의 이야기에선 유교 사회 조선의 여백을 읽는다. 조선의 17세기는 국가에나 가정에나 주자학적 질서가 깊게 뿌리내린 시대였다. 하지만 바로 그러한 이유로 천하의 주인이 바뀌고, 종래의 믿음이 흔들리며, 임금과 세자가 반목하는 당대의 비합리적불안과 긴장을 달랠 언어가 부재했다. 조 귀인이 파고든 게 바로 이러한 공백이었다. 조 귀인 이야기는 단순한 에피소드가 아니라 주자학적 합리주의가 결코 떼어낼 수 없는 음울한 신경증의 징후다.

 

일제 식민지기 어멈혹은 식모라 불린 여성 가사노동자에 대한 이아리의 이야기 역시 근대에 대한 새로운 상상으로 우리를 이끈다. 근대의 도래와 함께 서울에서 하나의 계급으로 떠오른 행랑살이는 양반의 후예들이 종래의 전근대적삶을 이어가기 위한 근대적인수단이었던 동시에, 일본인과 조선인이 고용인과 피고용인으로 얼굴을 마주하는 장이기도 했다. 교사나 의사 등의 전문직, 혹은 공장에서의 근대적 노동이 아니었음에도 엄연한 임금노동이었을 뿐 아니라 불황에도 유일하게 수요와 공급 모두 높은 수준으로 유지되던 인기 업종이 식모였다. 흔히 근대의 상징처럼 여겨지곤 하는, 남성 생계 부양자와 전업 주부를 두 축으로 하는 핵가족 모델이 한반도에 뿌리를 내린 시점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스마트폰이나 게임 업계에서 신제품이 나오면 반응은 크게 두 개로 나뉜다. 하나는 순수한 소비자로 제품을 오롯이 즐기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업계인 혹은 오타쿠로 제품을 하나하나 뜯어보며 분석하고 탐구하는 것이다. “여자, 하다시리즈에 대한 내 반응은 후자, 그러니까 업계인과 오타쿠에 가깝다. 어설프게나마 역사를 공부하고 있는지라 이 재미난 이야기들을 순수하게 즐기지 못하는 슬픔도 있지만, 업계인에게는 또 업계인의 즐거움이 있다. 최근 출시된 펄어비스의 붉은 사막을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게임 개발자나 콘텐츠 제작자와 얼추 비슷하다. 나 역시 그들처럼 이야기에 푹 빠진다기보다는, 이야기를 통해 생각과 고민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뻗어나간다.

 

최근 역사학이 다루는 대상은 여성 정도는아무 것도 아닐 만큼 넓어졌다. 그래도 여성은 사람이기라도 하지! 이제 역사학은 은행나무나 다람쥐 같은 동식물은 물론 라디오나 아파트 같은 인공물까지 기꺼이 주인공으로 불러세운다. 문제는 이처럼 서술 대상의 확장에 발맞추어 서술의 방식 역시 달라졌는지다. 가령 남성 지식인이 주인공일 때와 여성 노동자가 주인공일 때, 물고기와 손목시계가 주인공일 때 이야기는 서로 달라질 수밖에 없다. 여기에 시대라는 변수가 추가되면 참고할 수 있는 사료의 양과 성격 역시 크게 바뀐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역사학은 다루는 대상(주인공)의 폭에 비해 이에 맞는 서술(이야기)의 폭은 넓어지지 않은 듯하다.

 

나는 여자, 하다시리즈가 넓어진 주인공의 폭에 맞춰, 이야기의 폭 역시 넓힐 수 있는 매개가 되면 좋겠다. ‘무엇을써야 하는가뿐 아니라, ‘어떻게써야 하는가도 함께 고민하는 광장을 만들어주기를 바란다. 앞서 업계인 이야기를 잠깐 했지만, 한 업계에 몸을 담는다는 건 업종을 불문하고 자기가 속한 판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전체 그림을 잘 보지 못하게 되는 일이기도 하다. 어쩌면 그것이 전문성을 길러가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 통과의례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아쉬운 점은, 최소한 역사학계에 한정하자면 이런 업계인화혹은 전문화가 다양한 이야기에 대한 감각을 사그라들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래도 역사를 업으로 삼은 이들 대부분은 이야기가 좋아서 여기 온 사람들일 텐데, 정작 이야기에 대해 고민할 겨를이 없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물론 이는 그냥 되는 일이 아니다. ‘말하지 않은 것을 읽어내기 위해서든, 이미 말한 것을 새롭게 읽어내기 위해서든, 기존의 이야기를 무식하리만치 꼼꼼히 읽어내는 일이 필요하다. 그렇게 켜켜이 공부를 쌓아간 뒤에야, 비로소 이야기를 다르게 쓸 여지도 생기는 것일 터다. 그 점에서 여자, 하다시리즈를 기획하고 함께 쓴 일곱 명의 저자가 기울인 노력이 무척이나 고맙게 느껴진다. 같은 업계인들로 하여금 다른 이야기를 마주하고 고민할 여지를, 나아가 그런 이야기에 도전해 볼 여지를 주었으므로. “여자, 하다시리즈가 꾸준히 읽히며,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들을 계속해서 만들어주기를 바라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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