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병과 마법사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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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단 20년을 맞이한 배명훈이 그동안 써온 작품들의 집대성이란 생각이 들었다. 전체적인 얼개는《신의 궤도》를 잇고 있지만, 미증유의 재난을 막는 것이 이야기의 핵심이라는 점에서는 《고고심령학자》를 떠올리게 한다. 아버지-스승과 딸-제자라는 구도, 몸짓과 움직임의 역동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춤추는 사신》의 연장선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신의 궤도》에서 날렵하고 경쾌하게 그려진 정주와 유목의 관계는, 《기병과 미법사》에서는 좀 더 복잡하고 무거워졌다. 가장 큰 차이는 정주와 유목이 비로소 동등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는 데 있다. 《신의 궤도》의 초점은 거대하고 무거운 정주의 세계를 교란하고 무너뜨리는 작고 날렵한 유목의 세계에 맞춰져 있다. 반면 《기병과 마법사》는 두 세계를 나름의 장단이 있는, 그렇기에 서로에게 끝없이 침투하며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로 그려낸다.

그렇기에 《기병과 마법사》 속 정주의 세계는 《신의 궤도》처럼 압도적이지 않다. 유목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신의 궤도》의 정주 세계와 유목 세계는 한나라와 흉노를 연상케 했다. 반면 《기병과 마법사》에서 그것은 조선왕조와 누르하치의 등장 이전 여진 부락들 수준으로 작아졌다. 둘 다 고만고만해진 셈이다. 작가 역시 한반도 왕조를 염두에 두고 정주 세계를 그려냈다고 한다. 흥미로운 변화다.

정작 내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정주-유목보다는 몸짓의 역동성이었다. 나는 배명훈을 국제정치학의 시각에서 SF를 쓰는 작가, 세계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SF 작가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새삼 생각해보니 그는 몸짓이 만들어내는 리듬과 역동성에도 굉장히 관심이 많았고, 이를 활자에 담아내려는 (범인에게는 거의 불가능해보이는) 목표에 끝없이 도전해온 작가이기도 했다. 판소리 SF라는 기이한(!) 장르를 시도했던 것 역시 그래서였을 테고. 그동안 그를 너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만 읽어왔구나 싶었다.

다만 정주와 유목, 몸짓과 리듬 모두 배명훈 소설에서 그렇게까지 새로운 것은 아니다. 둘 다 이전까지 배명훈이 관심을 가져온 주제들의 연장선 위에 있다. 그 점에서 《기병과 마법사》는 다소 심심한 소설일지도 모른다. 그가 《미래과거시제》와《화성과 나》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더욱.

하지만 《기병과 마법사》에는 배명훈의 이전 소설들에선 찾아볼 수 없는, 아주 중요한 차이가 있다. 바로 '마법'이다. 그러니까 그는 판타지에 도전한 것이다. 정주와 유목, 몸짓과 리듬이라는, 이전까지 배명훈 소설들을 읽어온 사람에게는 익숙한 주제들을 가져온 것도 이를 위해서일 수 있다. 허허벌판에서 완전히 새로운 장르를 시도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일 수 있으므로.

그렇다면 마법을 다루려는 배명훈의 시도는 성공적이었느냐, 그건 잘 모르겠다. 그는 《SF 작가입니다》에서 판타지와 SF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판타지는 별다른 이유 없이 드래곤이 등장해도 뭐라 하지 않는다. 반면 SF에서 드래곤은 어떤 식으로든 설명되어야 한다. 어떤 점에서 《투명드래곤》은 판타지의 문법을 충실히 따른 작품이다. 드래곤 중 최강이라 누구와 붙어도 이겨버리는 투명드래곤이 '어쨌든' 울부짖는 것이야말로 판타지의 논리이므로.

배명훈은 얼핏 이러한 판타지의 규칙을 잘 따르는 듯 보인다.《기병과 마법사》에서 마법에 별다른 이유와 설명을 붙이진 않으니까. 다만 독자에겐 이유가 없어도 소설에는 이유가 있어야 할 텐데,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니까 독자만큼이나 소설 속 인물들에게도 마법이 낯설고 이질적으로 느껴졌달까. 판타지의 드래곤에게 별다른 설명이 필요없다는 건 이쪽 세계 사람들에게 드래곤이란 우리의 비둘기만큼이다 당연하고 자연스런 존재라는 의미다. 판타지는 이를 깔고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러나 《기병과 마법사》 속 인물들은 독자만큼이나 마법을 처음 본 것처럼 허둥대고, 어색해한다. 마법이 이야기의 전제가 아닌 설명의 대상이 되는 것. 배명훈에 따르면 이는 판타지가 아닌 SF의 문법이다. 물론 SF에서도 마법을 다룰 수 있다. 하지만 《기병과 마법사》에서 마법은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정확히는 전제를 생략하고 설명한다. 말해 소설에서 마법은 누구나 당연히 여길 만큼 자연스럽지 않은데, 갑자기 마법에 대한 설명으로 넘어가 버린다.

그렇기에 《기병과 마법사》는 배명훈의 이전 소설이 그러했듯 세계 자체가 주인공으로 등장하지도 않고, 다른 판타지 소설들처럼 마법을 전제로 깐 상태에서 다른 이야기를 하지도 않는다. 요컨대, 판타지를 SF처럼 썼다. 그럼에도 나는 이 이야기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후반에 너무 확 몰아치는 감이 있지만 배명훈의 소설답게 정교했고, 무엇보다 무척 공들여 쓴 흔적이 느껴졌다. 그렇기에 나 역시 페이지를 휙휙 넘기지 않고 찬찬히 읽게 되고.

배명훈의 가장 멋진 점은 도전을 멈추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이 소설이란 장르로 할 수 있는 것들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끝없이 실험해왔고, 언제나 이전보다 더 멋진 글들을 보여줬다. 《기병과 마법사》도 그런 실험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이 글을 딛고 그가 새롭게 나아갈 지점이 어딜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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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온 미래 - AI 이후의 세계를 경험한 사람들
장강명 지음 / 동아시아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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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읽은 책 중 손꼽히게 좋았다. 논픽션이라기보다는 인문학, 혹은 철학서에 가깝다. 중국어나 일본어로도 번역되어 더 많은 사람이 읽는다면 좋겠다.

난 장강명 작가님(이하 존칭 생략)의 책에서 작가가 그리 강조하지 않은 대목에 꽂히는 경향이 있다. 처음엔 그가 정말 중요하고 하고 싶은 이야기는 슬쩍 숨기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냥 내가 장강명의 책을 살짝 꼬아서 읽는 것도 같다. 작가가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내가 그의 책에서 읽어낸 중요한 이야기가《당선, 합격, 계급》에서는 '피드백 공동체'였다면, 《먼저 온 미래》에서는 '모호함의 소멸'이었다.

인간은 생각보다 이성적이고 합리이지도, 명료하지도 않다. 오히려 인간 문명을 떠받친 건 모호함이었다. 바둑이든, 소설 창착이든 인간 활동은 탁월함이나 기세, 가치, 낭만, 인간다움 등 우리가 똑부러지게 설명하지도 못하는 수많은 개념에 기대 이루어졌다. 그게 뭔지 잘은 알지 못했지만, 대충 어떤 뜻이라는 것 정도는 공유했고, 오히려 이런 모호함 덕에 끝없는 창조나 변주가 이뤄지기도 했다. 비단 언어만 그랬던 게 아니다. 언어로 담아내지 못하는 암묵지 역시 근본적으로는 매뉴얼화할 수 없는, 몸으로 굴러야 체득할 수 있는, 하지만 모두 그런 게 있다는 건 알았던 지식이었으니까.

인공지능의 등장은 이런 모호함의 영역을 크게 줄였다. 사람들은 알파고가 바둑기사의 개성이나 예술성을 죽이고 모두 천편일률적으로 바둑을 두게 만들었다며 비판한다. 하지만 알파고 이전에도 다들 몇몇 거장의 기보를 따라해 저마다의 개성이 사라지고 있다는 한탄이 나왔다. 오히려 알파고가 가져온 중요한 변화는 모든 게 수치화되었다는 데 있다. 기사가 두는 한 수 한 수마다 이길 확률이 몇 프로로 딱 찍혀 나오니 바둑은 수치 게임이 되었고, 바둑 중계는 심하게 말해 경마와 다를 바가 없어졌다.

물론 여전히 모호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그게 인간의 것이 아닐 뿐. 그렇기에 기사들은 AI와 바둑을 두며 초반 포석을 외우다시피 한다. AI가 신의 자리에 오르며 역설적으로 기사들 사이의 격차는 줄었고, 바둑은 민주화되었다. 이는 바둑이라는 행위 자체를 변화시키는 데까지 나아갔다. 뛰어난 천재들의 예술이 아니라, 지독한 공부벌레들의 암기력 테스트가 된 것이다. 이는 AI에 의해 바둑이 기대고 있던 모호함의 영역이 사라지거나 적어도 크게 줄어들었기에 발생한 결과다. 이런 표현을 써도 될지 모르겠지만, 난 AI가 바둑을 '해킹했다고' 생각한다.

이렇듯 AI는 모호함을 잠식한다. 문제는 인간 문명이 지금껏 모호함에 너무나 많이 의존해왔다는 데 있다. 따라서 AI의 발전은 인간의 존립 기반을 흔든다. 아니, 정확히는 그것이 텅 비어있다는, 모두가 알지만 쉬쉬해온 진실을 폭로한다. 비유하자면 오랜 세월 켜켜이 쌓아올린 엄청나게 높은 젠가블럭이 있는데, 그 첫 단에 사실 아무 것도 없다는 게 드러난 셈이다.

모호함의 실체가 드러났다면, 선택은 두 가지다. 그것이 소멸할 수밖에 없음을, 다시 말해 인간 문명을 완전히 새롭게 구성해야 함을 받아들이거나, 이를 보다 정교한 형태로 계속해서 보존하거나. 장강명의 선택은 후자다. 책을 읽은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하거나 아쉬움을 드러낸, 인간만의 가치를 강조한 책의 9장과 10장은 그 점에서 지극히 자연스런 결말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떤 점에서 AI의 등장은 그동안 우리가 모호하게 퉁치고 넘어갔던 가치들, 가령 탁월함이나 예술, 인간다움 등을 보다 진지하게 성찰할 기회를 제공한 셈이다. 애써 덮어온 구멍을 강제로 들여다보게 되었으니, 이젠 어떻게 이를 완전히 메우지 않을지 고민해야 한다.

기실 장강명은 이런 모호함을 아주 오래 전부터 붙들고 고민해온 작가이기도 했다. 《먼저 온 미래》 말미에 나오는 《재수사》가 그랬고, 그에게 한겨레문학상을 안겨준 《표백》이 그랬고,《뤼미에르 피플》과 더불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의 소설인 《열광금지, 에바로드》가 그랬다. 장강명이 《재수사》를 쓰기로 결심한 이유도 더 늦기 전에 도스토예프스키와 같은 탁월함에 도전해보기 위해서였으니. 그는 이과 출신의 냉정한 현실주의자라는 선입견과 반대로, 혹은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충동이나 열정, 영성에 주목해온 작가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 그는 지독한 올드스쿨이다.

그런 만큼 나는 9장과 10장이 다소 성길지언정, 지극히 장강명다운 결말이라 생각한다. 특히 바둑을 주제로 삼는다면 더더욱. 그의 책에 등장하는 바둑기사들의 인터뷰 역시 같은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 책도 그렇게 모호함을 부여잡고 탁월함에 이르고자 분투한 결과로 읽힌다. 갑작스레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평정심을 유지하며 무언가를 해내는 것의 어려움을, 아주 조금은 안다고 생각한다. 작가님의 분투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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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모노
성해나 지음 / 창비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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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이 남지 않는 작가다.

성해나의 《혼모노》를 정신없이 읽어가는 가운데서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생각이었다. 보통 작가들은 여기가 '본진'이구나 싶은 영역이 있다. 그게 작가의 경험이든, 문제의식이나 취미든 한 번 '담그지' 않는 이상 절대 이렇게 쓰기 어려운, 작가 스스로도 쓰면서 엄청 신나보이는 대목이 거의 대부분 나온다.

내가 요 몇 년 사이 읽었던 작가들만 떠올려봐도, 박상영은 첫 직장이었던 잡지사 경험, 김초엽은 연구실 생활과 독서, 장류진은 '연대 감성'과 판교 테크노밸리, 서이제는 시네필 생활과 90년대 초반생 감성, 김사과는 먹물인데다 돈도 많은 엘리트에 대한 (내부자만 가질 수 있는) 환멸, 김금희는 노동과 동식물에 대한 애정, 그리고 천주교, 황정은은 "여씨 아저씨"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아버지와 전파상, 가난, 좋든 싫든 대를 이어가는 (비)혈연 가족, 고영범은 실향민 정서와 교회 등, 그리 섬세하지 않은 독자라도 작가가 어디에 꽂혔는지, 혹은 뿌리를 박고 있는지 대강은 알 수 있다. 작가들 역시 이를 드러내는 데 크게 거리낌이 없는 편이고.

하지만 《혼모노》는, 정말 이상하리만치 작가가 '담갔던' 영역이 느껴지지 않는 소설집이었다. 굉장히 치밀하고 꼼꼼한 조사를 거쳐 소설을 썼다는 것까지는 알겠는데, 그 어디서도 작가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성해나는,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와 상관없이, 모든 주제에 '공정하게' 같은 관심과 정성을 주고 있는 듯 보였다. 심지어 인터뷰에서 관심이 많다고 밝힌 건축을 소재로 한 단편 <구의 집> 역시 다른 작품들과 거의 비슷한 애정이 느껴졌다.

이런 '공정함'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혼모노》에 실린 단편들은 그 다음이 궁금하지 않았다. 재미없거나 밋밋한 소설이란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한 단편에서 어디까지 보여줄 수 있는지를 미리 계산한 뒤, 이를 정교하고 날렵하게 연출하기 때문에 소설을 읽고 남는 '앙금'이나 '여지'가 없다는 이야기다. 이 주제를 가지고 이 이상의 이야기를 할 수 없다는, 이게 끝이라는 걸 너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달까? 작가가 "이게 전부입니다."라고 친절하게, 하지만 건조하게 알려주는 기분이었다.

《혼모노》의 뜨거운 인기 역시 이런 건조함 때문일지도 모른다. "넷플릭스 왜 보냐. 성해나 보면 되는데."란 박정민의 추천사가 너무 충격적이라 그랬는지 몰라도, 나는 성해나 소설이 쇼츠 보는 '요즘 세대' 구미에 맞게 굉장히 강렬하고 감각적일 줄 알았다. 94년생인 작가 역시 이런 새로운 감각에 익숙하리라 지레짐작했고. 하지만 《혼모노》는 오히려 굉장히 고전적이랄지, 기성 소설의 문법을 충실히 따른다. 인터뷰에서도 드라마를 거의 보지 않았다고 이야기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모노》가 '책 안 읽는' 젊은 세대를 끌어들인 이유는, 역시 그 바삭거림 때문일 것이다.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고, 작가의 정교한 설계에 따라 주어진 목표를 향해 단숨에 내달리는 쾌감이 있달까. 이건 김사과 소설의 무자비함과 그로테스크함과는 조금 다른 것 같다. 《혼모노》가 딱히 유머가 돋보이는 책은 아님에도 굉장히 재밌게 읽히는 까닭 역시 그래서라 생각한다. (그럼 유머가 돋보이는 소설가는 누구냐고 물으신다면, 정세랑과 이기호, 그리고 남들이 잘 모르지만 김금희.. 김금희는 특유의 '아재 개그'가 있는데다 상황 자체를 굉장히 웃기게 그려내는 힘이 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혼모노》를 읽으며 등장인물의 얼굴이 잘 그려지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이 소설을 다른 장르로 옮긴다면 뭐가 좋을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서이제의 《0%를 향하여》는 웹툰, 고영범의 《서교동에서 죽다》는 그래픽노블, 박상영의 《대도시의 사랑법》은 드라마, 김금희의 《첫 여름, 완주》는 애니메이션 등 작품마다 이렇게 바꾸면 좋겠다는 장르가 있었는데, 《혼모노》는 그게 없었다.

역설적인 건, 이처럼 성해나가 《혼모노》에서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기 때문에 작가에 대한 궁금증은 더 커진다는 점이다. 원래 뭐 하던 분인지, 왜 작가가 되기로 마음먹었는지, 한 번 '담근' 곳은 어디인지 등. 그래서 지난 1주일 동안 작가 인터뷰도 보고, 공저자로 참여한 소설집까진 아니더라도 책으로 나온 작가의 모든 소설들을 찾아 읽었다. 다소 의외였지만, 다른 작품들에선 작가의 '흔적'이 퍽 잘 느껴졌다. 가령 학습지 교사였던 어머니, 86세대를 향한 애증, 언젠가 깨질 수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는 인간 본성 등. 작가가 인터뷰도 많이 하는 등 신비주의를 고수하지도 않고.

내가 이상한 탓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혼모노》보다는 작가의 '흔적'이 드러나는 소설이 더 좋았다. 건조하게 웃으면서 "이게 전부에요."라 말하는 소설보다는 다소 성길지언정 여운을 남기는 소설이 좋았고. 내가 가장 재밌게 읽은 성해나 소설은 《두고 온 여름》이었다. 《혼모노》에서도 뭔가 덜 완성된 것 같던 <길티 클럽>이 가장 좋았고. 그렇다면 성해나는 왜 '여지'를 주지 않는, 날렵하고 정교한 소설을 쓰게 되었을까? 그 이유가 계속 궁금했다. 주제넘은 호기심일 수 있겠지만.

나는 성해나가 자신이 한 번 '담갔던' 무언가를 갖고 장편을 써주면 좋겠다. 지금까지 써온 글만 봐도 그렇고, 그는 단편에 특화된, 혹은 단편에 맞는 몸을 의도적으로 만들어온 작가로 보인다. 애초에 등단도 중편으로 했고. 《두고 온 여름》역시 민음사의 "오늘의 젊은 작가" 분량에도 못 미치는 중편에 가까운 소설이다. 그런 성해나가 다소 성기고 들쑥날쑥할지언정, 자기가 정말 좋아하는 주제로 끝까지 밀고나간 장편을 읽고 싶다.

단순히 단편은 많이 읽었으니 이젠 장편을 읽고싶단 마음은 아니다. 《혼모노》를 봐도 그렇고, 인터뷰를 읽어도 그렇고, 성해나는 굉장히 성실하고 안정적인 사람인 듯 보인다. 자료 조사도 꼼꼼하고 철저하다. 공부를 했어도 훌륭한 연구자가 되었으리라 생각할 정도로. 괜히 건축을 좋아하는 게 아니구나 싶달까. 늘 불안하고 잘 흔들리는 사람으로서 이런 안정감과 뚝심은 굉장히 부러운 재능인데, 이는 단편만큼이나 장편에도 어울린다 생각한다. 장기인 자료조사를 살릴 수 있는 역사소설도 좋고, 의외로 추리소설도 굉장히 잘 쓸 것 같다. 뭐가 되었든 성해나가 계속 소설을 써주면 좋겠다. 앞으로도 그의 글을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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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사람의 한국 현대사 - 한 개인의 역사에서 모두의 역사로
이동해 지음 / 푸른역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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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을 이해하려면 온 역사가 필요하다: 단 한 사람의 한국 현대사

 

살다보면 종종 그런 경험을 할 때가 있다. 과거 잘 모르고 지나쳤던, 혹은 그리 대단하다 생각지 않았던 일이 실은 더 큰 흐름의 일부였음을 문득 깨닫는 경험 말이다. 반대로 그때는 무척 심각하고 중요하게 느껴졌던 일이 돌이켜보니 그런 흐름과 별반 상관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었음을 깨닫기도 한다. 이처럼 뒤늦게야 알게 되는, 거대하고 도도한 흐름을 우리는 보통 역사라고 한다. 역사가의 작업이란 그런 흐름 속에 개인이나 사건을 알맞게 위치시키는 일일 테고 말이다.

 

아마도 구술사는 이런 위치지우기로서 역사의 성격이 가장 잘 드러난 작업 중 하나일 것이다. 구술사, 혹은 구술생애사는 개인의 내밀한 경험을 역사라는 거대한 흐름과 연결한다. 동시에 개인의 삶을 통해 역사에 대한 기존의 통념이나 편견을 뒤집어버리기도 한다. 가장 큰 것 역시 가장 작은 것들이 모여 이루어져 있음을, 나아가 가장 작은 것이 때로는 가장 큰 것을 전복하고 무너뜨릴 수도 있음을 깨닫는 일이야말로 구술사의 묘미가 아닐까.

 

문제는 구술사가 갖는 어마어마한 매력과 잠재력에 비해, 정작 제대로 된구술사를 쓰기란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개인의 생각과 경험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사실이 만만하게(?) 느껴져서인지, 최근 공공역사가 각광을 받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구술사는 이제 어디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대세가 되었다. 학교에서는 자신이나 부모, 조부모의 생애사 쓰기를 꼭 한 번은 과제로 내준다. 공공도서관이나 문화센터에서의 교육 프로그램이나 지자체에서 하는 각종 사업에서도 구술사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말이다. 하지만 구술사를 어떻게 하는지, 그게 왜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과문한 탓인지 들어본 적이 별로 없다.

 

이동해의 단 한 사람의 한국 현대사는 이처럼 구술사에 대한 관심과 수요는 높지만 그 방법과 의의에 대한 설명은 부족한 지금 가뭄에 단비처럼 등장한, 너무나도 훌륭한 구술사 교과서다. 한국현대사를 공부하는 90년대생 지은이가 구술사의 대상으로 삼은 이는 1935년생 외할아버지 허홍무. 얼핏 내 할아버지의 역사혹은 나의 뿌리를 찾아서같은 뻔한 주제가 떠오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대학원에서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역사학자답게 지은이가 무척이나 촘촘하고, 또 치밀하게 할아버지의 개인사와 격동의 한국근현대사를 연결하기 때문이다.

 

책을 읽다보면 두 가지 사실에 우선 놀라게 된다. 우선 문장과 구성이다. 지은이 이동해는 자칫 어렵고 전문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역사적 사실들도, 혹은 지나치게 개인적이고 지엽적이라 느껴질 수도 있는 개인의 내밀한 경험들도 흥미롭고 유려하게 풀어내는 놀라운 재주를 지녔다. 얼핏 듣기로 그는 출판사에서 2년 간 어린이용 원고를 쓰는 일을 했다는데, 그 솜씨가 어디 가지 않는다고 느꼈다. (이쯤 되면 모든 역사가를 대상으로 출판사 의무근무제를 시행해야 하는 것 아닐까?) 한때 그가 브런치에 열심히 쓰던, 전문적인 학술논문을 대중에게 알기 쉽게 소개하는 글도 무척 재밌게 읽었다. 이처럼 이동해는 좋은 글을 어떻게 써야 하는 지 아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무척이나 관념적이고, 추상적이고, 여하튼 좀 거대하고 무거운 주제를 좋아하는 나 같은 사람도 앉은 자리에서 단 한 사람의 한국 현대사를 뚝딱 읽게 되는 것이리라.

 

문장과 구성만큼, 아니 그보다 더 훌륭하고 경이로운 점은 이동해의 꼼꼼함과 집념이다. 우리 모두 할아버지 할머니가 일제시대 때 천석꾼 집안이었다느니, 6.25 동란 때 죽을 위기를 넘겼다느니, 지금 보이는 저 아파트촌이 20여 년 전만 해도 논밭이었다느니 하는 이야기는 한두 개씩 가지고 있다. 다만 아 그랬구나~”하고 더 깊이 파헤칠 생각을 않을 뿐. 이동해는 달랐다. 학부 2학년 때인 2016년 구술사를 처음 접하고 바로 할아버지를 인터뷰했다. 물론 학부 2학년생이 그 맥락을 이해하기는커녕 잘 알아들을 수조차 없는 할아버지의 구술을 갖고 바로 역사책을 쓸 수는 없을 터. 그는 좌절하는 대신 오랜 시간 논문을 읽고 자료를 모았다. 족보, <호적부>, 국민학교 <생활기록부>, 군 생활 내력이 담긴 <거주표> 등 할아버지와 관계된 자료를 모으는 것은 물론 그의 삶을 보다 풍부히 이해할 수 있는 맥락을 쌓고자 자료를 찾아 헤맸다.

 

무려 8년에 걸친 이러한 빌드업의 결과가 이 책이다. 단 한 사람의 한국 현대사의 탁월함은 다름 아닌 각주에서 드러난다. 각주는 역사가가 얼마나 두텁게, 또 정확하게 대상을 이해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다. 이 책은 240페이지 남짓한 분량으로는 이례적으로 주석이 많이 달렸다. 세어보니 무려 437개다. 놀라운 점은 그 많은 주석 중 허투루 달린 주석이 없다는 사실이다. 허홍무의 생애사를 따라가다 이 부분이 궁금한데?’하는 생각이 드는 대목엔 논문이든, 신문 기사든, 공문서든, 기관에서 제공하는 아카이브든 어김없이 주석이 달려 있었다. 덕분에 책을 읽는 내내 주석이 달린 맨 뒷부분과 본문을 분주히 오가곤 했는데, 무척이나 즐거운 경험이었다. 한 사람의 삶을 오롯이 설명하기 위해선 최소한 437개의 주석은 필요하다는 사실을 몸으로깨달았다고나 할까.

 

437개의 주석으로 두텁고 풍부하게 맥락을 덧댐으로써, 얼핏 그리 대단치 않아 보였던 허홍무의 삶은 새로운 의미를 얻는다. 아마 본문에 다 담지 못한, 혹은 않은 탓이겠지만 사실 허홍무의 구술이란 그리 대단한 이야기를 담고 있지는 않다. 어린 시절 동네에 창고가 있었는데 그게 다 우리 거였다든지, 천안 철도국에서 근무하던 작은할아버지가 제련소를 관리하며 금광을 할 생각을 했다든지, 금광이 망하며 아버지가 부평 미쓰비시 공장에 취직했다든지, 인민군을 피해 고모 집 뒷산에 있는 항아리 묻는 방공호에 숨었다든지 하는, 우리 모두 한두 번은 들어본 적 있는 이야기들이다. 이동해는 이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들에, 온갖 자료를 뒤져가며 맥락과 의미를 부여한다. 비단 구술사뿐 아니라 모든 역사가들이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작업이다. 물론 모두 해야 한다고 해서 잘 하기란 쉽지 않지만, 이동해는 무척이나 탁월하게 이 작업을 해냈다.

 

그렇기에 이 책은 두 가지 즐거움을 선사한다. 하나는 개인의 삶을 통해 거대한 역사적 풍경을 상상하는 즐거움이다. ‘나무 심기에 성공해 총독부로부터 임야를 양도받아 천석꾼으로 행세하며 면협의원까지 될 수 있었던 식민지 조선의 지주들, 일제가 국제연합에서 탈퇴하고 영미와 관계가 나빠지며 치솟은 금에 대한 수요와 조선에 도래한 황금광시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 인한 중공업단지 조성과 헌병이 감시하는 삼엄한 군수공장, 여운형의 인민위원회와 이승만의 독립촉성회, 미군정이 난립하던 해방공간의 혼란, 공교육이 감당할 수 없었던 폭발적인 교육열을 대신 채워줄 서당의 존재, 인민군과 국군이 서로 죽고 죽이던 마을로 간 한국전쟁까지. 허홍무의 삶 그 어느 대목도 한국근현대사의 거대한 흐름과 연결되지 않았던 게 없었다. 한 사람을 이해하려면 온 역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 책은 너무나도 멋지게 보여주고 있다.

 

책이 안기는 또 하나의 즐거움은 허홍무의 구술과 역사의 공식 기록 사이의 미묘한 긴장과 줄다리기다. 이동해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의 말에 미심쩍인 부분이 있으면 꼭 자료를 찾아보고 정말 허홍무의 말이 맞는지, 맞지 않다면 그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를 치밀하게 파고든다. 가령 군복무를 하며 거제 포로수용소에서 인민군 포로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모습을 보았다는 허홍무의 이야기에 이동해는 할아버지의 참전 용사 등록을 위해 병무청에서 <병적증명서>, 국방부 인사사령부에서 <거주표>를 발급받았지만, 문서에 따르면 허홍무의 입대일은 정전 이후 1년 가까이 지난 1954712일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그것도 후방에서 근무한 데 따른 부끄러움에 허홍무가 거짓말을 한 것이다.

 

물론 이런 팩트체크만이 전부는 아니다. 이동해는 할아버지가 무심코 한 이야기 하나도 놓치지 않고, 기어코 그것이 진짜였음을 보여준다. 허홍무의 작은할아버지 허옥이 운영한 광산이 <조선총독부 관보>에 등록되어 있었다든지, 인민군이 철수하며 인주면 부면장을 처형하고 십자가에 매달아놓았다는 허홍무의 기억이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에 실려 있었다든지, 허홍무가 부산에서 군 복무를 하던 시절 첫사랑을 만나게 해준 철길이 지금은 사라진 문현선이었다는 대목에선 짜릿함마저 들었다. 마치 잘 쓴 추리소설과 같은 긴장감과 쾌감을, 다름 아닌 1935년 허홍무의 구술사에서 느꼈달까? 공교롭게도 내가 아는 훌륭한 역사가 선생님들 중에는 추리소설 마니아가 많은데, 좋은 역사책은 추리물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일지도 모른다.

 

단 한 사람의 한국 현대사는 비단 재미와 즐거움을 선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역사의 공공성을 다시금 묻게 만드는 책이기도 하다. 최근 공공역사란 말이 유행하고 있지만 정작 그것이 무엇인지, 기존의 역사학과 어떤 점에서 다른지 질문과 혼란이 끊이지 않는 실정이다. 아주 삐딱하게 말하자면, “그럼 기존 역사학은 공적이지 않다는 얘기냐!”는 반론도 가능하고 말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했던가. 이 책은 공공역사란 이런 것이라고까지는 말하지는 못해도, 최소한 역사가가 실천할 수 있는 공공성의 한 갈래를 무척이나 모범적으로 보여준다.

 

학부 4학년 때 들었던 답사 수업에서 교수님께서는 요즘 같은 시대에 역사가의 공적 역할이란 여러 맥락을 살피며 이들을 제대로 이어주는 게 아닐까하는 말씀을 하셨다. 꼭 역사왜곡에 분연히 맞서고 선비의 결기로 잘못된 시대에 준엄히 목소리를 내는 것만이 역사가가 실천할 수 있는 공공성의 전부는 아니다. (물론 요새는 그런 게 필요하다 느껴지기도 하지만...) 평범한 개인의 삶을 역사라는 보다 큰 맥락과 이어주고, 동시에 개인의 삶을 통해 역사에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것이야말로 작고 소박하지만 꼭 필요한, 역사가의 의무일지 모른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역사학자 이영남이 이야기한, “중층적인 삶의 층위를 펼쳐 사회의 내면에 자리 잡은 것을 들추어내 서로 조정하고 관련짓는치유와 연대의 임상역사의 길로도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영남, 푸코에게 역사의 문법을 배우다, 푸른역사, 2007, 300.)

 

이동해 역시 할아버지의 구술사를 쓰며 그런 치유의 과정을 경험한 듯하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허홍무의 이야기를 들은 가족들은 그를 이해하며 어린 시절 맺혔던 마음 속 응어리를 조금씩 풀어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렇게 가족들 역시 조금씩 자신들의 생각과 경험을 공유하기 시작했고, 허홍무 역시 한두 마디씩 거들며 소통의 장이 마련되었다. 구술사가 가진 치유의 힘을 경험한 것이다. 물론 개인의 삶을 보다 구체적으로 알게 된다 해서 그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또 이해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최소한 그러한 이해와 소통, 나아가 소통의 장을 마련할 수는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역사가가 맡을 수 있는 가장 보람 있는 역할일 것이다. 이번 책으로 그 가능성을 멋지게 보여준 이동해가, 앞으로도 자신의 방식대로 역사가의 공공성을 실천해가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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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소민아 2024-10-18 1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지금도 책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 - 사람들이 읽기를 싫어한다는 착각
김지원 지음 / 유유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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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없음의 쓸모를 설득하기: 지금도 책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이다. 대학원에서 컴퓨터공학을 공부하는 동생과 밥을 먹는데, 글쎄 얘가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이다. 자기가 그동안 책을 너무 안 읽은 것 같다고, 그래서 삶의 깊이나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가 부족한 것 같단다. 그 얘기를 듣고 짧게 답해줬다. 네 형을 보라고, 난 대한민국 평균에 비해 그래도 책을 많이 읽는 축에 들 텐데, 내가 지혜롭거나 깊이를 갖춘 사람처럼 보이냐고. 그러자 동생은 !” 하고 감탄인지 한탄인지 모를 말을 내뱉더니 더 이상 내게 뭘 물어보지 않았다.

 

반쯤은 농담이었지만, 마냥 실없는 소리는 아니다. 난 정말로 책 읽기가 대단한 자랑거리나 인간이 갖춰야 할 필수적인 덕목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책을 비교적 많이 읽고, 또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현명하거나 성숙한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예민하고, 서투르며, 비관적이고, 침울한 사람에 가깝다. 내게 책 읽기란 말 그대로 배운 도둑질이 이것밖에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이다. 막말로 내가 다른 좋은 취미, 가령 공연 관람이나 스트릿 댄스를 좋아했다면 지금보다 훨씬 밝고 건강한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종종 생각한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얘기지만, 어쩌면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사람들이 왜 책을 읽지 않는가?”가 아니라 왜 지금까지 사람들이 꼭 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나?”일지도 모른다. 다들 책 좀 읽으라는 잔소리는 많이 들어보았겠지만 유튜브 좀 보라는 잔소리는 들어본 적 없지 않은가. 책보다 유튜브가 못할 건 없다. 적어도 요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는 우리의 걱정은 그저 책이라는 매체가 (그 가치에 비해) 훨씬 높은 평가를 받았던, 인류 역사에서 무척 짧고 예외적인 시기의 끝물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호들갑은 아닐까.

 

김지원의 지금도 책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은 이처럼 책이 더 이상 가치 있게 여겨지지 않는 시대에 용감하게 책의 쓸모를 주장하는 책이다. 한데 그 이유가 재밌다. 책은 쓸모가 없기 때문에 오히려 쓸모를 갖는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경향신문에서 인문교양 뉴스레터 인스피아를 발행해온 지은이가 정의하는 책만의 특징은 굳이로 요약할 수 있다. 요즘처럼 타자 몇 번 두드리고 클릭 몇 번만 하면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는 시대에, 책은 그걸 굳이엮어서 일정한 리듬과 질서를 갖게 만든 뒤 종이에 찍어내 물성을 부여한다. 그리고 바로 이 굳이로부터 책의 쓸모가 발생한다.

 

지은이가 꼽는, “지금도 책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들은 적지 않다. 우선 책은 가치 있는 텍스트를 모은 방주. 이때 방주라 함은 내가 찾는 정보만이 아닌, 그야말로 온갖 이야기들이 모여 있는 아카이브란 의미다. 그렇기에 우리는 책을 읽으며 원래는 생각지 못했던, 그러나 혹은 그렇기에 꼭 필요했던 번뜩이는 통찰을 우연히발견하곤 한다. 알고리즘의 필연성에 대항하는 책의 우연성은 이처럼 당장 필요하지 않은 정보까지 굳이읽는 해찰의 경험에서 나온다. (이게 내가 발췌독을 하지 않고, 웬만해선 책을 끝까지 읽으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언제나 내가 찾으려는 책보다 그 옆에 꽂힌 책에 눈이 가는, 도서관 서가의 법칙도 마찬가지다.

 

책은 읽기에서도 다른 매체는 줄 수 없는 독특한 경험을 선사한다. ‘읽기에서 책이 갖는 가장 큰 특징은, 심지어 읽지 않기라는 선택지까지 존재한다는 점이다. 모바일의 읽기란 끊임없는 간섭과 방해의 연속이다. 비단 엑스 버튼이 어디 있는지 돋보기를 들이대야 겨우 찾을 수 있는 끝없는 광고의 벽은 말할 것도 없고, 언론사가 독자의 편의를 위해 마련해둔 온갖 링크 역시 때로는 피곤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하지만 책은 이런 간섭 없이 편하게, 어디서나 원하는 페이지에서 펼치고 접을 수 있다. 내키지 않을 땐 그냥 안 읽으면 그만이다.

 

요컨대, 적어도 책을 상대로는, 내가 주도권을 100% 가져가는 폭력적인 관계가 가능하다. 난 솔직히 이게 책을 읽는 가장 강력한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사람을 상대할 때,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신경 쓰는가! 말투부터 표정까지 사소한 것 하나 하나 파악하며 상대방이 혹시 지루해하거나 기분 상하진 않았는지, 내가 뭐 실수한 건 없는지 강박적으로 되돌아보지 않는가. 책은 그럴 일이 없다. (나는 안 그러지만) 북북 줄을 치거나 모서리를 접어도, 메모를 남겨도, 읽다가 이해가 가지 않거나 동의가 되지 않는 부분에 이의 있소!”하고 딴지를 걸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오히려 책과의 관계에선 이런 식의 폭력성이 적극 권장되기까지 한다. 마음껏 폭력적이어도 된다니, ‘무해함이 미덕인 요즘 같은 시대에 이 얼마나 좋은가! (최소한 사람이나 동물한테 그러는 것보단 낫지 않은가?)

 

책의 쓸모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지은이의 말처럼 책은 원산지가 표시된 정보. 이건 단지 책에 쓰인 이야기를 믿을 수 있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난 좋은 책을 판가름하는 유무는 결국 각주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 이야기를 어디서 가져왔는지 표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독자로 하여금 각주를 사다리 삼아 더 넓고 깊은 세계로 나아갈 수 있게끔 이끌어주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좋은 책은 믿을 만한 지식의 지도가 되어준다. 정말로 훌륭한 책(가령 방기중의 한국근현대사상사연구)은 해당 분야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에 발을 딛을 수 있게끔 해주는 베이스캠프가 되어주기도 한다. 책을 지도 삼아, 각주를 길잡이 삼아 내가 갈 수 있는 영역을 넓혀가고, 막힐 때면 언제든 원점으로 돌아올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처럼 책이 갖는 쓸모, 결국 그 쓸모없음으로부터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한때 책은 원하는 정보를 찾기 위한 가장 효율적이고 쓸모 있는 매체였을 수 있다. 하지만 클릭 몇 번, 아니 챗GPT에게 대충 물어만 봐도 원하는 답이 뚝딱 나오는 요즘 같은 시대에 책은 지나치게 수고롭고 품이 많이 드는 매체가 되어버렸다. 물론 책이 갖는 강점은 확실하다. 하지만 이는 모두 쓸모를 의식하지 않는 가운데 부수적으로 주어지는 것들이다. 우연히 얻게 되는 통찰도, 자유로운(혹은 폭력적인) 읽기의 경험도, 각주를 길잡이 삼아 앎의 전선을 넓히는 일도, 속도와 효율이 중시되는 지금은 지나치게 한가로이 느껴질지도 모른다.

 

요컨대, 책은 쓸모가 없기 때문에 쓸모를 갖는, 지극히 역설적인 매체다. 지금도 책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과 비슷한 시기에, 역시 같은 유유출판사에서 나온 우치다 다쓰루의 도서관에는 사람이 없는 편이 좋다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도서관은 근본적으로 쓸모를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도서관은 공공의 탈을 쓰고 있지만 민간에 위탁한 일부 도서관이 그러하듯, ‘고객을 더 불러 모으고 이들의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 흥미 위주의 책을 배치하거나 인스타그래머블한 북카페가 되어서는 안 된다. 도서관이란 이곳과 저곳을 연결하는 경계의 장소여야 하며, 사서는 저편의 문지기, 즉 마녀와도 같은 존재여야 한다. (학교에서 겉도는 학생들이 자주 찾는 장소가 보건실과 도서실이라는 사실을 떠올려보자.)

 

문제는 쓸모없음의 쓸모를 설득하기가 무척 난망하다는 사실이다. 앞서 길게 얘기했듯 책은 그 자체론 쓸모를 갖지 않고, 설령 갖는다 해도 이를 바로 알아차리기 무척 어렵다. 그런 만큼 어린 시절부터 꾸준히 책을 읽어오지 않은 사람들이 나이가 들고 책을 읽으려 할 때, 책은 어렵기만 하고 곧바로 느낄 수 있는 효용은 적은 매체일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은 검색 엔진이나 챗GPT에 의존하게 되고, 결국 책은 읽는 사람만 읽는매체로 전락하고 만다. 비단 독자뿐 아니라, 시장과 정부에게도 책의 쓸모를 보여주기란 어려운 일이다. 일단 돈이 안 되지 않는가. 몇 백 명이나 읽을까 말까한 두툼한 학술서를 지역의 공공도서관에 비치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우치다 선생님껜 안타깝게도, 사람이 오지 않는 도서관은 결국 문을 닫게 된다. 그 점에서 난 조용한 봉쇄수도원 같던 우리 동네 중앙도서관이 최근 인스타그래머블한 네온등을 주렁주렁 단 것을 이해한다.

 

책이 쓸모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안타깝거나 슬프지는 않다. 애초에 책은 그러라고 만들어진 매체니까. 다만 쓸모가 없다고 아무도 책을 읽지 않고, 도서관에 투자하지 않는 사회가 썩 바람직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럼 결국 쓸모없음으로부터 발생하는 쓸모는 포기하게 되는 것이고, 그때 사회가 잃는 것이 적지는 않을 테니까. 아니, 이런 진지하고 거창한 고민까지 갈 것도 없이, 적어도 내가 살아있는 동안 재밌는 읽을거리가 계속 나와 주긴 해야 할 텐데. 이제 와서 공연 관람이나 스트릿 댄스에 도전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이건 배운 도둑질이 책 읽기밖에 없는 미련한 사람으로서 머지않아 몇 안 되는 재미를 잃을 수도 있다는, 지극히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고민이기도 하다.

 

어떻게 해야 쓸모없음의 쓸모를 설득할 수 있을까, 내가 떠올린 방법은 책이야말로 가장 진지하고 정성스런 말 걸기의 수단이라는 것이다. 마음이 심란할 때마다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읽어가곤 하는 배우성의 독서와 지식의 풍경은 책과 출판에 대한 근대주의적 시선을 걷어내자 이야기한다. 조선 후기 지식인들은 오늘날의 기대처럼 책을 (목판이든 금속이든) 활자로 찍어내 모두가 자신의 글을 읽고, 낙양의 지가를 올리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들이 원했던 것은 자신의 생각을 알아줄 단 한 사람의 독자였다. 그 독자가 굳이 동시대 사람일 필요는 없었다. 먼 훗날이라도 좋으니, 누군가 책을 읽고 그 뜻에 공감해준다면 이들로서는 소기의 목표를 달성한 셈이었다.

 

물론 영세할지언정 출판이 산업이 된지 오래인 지금 이러한 관점을 적용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책에 대한 여러 기사와 리뷰들을 훑으며 느끼는 건, 저자에겐 자기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삼프로 티비에 출연하고, 문재인 전 대통령의 을 받는 것만큼이나(차마 그보다라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자기 책을 깊게 읽어줄 단 한 명의 독자를 만나는 일이 각별하고 의미 있는 경험일 수 있겠다는 사실이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가장 기쁘고 즐거운 일 중 하나도 언론사에서 제대로 된 서평조차 나오지 않은 책이 알음알음 입소문이 나고, 책을 읽은 독자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진지한 감상을 올리는 모습을 볼 때다. 김영민의 말마따나 학식과 비판과 문체가 어우러져 좋은 글이 쌓이면, 그 사회는 그야말로 문예공화국의 면모를 갖게 될 것이다.” 좋은 소통의 매개로서, 문예공화국의 주춧돌로서 책이 갖는 쓸모는 여전히 존재하리라는 희망을 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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