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롭지 않을 권리 - 혼자도 결혼도 아닌 생활동반자
황두영 지음 / 시사IN북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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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결혼은 사랑이 아니라 의리로 하는거에요

 

  재수 시절 가장 좋아했던 논술선생님이 건넨 이야기였다. 평소엔 유쾌하기 그지없던 선생님의 웃음기 쫙 뺀 모습에 놀라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쇼킹했던 건 그 내용이었다. 물론 갓 스물이 된 그때도 한순간의 불타오름(!)만으로 평생을 함께 하는 게 과연 맞는 일인지 의문스럽기는 했지만, 이는 결혼이란 제도 자체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을 뿐이다. 사랑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보고 결혼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당시로는 정말이지 듣도 보도 못한 것이었다. 그렇게 유달리 진지했던 그날의 선생님은 내게 하나의 별난 에피소드 정도로 치부되고 마는 듯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선생님의 말씀은 흐릿해지기는커녕, 더더욱 뚜렷하게 각인되기만 했다. 사람은 결코 혼자 살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일단 외로움도 외로움이었지만, 세상은 혼자 살아가기엔 너무 험난한 곳이었다. 같은 곳을 바라보고 함께 미래를 설계해갈 사람이 필요했다. 굳이 비유하자면 고블린 무리에 맞서 등을 맞댄 채 칼을 휘두를 수 있는 용사들 같은 관계를 원했고, 이때 요구되는 건 사랑보다는 의리 쪽이었다.

 

  문제는 내 입장에서 함께 고블린을 격퇴해갈 용사님과 꼭 결혼을 할 필요는 없었다는 것이다. 남들이 보기엔 아직 혈기왕성할(?) 나이지만, 어느덧 반오십이 된 나로서는 함께 살아가고픈 사람의 조건으로 구태여 성적인 매력을 고려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안정감재미를 모두 갖춘 사람, 구체적으로는 주호민 같은 사람이면 같이 살기 딱 좋겠다 싶었다. 성별? 어차피 사랑보다 의리가 중요한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런 나와 달리, 국가는 사랑성별에 아주 관심이 많았다. 혈연관계가 없는 성인이 가족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결혼이 유일하고, 한국에서 결혼이란 사랑하는 두 이성(異性)의 결합에 다름 아니다. 물론 누군가는 그냥 동거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느냐고 반문할 테지만, 아무런 법적 구속도 없는 관계에서 의리가 꽃피기란 매우 어렵다. 무엇보다 비록 성애가 존재하지 않는 관계일지언정, 사회로부터 상대방이 내게 그저 남이 아니라 소중한 가족이라는 인정을 받고 싶다. 결국 관계란 둘만 잘 지낸다고 장땡이 아닌, 보다 넓은 관계망 속에 제대로 안착해야 하는 것이니 말이다.

 

  결혼을 할 수 없는, 혹은 하지 않는 관계라도 법적으로 의무와 권리를 부여받으며 당당하고 행복하게 살 수는 없을까? 황두영의 외롭지 않을 권리는 그 해답으로 생활동반자제도를 제시한다. 생활동반자, 이미 지난 해 김하나와 황선우의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를 통해 대중에게 알음알음 알려진 제도다. 하지만 두 사람이 그려낸 생활동반자제도가 그저 망원동에 거주하는 고급 지식노동자들의 힙한라이프스타일 정도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면, 황두영은 국회의원 보좌관 출신다운 꼼꼼하고 치밀한 자료조사를 통해 그것이 보다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안이 될 수 있음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이보다 더 잘 쓸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탁월한 비유와 묘사, 스토리텔링 능력은 덤이다. 괜히 스승이자 책의 추천사를 써준 칼럼계의 아이돌김영민이 그를 작가라고 부른 게 아니다.

 

  우선 저자는 벼랑 끝에 내몰린 한국의 가족제도를 냉정히 되짚으며 책을 시작한다. 한국에서 가족은 그저 조건 없는 사랑을 주고받는 따뜻한 쉼터가 아니라, 냉혹한 세상을 함께 헤쳐나갈 경제공동체였다. 사회학자 장경섭이 가족자유주의라는 개념으로 탁월하게 포착했듯, 한국에서 가장 기본적인 사회구성원은 개인이 아닌 가족이었던 것이다. 그럼 개인은 무엇이었느냐, 나이와 성별에 따라 가족이라는 유기체의 특정 역할, 가령 생산, 소비, 유지·관리 등을 전담하는 장기혹은 세포에 불과했다.

 

  이러한 가족자유주의는 효율은 극대화하는 한편 사회복지에 드는 비용은 최소화했다는 점에서, 어쩌면 여타 비서구와 구분되는 한국의 놀라운 경제발전을 가능케 한 원동력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2020년 현재, 한국의 가족은 사실상 파산선고를 앞두고 있는 형편이다. 가장 중요한 원인은 그간 가족을 지탱해온 중요한 믿음, 구체적으로는 자식의 성공을 통한 부모의 노후보장이 불가능한 환상으로 판명되었기 때문이다.

 

  저자의 말마따나 한국에서 자식을 키우는 일은 흔히 농사에 비유되곤 한다. 즉 구체적인 계획에 따라 자본과 노동을 투입해 최대한의 이익을 뽑아내는 산업이라는 이야기다. 문제는 자녀라는 농작물에 들어가는 시간과 돈, 고생의 총량은 늘어난 반면, 신자유주의라는 이상기후가 지속되며 수확은 영 신통치 않아졌다는 사실이다. 지난해 전국적인 화제를 모은 JTBC스카이캐슬이 잘 보여주었듯 부모들이 영혼까지 팔아 자녀에게 물려주고 싶어하는 미래는 고작해야(?) 서울대 의대, 그러니까 안정적인 중상류층의 지위가 최선이다. 물론 대부분의 가정에선 스카이캐슬만큼의 자원을 투입해도 자녀를 서울대 의대에 보낼 수 없는 게 현실이고, ‘실패의 대가는 그만큼 비참하다.

 

  이처럼 한국의 가족자유주의가 더 이상 지속가능한 모델이 아니라는 점은 모두 동의할 것이다. 문제는 이를 어떻게 손볼 것이냐다. 물론 우선적으로는 혈연가족을 중심으로 설계된 지금까지의 사회복지체계를 개인이 개인으로 자립할 수 있게끔 재구성해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촘촘하게 행정의 그물을 짠들, ‘국가개인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영역은 반드시 존재할 수밖에 없다. 가령 역대급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20188, 서울 강북구 삼양동 옥탑방에서 혼자 살던 41세의 독신 남성 A씨가 사망한 채 발견된 건 국가의 무관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공과금 연체 등 이상신호를 감지한 공무원이 옥탑방 문을 두드렸지만 A씨는 만남을 거부했다. 일상을 함께하며 건강을 챙기고 외로움을 달래줄 존재의 부재가 A씨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보통 그런 존재를 가족이라 부른다.

 

  요컨대 한국에서 가족은 어떻게든 손을 봐야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외면할 수는 없는, 참으로 애매하고 어려운 존재다. 아니 애초에 가족을 어떻게 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대구의 대학생에게도(최종렬, 복학왕의 사회학) 수도권의 맞벌이 화이트칼라 여성에게도(조주은, 기획된 가족) 가족은 삶을 영위하는 가장 중요하고 기초적인 단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단 하나, 가족을 최대한 정의롭게 재구성하는 김수현 드라마식 해법뿐이다.

 

  장애, 동성애, 이혼 등의 다양한 이슈를 언제나 선량한 가부장이 봉합하고 해결해간다는 점에서, 김수현의 드라마는 분명 보수적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드라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적극적인 욕망을 갖고 있으며,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이를 실현할 수 없을 경우 미련 없이 가족을 떠난다. 이승한의 표현에 따르면, 김수현에게 가부장제는 상수이며 많은 이들이 그 자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김수현은 그것을 부정하거나 대안을 제시하는 대신, 기왕 존재할 거면 더 정의롭고 포용하는 체제가 될 것을 끊임없이 요구했다.” (이승한, [TV 데모크라시] ‘김수현 드라마는 개혁적 보수?, 시사IN, 2016. 09. 22.)

 

  저자가 주장하는 생활동반자법 역시 이러한 김수현 드라마식 해법의 일환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일각의 비판처럼 생활동반자법은 기존의 가족제도를 뒤흔드는 법이 결코 아니다. 실제로 생활동반자법은 성별이나 혈연관계, 성애의 유무를 따지지 않고 성인이라면 누구든 책임감을 갖는 특별한 한 사람을 가질 권리를 인정하며, 동성결혼과 달리 민법을 개정할 필요조차 없다. 그 점에서 생활동반자법은 가족제도의 외연을 넓힘으로써 이를 안정화하는 체제순응적인법안이지만, 그때의 가족은 결코 이전의 가부장적 가족과는 같지 않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생활동반자법이 제정될 경우 주거지원, 소득세 인적공제 인정, 국민건강보험 직장가입자 피부양자 인정, 돌봄·출산·육아휴직, 의료결정권, 인신구제 등 그간 혈연가족이나 배우자에게만 부여되었던 권리들을 생활동반자 관계에서도 누릴 수 있게 된다. 요컨대, 생활동반자법은 이미 사실상의 가족이었으나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했던 비정규직가족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법인 셈이다. 이렇게 써놓으니 별 거 없어 보이지만, 그 의의는 결코 적지 않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최고의 개혁이란 ‘de facto’‘de jure’화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대표적으로 조선의 대동법이 그러했다.

 

  물론 생활동반자 관계가 혈연가족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권리를 똑같이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법적인 가족관계가 바뀌지 않는 만큼 상속권이 제한되며, 동거인의 자녀를 친양자로 입양할 수 없다. 형법이 규정한 친족 특례가 생활동반자 관계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앞서 살펴보았듯 한국 가족제도의 파산이 혈연가족에게 지나치게 많은 권리와 의무를 부여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이러한 제한은 나름대로 이해할 여지가 있다. 무엇보다 오랜 시간 진선미 국회의원의 보좌관으로 근무했던 저자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보다 현실적인고려를 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의문은 남는다. 과연 이토록 가벼운(?) 생활동반자 관계라면 혼인 등을 통해 가족을 이루는 일에 비해 어떠한 우위를 가질 수 있을까? ‘이론적으로는가족이 주는 무거움에서는 해방되면서도 함께 사는 즐거움은 온전히 누릴 수 있다는 점이 생활동반자 관계 최고의 장점이겠다. 하지만 과연 사람들은 그저 혼자 살면 외롭다는 이유만으로 생활동반자를 원하는 것일까? 그보다는 어느 정도의 짜증과 고통이 수반될지언정 서로를 단단히 옭아맴으로써 함께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든든한 동반자를 원하는 게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생활동반자는 어딘가 하자가 있어 안정적인 정상가족을 꾸릴 수 없는 이들이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B급 관계로 전락하는 건 아닐까?

 

  하지만 그것이 아무리 가볍다 할지언정, 난 생활동반자법을 강하게 지지한다. 이유는 아주 단순하고 유치하다. 생활동반자법이 없는 쪽보다는 있는 쪽이 훨씬 낫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처럼 사랑 아닌 의리로 살아갈 용사들뿐 아니라, 사랑하지만 결혼할 생각이 없는 동거커플, 배우자를 먼저 떠나보내고 친구와 함께 사는 중장년 여성들(실제로 이들에게서 생활동반자법에 대한 호응이 좋았다고 한다)까지, 보다 다양한 관계들이 떳떳하게 가족으로 인정받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대통령 샤를 드골이 독일의 분단을 두고 했다던 말을 정 반대의 맥락에서 비틀어보자면, 나는 가족이 너무 소중하다. 그래서 가족의 형태가 한 n개는 되면 좋겠다! 생활동반자법은 ‘n개의 가족을 위한 첫 번째 단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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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윤중과 그의 시대 - 근대 재정개혁의 설계자
김태웅 지음 / 아카넷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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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른바 근대란 무엇이냐는 질문은 사람을 참 곤란하게 만든다. 답변자의 지적 수준은 물론이고 이념적 좌표까지 단박에 드러내는, 그야말로 만능키같은 질문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세상 여느 질문이 그렇듯 근대에도 일종의 모범답안이 몇 있는데, ‘숫자역시 그 중 하나다. 그저 수 잘 세는 게 중요하단 소리가 아니다. 이질적인 사물들을 추상화해 양적으로 파악하는 능력, 그것이야말로 근대의 가공할 힘의 원천이라는 이야기다. 오죽하면 수량화 혁명이란 책까지 나왔겠는가.

 

  그 점에서 1910년 총독부가 실시한 토지조사가 조선의 농경지를 실제보다 과소평가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식민지근대화론을 비판하는 몇몇 사회경제사가들은, 실상 근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생각해보자, 조선을 갓 접수한 총독부가 토지조사를 위해 가장 우선적으로 활용한 자료가 무엇이겠는가? 대한제국의 양안(量案)이다. 요컨대, 대한제국의 수중에 있던 농경지는 딱 고 정도밖에 없었던 것이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듯, 그 실체가 불분명한 조선의 역량이 어떠하건 이를 제대로 파악·활용하지 못하면 사실상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 점에서 대한제국은 조선의 포텐을 좋게 말해 방치했고, 냉정히 말해 억눌렀던 셈이다.

 

  물론 근대전환기 조선과 대한제국을 이끌었던 엘리트들도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변화를 온몸으로 거부하는 수구파가 아닌 이상 대부분 재정개혁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었고, 잘 되진 않았지만 보다 많은 재화를 효율적으로 파악·활용하고자 고심했다. 김태웅의 어윤중과 그의 시대는 그중에서도 정말이지 놀라운 능력과 열정으로 한평생 재정개혁에 헌신한 어윤중의 일생을 조명한다. 저자가 한국 역사학계의 숨은 신’, 반농으로 김자(金子)’라고도 불렸다던 김용섭 선생의 도통을 잇는 서울대 역사교육과 교수인 만큼 지나치게 올드한관점을 고수할뿐더러 문장과 구성 역시 빈말로라도 좋다고 말하기 어려운 책이지만, 그럼에도 읽어볼 가치는 충분하다. 어윤중이라는 문제적 인물19세기 조선에 대한 우리의 통념을 죄다 허물어버리기 때문이다.

 

  우선 어윤중을 둘러싼 인적 네트워크부터가 범상치 않다. 어윤중의 친가 함종어씨는 노론 중에서도 중화와 오랑캐, 사람과 금수의 본성이 같다고 여긴 낙론(洛論) 계열로, 그의 고조부인 어용빈은 그 유명한 박지원과 활발히 교유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또 완전히 노론 외길만을 걸었던 건 아니라서, 어윤중의 조부 어명능은 근기남인인 정약용의 문하를 드나들며 그의 아들 정학연과 막역한 친구로 지냈다. 노론 낙론계의 여유와 개방성, 그리고 근기남인의 개혁의지가 어윤중의 핏줄 속에 흐르고 있었던 셈이다.

 

  역시 피는 못 속이는 걸까, 어윤중 본인도 한평생 경계를 넘나들며 다양한 사람들과 인연을 맺었다. (후술하겠지만, 우리는 그것이 진정 경계였을지 질문해봐야 한다) 가령 그가 가장 믿고 의지하는 친구는 온건개화파이자 친청파인 김윤식이었으나, 동시에 그는 급진개화파이자 친일파인 박영효의 아버지인 박원양을 스승으로 두었다. 어윤중 본인의 노선은 분명 김윤식에 가까웠지만, 훗날 갑신정변의 실패로 박영효가 일본으로 망명한 상황에서 박원양이 세상을 떠나자 그는 김윤식과 함께(!) 위험을 무릅쓰고 스승의 시신을 매장해주었다.

 

  비단 인적 네트워크만 그랬던 게 아니다. 어윤중의 공직생활 역시 여러모로 파격적이었다. ‘온건개화파라는 타이틀에 어울리지 않게 그는 당대 기준에서 굉장히 급진적인 지세개혁을 평생에 걸쳐 일관되게 주장했다. 18778월부터 18785월까지 약 10개월간 암행어사로 전라우도를 시찰한 그는 환곡에 내는 일종의 이자인 모곡(耗穀)이 백성에 대한 수탈로 이어짐을 간파하곤 심플하게토지에만 세금을 매기자고 건의했다. 비록 조정은 그의 건의를 깔끔하게 씹어버렸으나, 훗날 평안도와 함경도를 순회하며 지방관을 감시하는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가 된 어윤중은 아예 이를 한층 업그레이드된 버전으로 강행해버린다.

 

  뿐만 아니라 어윤중은 재지양반들이 장악한 향청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보수를 받는(이는 굉장히 중요하다! 아전들이 왜 백성을 쥐어짤 수밖에 없었는가를 생각해보자) 면임(面任)을 마을 단위로 천거하게끔 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그가 1893년 충북 보은에 모인 동학교도를 동비(東匪)’가 아닌 민당(民黨)’이라 일컬으며 그 됨됨이와 애국심을 인정했다가 호된 비판에 시달렸던 건, 어쩌면 즉흥적인 감정이입보다는 오랜 신념의 발로였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점은 흔히 친청파로 알려진 그가 청에게 결코 고분고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1882년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발발하자 톈진에 있던 어윤중은 청에게 신속히 소요를 정리해줄 것을 요청했고 아예 청군과 함께 인천으로 귀국하는 등, 전형적인 친청파의 행보를 보였다. 하지만 이후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하는 과정에선 언제 그랬냐는 듯 태도가 돌변해, (비록 별다른 소득은 없었지만) 만국공법에 근거해 장정의 부당함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어윤중의 꼬장꼬장함은 후일 서북경략사로 재임하며 청과의 무역·국경문제를 논의할 때도 여실히 드러났다. 중강·회령장정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그는 본디 계절에 따라 제한적으로 이루어지던 국경무역을 상시화했으며, 조선과의 무역을 주관하는 봉천성의 반대를 꺾고 세관을 설치했다. 영토문제에 대해서는 더더욱 적극적이어서, 조선과 청이 양국의 국경으로 정한 토문강이 두만강이 아닌 송화강의 지류라며 간도 영유권을 주장하기까지 했다.

 

  이처럼 어윤중은 당시 조선의 대내외적 어려움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고, 이를 타개하고자 치밀한 협상과 과감한 결단을 번갈아가며 구사할 줄 알았던 탁월한 정치가였다. 그 점에서 어윤중은 전형적인 근대인이었으나, 그렇다 해서 그가 자신이 나고 자란 조선의 지적 전통을 외면한 건 결코 아니었다. 아니, ‘전통은 오히려 그로 하여금 근대를 상상하게끔 북돋는 일종의 매개 역할을 했다. 가령 그는 평안도에서 과거시험을 주관하는 경시관(京試官)으로 재임할 때 바람직한 토지제도의 방향을 물으며 그 전거로 고대의 정전제(井田制)를 들었다. 정전제는 곰팡내 나는 역사속의 유물이 아니라 19세기 조선이라는 시공간에 맞춰 혁신해야 할 이상이었던 것이다.

 

  1881년 조사시찰단의 일원으로 메이지 일본을 방문해 대장성을 시찰한 어윤중이 일본이 재정을 확보함은 봉건을 폐지함에 있다고 평가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당시 청과 일본의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어윤중 역시 봉건군현이라는 프레임을 통해 바람직한 사회의 모습을 상상했던 것이다. 물론 저자는 이 때의 봉건을 당대가 아닌 20세기 역사학, 구체적으로는 김용섭의 맥락에서 이해하고 있는듯하지만 말이다.

 

  급진적인 지세개혁을 주장했으나 갑신정변에 가담하지 않았고, ‘친청(親淸)’이었으되 종청(從淸)’은 아니었으며, ‘전통을 고수한 덕에 근대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어윤중의 삶은 ‘19세기의 조선에 대한 그간의 설명이 과연 유효한지 의문을 제기한다. ‘개화수구’, ‘급진개화온건개화’, ‘친청과’ ‘친일’, ‘전통근대라는 프레임으로는 어윤중이란 인물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단 어윤중만 그런 게 아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온건개화-친청파로 커리어를 시작했으나 청일전쟁 이후 친일내각에 참여하고, 아관파천 이후 일국의 총리대신으로서 백성에게 죽는 건 천명이라며 백성에게 돌을 맞아 죽은 김홍집은 어떠한가? 반대로 급진개화-친일파였으나 철종의 부마라는 특권의식을 끝까지 버리지 못했을 뿐 아니라 후원자인 일본의 미움을 사 끝내 실각한 박영효는?

 

  안타깝게도, 이들을 보다 총체적으로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관점은 아직까지 마련되지 못한 듯하다. 물론, ‘19세기의 조선에 대한 탁월한 연구는 끊이지 않고 나오고 있다. 그럼에도 이때가 워낙 비상한시기였던 만큼 다들 특정한 목적의식에 경도되고, 외국의 사료까지 참고해가며 이루어진 훌륭한 실증연구도 그 인력(引力)에 의해 끝내 굴절되고 마는 경우도 적잖이 보았다.

 

  그 점에서 노관범의 논문 개화수구는 언제 일어났는가?(한국문화87, 2019)는 퍽 시사적이다. 이 시기를 다룬 연구로는 드물게도 당대의 맥락만을 집요하리만치 추적한 끝에, 노관범은 개항 이후 개화수구가 치열하게 대립한 끝에 갑오개혁을 끝으로 전자가 승리를 거머쥔다는 통설에 종언을 고한다. 실상은 오히려 그 반대다. 그러니까 갑오개혁을 계기로 개화가 구체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고, 이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수구가 탄생하며 비로소 양자의 대립이 본격화되었다는 것이다.

 

  노관범의 말마따나 최소한 갑오개혁 이전까지 개화수구라는 도식을 통해 당대의 문제를 이해할 수 없다면, 자연히 급진온건’, ‘친일친청이란 도식 역시 폐기해야 하지 않을까? 평소에 세계사/동아시아사 속의 한국사를 강조해왔건만, 역사상 어느 때보다도 외세의 영향력이 강했던 19세기의 조선을 이해하기 위해선 역설적으로 (지지리도 싫어하던) ‘자주주체를 전면에 내세울 필요가 있겠다. 요컨대, 19세기 조선을 이끌어간 엘리트들이 꿈꾼 국가의 모습은 어떠했으며, 이를 위해 전통근대’, ‘외세를 어떻게 활용했는가? 좋아하는 책의 제목을 빌리자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새로운 ‘19세기 조선 엘리트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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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의 일상사 - 맹신과 무관심 사이, 과학기술의 사회생활에 관한 기록 Editorial Science : 모두를 위한 과학 1
과학기술정책 읽어주는 남자들(박대인, 정한별) 지음 / 에디토리얼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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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의 유령이 한국, 아니 지구를 배회하고 있다, 코로나19라는 유령이. 세계의 모든 지도자들, 즉 트럼프와 로하니, 문재인과 아베, 영국의 보수당과 이탈리아의 오성운동이 이 유령을 사냥하려고 신성동맹을 맺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각자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 불길은 쉽사리 사그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코로나 19는 마치 점포 하나까지 알뜰히 털어먹는 일수꾼마냥 온 세상을 신나게 헤집어놓는 중이다. ‘코로나 시대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코로나19를 전후하여 지금껏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세상이 도래했다는 의견도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과연 코로나 시대가 역사의 새로운 분기점이 될지 아니면 인터넷 밈으로 그칠지, 현재로선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코로나19는 사람들에게 적어도 한 가지 깨달음만큼은 확실히 안겨준 듯하다. 바로 과학은 그 자체로는 철저히 무력하다는 깨달음 말이다. 실제로 중국과 일본, 독일 등 내로라하는 과학강국의 엘리트 연구진이 백신을 개발하고자 밤낮없이 노력중이지만, 아직까진 별다른 소식이 없다. 중국 연구진이 원숭이로부터 코로나19 항체를 확인했다는, 희망을 갖기엔 너무나 미약한 발견만이 뉴스를 통해 전해질 뿐이다. 이번 사태에서 과학은 결코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되어주지 못했다.

 

  사람들이 코로나19를 통해 실감한 건, 과학보다는 오히려 (좋든 나쁘든) 사회의 위력이다. 가히 하이퍼 모더니즘이라 불릴만한 한국의 방역 총력전, 신천지가 드러낸 한국 기독교의 민낯, 구로 콜센터 노동자들의 열악한 근무환경, 과로 끝에 사망한 택배노동자까지, 마치 작정이라도 한 듯 코로나19는 한국 사회의 온갖 측면을 들쑤셔놓았다. 덕분에 지금 한국에선 국경폐쇄, 재난기본소득, 노동조건 개선, 마스크 배급제부터 심지어는 민주주의와 권위주의라는 거대담론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사회에 대한 백가쟁명이 벌어지는 중이다. 만일 이전과 구분되는 코로나 시대만의 특징이 있다면, 그건 전염병이라는 (자연)재해가 과학이 아닌 사회의 문제라는 자각일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과학의 무력함과 그에 비례해 사회의 중요성이 어느 때보다도 부각되는 지금, 박대인과 정한별의 과학기술의 일상사는 양자의 바람직한 관계에 대한 훌륭한 통찰을 안겨준다. 팟캐스트 과학기술정책 읽어주는 남자들(이하 과정남)을 엮어 낸 이 책은, 과학의 위대한 발견을 흥분조로 소개하는 여타 교양서와는 확실히 다르다. 저자들이 주목하는 건 위대한 발견의 이면, 그러니까 무언가 의미 있어 보이는 결과를 학술지에 등재하거나 제안서의 형태로 가공하기까지의 복잡다단한 과정이다. 뿐만 아니라 저자들은 그렇게 탄생한 발견이 어떠한 투쟁과 타협을 거치며 사회와 영향을 주고받는지도 차분하고 꼼꼼하게 탐구해간다.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시민에게 꼭 필요한 책으로, 필독서로 지정해 전국의 모든 고등학생들에게 읽히고 싶다. (뜬금없이 느껴지겠지만 내 입장에선 교양서에 대한 최고의 칭찬이다!)

 

  과학과 사회의 관계를 새롭게 정의하고자, 저자들은 과학기술이란 낡은 개념을 다시금 꺼내든다. 과학기술사 연구자인 김태호에 따르면, 그간 한국에서 과학기술은 그것이 처음으로 구체적 의미를 갖게 된 박정희 시대 이래 생산성 향상을 통한 소득증대로 받아들여졌다.(김태호, 과학영농의 깃발 아래서-박정희 시대 농촌에서 과학의 의미」, 『역사비평2017년 여름호 or 과학대통령 박정희신화를 넘어)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의 정보통신기술(ICT) 정책과 이명박 정부의 녹색성장,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 그리고 문재인 정부의 4차 산업혁명까지 민주화 이후 역대 정부의 과학기술정책 역시 이름만 바꿔왔을 뿐 본질은 박정희 정부와 다르지 않았다. 그저 시대에 따라 있어 보이는키워드들을 죄다 우겨넣는 식으로 업데이트해왔다는 차이만 있을 뿐.

 

  하지만 과학기술은 단지 생산성을 높여 국가에 이바지하는 도구도, 그렇다고 과학기술의’ (한국과 일본에서만 사용하는) 기계적 결합도 아니다. 저자들은 STS(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 학자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의 도움을 받아 과학기술에서 테크노사이언스(Technoscience)’로의 도약을 시도한다. 테크노사이언스란 간단히 말해 과학지식을 정치, 경제, 사회가 얽히고설킨 복잡한 맥락 속에서 이해하려는 관점으로, 과학지식 자체보다는 그것이 만들어지고, 유통되고, 제도화되는 메커니즘에 주목한다. 김태호, 양승훈, 최형섭 등, 한국에도 테크노사이언스로서의 과학기술사/정책을 연구하고 이를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언어로 풀어내는 이들이 조금씩 등장하고 있다.

 

  그렇게 저자들이 테크노사이언스를 통해 재구성한 과학기술의 중요한 특징은, 그것이 어디까지나 사람의 일이라는 점이다. 과학기술은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음습한 연구실이나 프린스턴의 고풍스런 교정을 거닐던 아인슈타인의 머릿속에서 뿅! 하고 나오지 않는다. 구체적으로 과학기술은 중소기업 사장이나 다름없는 교수가 이끄는 연구실에서, 수많은 석박사와 기술자의 협업을 거쳐 탄생한다. 연구만 한다고 다가 아니다. ‘물주인 국가기관이나 기업을 설득하기 위해 미팅을 잡고 제안서를 수정해야 하며, 세간의 주목을 받는 연구일 경우 언론과의 인터뷰도 빼놓을 수 없다.

 

  이처럼 과학기술 연구란 천재 과학영웅의 단독작업이 아닌 만큼, 철저히 사회적이고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막말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함께 작업하는데 인간관계 트러블이 안 일어날 리가 있겠는가? 사소한 감정싸움부터 보다 큰 스케일의 파벌싸움에 이르기까지, 온갖 종류의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갈등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안타깝게도 이 과정에서 학생 신분이란 이유로 노동자로서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대학원생과 학생연구생, 그리고 너무나도 쉽게 경력이 단절되곤 하는 여성 과학인의 목소리는 배제되기 일쑤다.

 

  정부의 지원을 받기 위해 써내야만 하는 각종 지원서 역시 고도로 정치적인 작업이다. 정부가 원하는 바를 구체적으로 명시하는 경우야 좀 낫겠지만, 연구과제 제안 요청서(Request for Proposal, RFP)의 경우엔 정부의 니즈를 찰떡같이 알아먹고 가격 역시 적정수준에 맞춰야한다. 당연히 중공업계나 건설업계를 방불케 하는 수주 경쟁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심지어 비공식적으로 ‘REP 요청서(연구과제 제안 요청서 요청서)’라 불리는, 이러이러한 연구가 국가에 도움이 될 법하니 관련 공모를 열어달라고 요청하는 문서도 존재한다! 흔히 과학의 차가움을 비판하며 인간의 얼굴을 한 과학을 이야기하는데, 이미 과학은 지극히 인간적인 셈이다. 다만 그 인간다움이 우리가 원하는 모습이 아닐 뿐.

 

  그렇다면 과학기술정책을 더한 과학기술정책은 어떨까? 과학기술 자체도 이토록 정치적일진대, 그것이 정책과 제도로 구체화되는 과정이야 말할 것도 없겠다. 대표적으로 최근 몇 년 간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군 공유경제 논란을 살펴보자. 우버와 에어비앤비, 타다 등 정보통신기술의 획기적인 발전에 힘입은 이들 서비스는 이내 기존 이해관계자의 강렬한 반대에 부딪쳤다. 결국 우버가 한국에서 철수하고 타다 금지법이 국회에서 통과됨으로써 공유경제 논란은 일단락되었지만, 타다의 이재웅 전 대표를 비롯한 기업인들은 여전히 이를 도도한 혁신의 물결을 거스르는 반동으로 규정하며 이성적 판단을 호소하고 있다.

 

  확실히 이들의 말마따나 공유경제 서비스는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에 따라 자연스럽게등장한 역사의 필연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필연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공유경제 서비스가 일으킨 파장은 그간 정보통신기술이 우리 삶에 얼마나 깊게 뿌리내렸는지, 그럼에도 우리가 이를 얼마나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다시 말해 공유경제란 기술발전의 결과라기보다는, 이를 확인하는 지표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공유경제라는 리트머스 시험지를 통해 드러난 건 이뿐만이 아니다. 우버와 타다 덕분에 우리는 이미 한국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진 정보통신기술만큼이나, 택시기사나 숙박업자와 같은 기존 사업자들의 강력한 영향력과 존재감 또한 실감했다. 보수언론이나 기업계의 주장처럼 이들이 혁신을 막는 적폐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엄연한 사회의 일원으로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만일 이를 무시하고 슘페터가 이야기한 창조적 파괴를 밀어붙일 경우, 과연 창조로 인한 이익이 파괴로 인한 손해보다 크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파괴를 제대로 밀어붙일 수나 있을까? 우버가 퇴출된 이후 비슷한 사업을 시도한 카카오가 결국 택시라는 틀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그렇기에 저자들은 과학기술이란 보검을 내세워 이 복잡한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단칼에 잘라버리려는 시도를 경계한다. 한 때 서점가를 휩쓸었으나 이제는 만인의 지탄을 받는 책 제목을 빌리자면, 결국 해답은 닥치고 정치라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저자들은 어차피 한국이 과학기술로 세계를 선도하는 탑티어 국가가 (당분간은) 되지 못하는 이상, 아예 크게 방향을 틀어 무엇을보다는 어떻게에 집중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한다. 가령 미국이나 독일이 인공지능 같은 선제적이고 융합적인 분야를 선점한다면, 우리는 이를 어떻게 한국이란 사회에 연착륙시킬지 고민하자는 것이다. 인공지능 연구자들에 대한 지원과 인권보장, 인공지능기술의 발전을 북돋되 그 폐해를 교정할 수 있는 적절한 규제 마련 등이 이에 해당하겠다.

 

  과학기술이 정치의 문제로 인식되는 순간, 시민의 역할도 이전과 같을 수 없다. 냉정히 말해, 그간 교양으로서의 과학은 만유인력의 법칙이나 상대성이론처럼 어렵지만 있어 보이는과학지식을 습득하고 이에 감탄하는 일에 불과했다. 아마 저자들은 과학기술을 둘러싼 복잡한 문제를 이해하려면 차라리 SF를 읽는 게 훨씬 낫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흔히 공상과학소설로 잘못 번역되곤 하는 SF야말로 과학기술이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또 사회는 과학기술의 개발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가장 정교하고 우아한 언어로 풀어낸 사고실험이기 때문이다. (사고실험으로서의 SF에 관심이 있다면 배명훈의 따끈따끈한 신작 SF 작가입니다를 추천한다!)

 

  물론 SF보다 좋은 건 따로 있다. 바로 소양으로서의 과학기술정책이다. 과학기술이 제도와 정책으로 구체화되는 과정에 관심을 기울이고, 정책의 대상과 목적, 파급효과를 면밀히 따져가며 비판적으로 문제를 제기할 능력이야말로 시민의 덕목이자 의무라는 게 저자들의 주장이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는 이미 시민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며 지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서론에서 이야기했던, 코로나19로 촉발된 백가쟁명이 그 증거다. 물론 그것이 단순한 개싸움으로 끝나지 않고 보다 건설적인 결과로 이어지려면 더 많이 읽고, 쓰고, 공부해야겠지만 말이다. 그렇기에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마치 모든 일을 예견한 듯 재난에 대한 장까지 따로 마련해 둔 과학기술의 일상사야 말로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시민이라면 꼭 읽어야 할 교양서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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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유신과 사대부적 정치문화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총서 기초연구시리즈 16
박훈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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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치 조선에서나 볼법한 극렬한 당쟁의 여파로, 미토번은 정작 결정적인 순간엔 힘 한 번 못쓰고 폭삭 망해버렸다. 하지만 미토번은 망해도 망한 게 아니었다. 두꺼비는 뱀에게 잡아먹히지만, 두꺼비 뱃속의 새끼들은 결국 뱀의 몸을 뚫고 세상에 나온다는 80년대 운동권의 프로파간다처럼 미토번의 정신적 후예들이 천하를 뒤흔들었기 때문이다. 일단 막말 유신지사들의 이념적 나침반이었던 후기미토학부터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미토번에서 나온 것이었다. 후기미토학의 이데올로그였던 후지타 도코(藤田東湖)와 그 제자 아이자와 야스시(會澤安)의 유명세는 80년대 대한민국의 김영환이나 이진경(박태호)에 비할 바가 아니었으리라.

 

  실제로 그 유명한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을 비롯, 각지의 수많은 지사들은 흠모하는 선생님밑에서 배우고자 국경(당시 일본에선 번이 곧 나라였으므로)을 넘어 미토번으로 유학을 떠났고, 고향으로 돌아온 뒤에도 모교와의 연계를 이어갔다. 그저 밖으로부터 사람들이 들어오기만 했던 게 아니다. 미토번의 사무라이들도 자의로든 타의로든 번을 떠나 천하를 유랑하며 깽판도 많이 쳤지만, 그 과정에서 사대부적 정치문화를 다른 번에 전파하기도 했다. 여러 모로 튀었던 미토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德川齊昭)의 행보 또한 유교적 이상군주로서의 천황을 상상하는 모델이 되어주었다.

 

  이처럼 주자학의 극단적인 일본적 변형이라고까지 일컬어지는 미토학, 그리고 이를 매개로 형성된 사대부적 정치문화야말로 메이지유신의 원동력이었을 수도 있다는 게 박훈의 설명이다. 상당히 파격적인 주장이지만, 그의 책에서 마땅한 비판거리를 찾기란 결코 쉽지 않다. 꼼꼼한 실증이 뒷받침되고 있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그가 몇 겹의 가정과 제약으로 자신의 주장이 확대해석될 가능성을 원천봉쇄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실증을 중시하는 역사학자가 거대서사혹은 이데올로기를 이야기할 경우 필연적으로 택할 수밖에 없는 길일 것이다. (다른 얘기지만 긴 시간의 흐름을 다루는 역사학이 외려 다른 분과보다 거대서사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는 사실은, 개인적으로 퍽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지난 2018년 네이버 열린연단 강연에서 그가 유교의 공론정치와 문재인 정부의 공론화위원회를 연결짓자 평안도 악센트가 인상적이었던 한 원로학자가 포퓰리즘을 옹호하다니, 지식인으로서의 자격이 없다며 비판하던 모습 역시 생생히 기억하고 있기에, 이러한 신중함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아쉬움을 지울 수 없는 이유는, 박훈이 예상되는 거의 모든 비판을 선제적으로 반론함으로써 더 이상의 논의를 막아버린다고 느껴져서다.

 

  가령 박훈은 미야지마 히로시(宮嶋博史)유교적 근대론과 선을 그으며 자신은 유교에서 근대적인 의의를 찾으려는 시도에는 부정적이라고 선언한다. 그의 입장은 유교가 서양에서 발생한 근대를 도입하는 촉매 역할을 한 뒤 자살했다고 여기는 와타나베 히로시(渡邊浩)에 가깝다. 그간 메이지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를 비롯해 그가 쓴 논문과 칼럼 등을 읽으며 유교는 그저 사라지는 매개자에 불과했던 것 아닌가하는 의문을 품어왔는데, 이 책에서 아예 와타나베의 입을 빌려 그렇다고 못을 박은 셈이다. 심지어 그마저도 “‘시대의 맥락(context)’과 이용하는 주체의 성격, 그리고 이용 수준삼박자가 모두 맞아 떨어질 때만 겨우 가능할 뿐이다.(p.51.)

 

  하지만 유교가 기껏해야 촉매 혹은 사라지는 매개자에 불과하다면, 과연 그 중요성을 이렇게까지 강조할 필요가 있을까? 오히려 유교를 촉매로 사용할 수 있었던 시대의 맥락과 주체의 성격, 그리고 역량이 더 중요했던 것은 아닐까? 박훈이 교양서로는 이례적일 정도로 자주 인용하는 요나하 준(與那覇潤)중국화하는 일본을 통해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중국화하는 일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https://brunch.co.kr/@msg2012/12 참고)

 

  요나하는 일본이 근대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건 중국화’(‘유교화로 치환해도 무방하다)를 감행하며 겸사겸사 서양화도 패키지로 추진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반대로 중국은 송나라, 한국은 조선왕조 때 이미 중국화를 달성해버렸기에 구태여 서양화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는 게 요나하의 설명이다. ‘중국화를 보편이자 필연으로 여기는 요나하로서는 일본이 그만큼 시대의 흐름에 뒤쳐졌음을 보여주려는 의도였겠지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일본은 그때까지 중국과 전혀 다른 사회였기 때문에 중국화를 매개로 서양화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요나하에 따르면 당시 일본은 일본(에도시대)으로 따로 분류될 만큼 세계사적으로 유례를 찾기 어려운 독특한 사회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 핵심은 먹고사니즘이었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오사카의 거대 사찰인 이시야마 혼간지(右山本願寺)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래, 일본의 지배세력은 종교나 사상이 아니라 안전·생계보장을 통해 통치의 정당성을 보장받았다. 다시 말해 질서의 수호자로서의 권위를 흔들지 않는 이상 종교나 사상에 비교적 유연한 태도를 취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아무리 떠들어봤자 칼을 쥔 건 자신들이니 말이다. (에도시대의 인쇄혁명역시 역설적으로 말과 글이 쓸모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건 아닐까?) 그 점에서 일찍이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정치의 발견자라며 추켜세웠던 오규 소라이(荻生徂徠), 그저 이를 사후추인한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https://brunch.co.kr/@msg2012/8)

 

  실제로 유교가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시대정신으로 떠오른 19세기 중반에도 막부는 서양에 열린 자세를 유지했고, 필요하다면 그들의 문물을 적극 흡수했다. 로주(老中) 아베 마사히로(阿部正弘)1842년부터 1857년까지 서양화 정책을 진두지휘했고, 그가 발탁한 인재들은 서양에 대한 이해도로나 실무능력으로나 당시 일본에선 따를 자가 없었다. 권력의 원천이 종교나 사상이 아닌 무력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심지어 1860년대 중반에 이르면 막부 내 강경파 인사들 사이에서 쇼군을 대통령으로 추대한 뒤 군현제를 실시하여 능력본위의 정치를 펼쳐야 한다는, 훗날의 메이지 신정부를 연상케 하는 주장이 등장하기까지 한다.(p.433.)

 

  이처럼 무인사회라는 특성상 막부를 비롯한 일본사회 전반이 서양의 새로운 종교나 사상에 비교적 열려 있었다고 한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도 던져볼 수 있다. 유교 없는 메이지유신은 불가능했을지언정, 메이지유신 없는 근대화(서구화)’는 가능하지 않았을까? 막말로 막부의 내부총질러인 미토번이 조금만 더 고분고분했고,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가 조금만 더 일찍 쇼군에 등극했더라면 앞서 이야기한 막부 강경파의 꿈이 실현되었을 수도 있다.

 

  정리해보자. 유교는 분명 메이지유신에 일정한 역할을 했으나, 이를 완수한 뒤 자살했다. 그리고 어쩌면 메이지유신은 일본의 근대와 별반 상관이 없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유교는 근대와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 비약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지금처럼 양자의 관계에 대해 지나치게 신중한 태도를 고수한다면 필연적으로 맞닥뜨리게 될 질문이라 생각한다. 물론 이를 돌파할 방법은 이전까지 수많은 연구자가 그러했듯 무턱대고 유교에서 근대의 맹아를 추출하는 게 아니라, 메이지유신 이후 유교의 향방에 대해 성실하고 치밀하게 추적해가는 것이리라.

 

  저자가 일본, 나아가 동아시아의 근대를 이해하는 틀로서 봉건·군현론이라는 유력한 테제를 제시했음에도 정작 이 맥락에서 일본의 의회개설을 사유하지 못한 점 역시 아쉬운 부분이다. 중국사학계의 거인인 민두기와 중국화하는 일본으로 일본사회를 뒤흔든 요나하 준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탄생한 봉건·군현론, 근대전환기 일본과 중국의 지식인들이 실제로 이 틀을 통해 바람직한 국가의 모습을 상상했다는 점에서 강한 설명력을 갖는다. 문제는, 정작 저자가 일본 근대화의 중요한 특징으로 꼽는 의회개설은 봉건·군현론을 통해 설명하지 못하고(혹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에 따르면 에도시대까지만 해도 일본에선 자국의 봉건제를 고대의 이상에 부합하는 자랑스러운 전통으로 여겼다. 반면 군현제는 각 번의 자율성을 찍어 누르려는 막부 강경파의 획책, 그러니까 비난받아 마땅한 패도(覇道)’에 불과했다. 그랬기에 메이지유신 역시 오늘날의 이해와는 달리 초창기엔 막부의 봉건에서 천황의 봉건으로 이행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막상 왕정복고 이후에는 군현제 긍정론이 조금씩 고개를 들었는데, 그 시작은 18691월의 판적봉환(版籍奉還)이었다. 당시 유신을 주도한 주요 번들은 판적봉환을 일단 영지와 인민을 천황에게 바친 뒤 다시 그 주인으로 인정받는, 다시 말해 천황의 봉건으로 이해했으나 역설적으로 이는 왕토왕민 사상을 다이묘의 입을 통해 강조한 꼴이었다. 이즈음 널리 확산된 서양에 대한 지식 역시 부국강병을 위해선 중앙집권과 능력위주의 인재선발을 중시하는 군현제가 필수적이라는 인식을 확산시켰다. 번 내에서도 점차 출세에 목마른 중하급 사무라이들이 점차 실권을 잡으며 군현제는 거부할 수 없는 시대적 추세가 되었고, 결국 18717월 폐번치현(廃藩置懸)이 이루어진다.

 

  이처럼 막말 정치사는 봉건에서 군현으로의 점진적이고 상호침투적인 이행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막상 의회개설을 이 흐름에 어떻게 포함시킬지를 생각하면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다. 의회제란 군현보다는 봉건의 맥락에서 지지 또는 정당화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가령 의회개설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평가받는 19세기의 공의여론(公議與論) 사상은 공의기구 설치를 요구했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각 번의 다이묘가 주체가 되는 열번회의(列藩會議)였다.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브레인이었던 니시 아마네(西周)가 제안한 의회제 역시 각 번의 다이묘를 상원에, 각 번에서 선발한 번사 한 명씩을 하원에 배치하는 등 봉건제를 기초로 삼고 있었다.(p.434.)

 

  반면 군현제의 경우 긍정되었다 해도 중앙집권이나 능력위주의 인재선발이 이유였지, 의회제와 관련해서 논의된 사례는 적어도 이 책에선 찾을 수 없다. 그럼에도 박훈의 말마따나 메이지유신 이후 정부 원로에서부터 자유민권운동의 급진파에 이르기까지만인이 헌법제정과 의회개설의 필요성을 공유하고 있었다면(p.188.),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요나하처럼 의회개설은 중국화를 추진하며 겸사겸사 딸려온 서양화의 부산물 정도로 치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박훈은 이를 중국, 러시아, 오스만 제국, 조선 등 다른 비서구 지역과 구분되는 일본만의 위대한 성취라고 여기는 만큼, 보다 자세한 설명이 요구된다. 구체적으로 메이지 일본에서 의회제는 군현제에 봉건의 뜻을 깃들게 하는 것(㝢封建之意於郡縣之中)으로 받아들여졌는가, 아니면 아예 군현제의 맥락에서 새롭게 긍정되었는가?

 

  사실 이 책에는 채 담아내지 못했지만, 박훈은 이미 이러한 문제제기에 대한 대답을 준비했다. 네이버 열린연단 강연에서 그는 일본의 의회제가 명백히 봉건제의 영향으로 등장했다고 이야기했을 뿐 아니라, 19세기 일본의 공론정치가 어떻게 근대 의회제 속에서도 면면히 이어져왔는가를 러프하게나마 스케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메이지 초기 헌법 초안을 연구하는 많은 모임이 여전히 주자학 텍스트를 공부하던 회독(會讀)’의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는 언급으로 보아(p.62.), 근대 이후 유교의 향방에 대해서도 연구를 시작한 듯하다.

 

  무엇보다 박훈은 결론에서 정밀한 실증을 통해 근대적공업과 전통적소농경영이 융합하는 양상을 설득력 있게 그려낸 경제학자 다니모토 마사유키(谷本雅之)를 언급하며, ‘또 다른 근대의 편린을 드러내고자 하는 포부를 밝히고 있다. 언제나 그의 글에서 중요한 인사이트를 얻었던 한 사람의 독자로서, 결코 쉽지 않겠지만 무척이나 흥미진진할 앞으로의 연구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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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유신과 사대부적 정치문화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총서 기초연구시리즈 16
박훈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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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록 사쓰마(薩摩)와 조슈(長州)에 비해 인지도는 떨어지지만, 쇼군의 직계가 끊겼을 시 후계자를 낼 권한을 갖는 고산케(御三家) 중 하나였던 미토번은 막말 초기 정국을 주도한 키 플레이어였다. 무엇보다 미토번은 예로부터 유학의 고장으로 유명했는데, 1682년 조선통신사의 일원으로 일본을 찾은 김지남의 동사일록에도 미토번주(水戶宰)가 선비를 기르는데 힘쓴다는(捐俸養土) 기록이 등장할 정도니 그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유학의 고장이라 해도 일본은 일본이었던지라, 18세기까지 미토번의 정치는 여타 번들과 크게 다르지 않게 돌아갔다. 아니, 오히려 그 어느 번들보다 일본적이었다. 쇼군가의 방계라는 특성상, 미토번주는 격년으로 영지와 에도를 오가는 참근교대제(參勤交代制)의 적용을 받지 않고 아예 에도에 정주했다. 정부제(定府制)라 불리는 이러한 패널티로 인해 미토번주는 자신의 번에 대한 애착을 갖기 어려웠고, 에도에서 이루어지는 각종 제사나 로비활동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에도는 260여개에 달하는 번들의 대사관이 모여 있는, 오늘날의 브뤼셀과 비슷한 도시였다)

 

  번주의 부재는 자연히 가신단의 영향력 증대로 이어졌다. 특히 막부가 미토번에 심은쓰케가로(附家老)인 나카야마가(中山家)와 야마노베가(山野邊家)일국(一國, 미토번)의 부침에도 관계가 있다고 이야기될 만큼 어마어마한 위세를 자랑했다. 그렇다고 가신단이 번 전체를 장악한 것은 또 아니었는데, 수많은 무라()로 이루어진 농촌은 나누시(名主, 촌장)의 지도아래 자체적으로 굴러갔기 때문이다. 향촌의 민정(民政)을 총괄하는 군봉행(郡奉行)이란 직책이 있긴 했으나, 그 힘은 제한적이었다. 요컨대, 당시의 미토번은 번주와 가신단, 백성 모두 저마다의 박스에 틀어박혀 따로 노는 콩가루 집안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19세기에 접어들며, 미토번의 분위기는 조금씩 일변한다. 이를 추동한 건 일차적으로 간세이기(寬政期, 1789~1801)에서 분카기(文化期, 1804~1817)에 걸쳐 급증한 사숙(私塾)이었다. 일본판 서당이라 할 만한 이 사설학원들은 두 가지 측면에서 번이 세운 공식 교육기관인 번교()와는 달랐는데, 우선 회독(會讀)’이란 교육방식부터가 하나의 파격이었다.

 

  말 그대로 한데모여() 유교 경전을 한 구절씩 읽고() 해석하는 회독은, 텍스트의 맥락을 깡그리 무시하고 특정 구절을 끄집어내 곧바로 현실정치와 연결시킴으로써 젊은 사무라이들의 열화와 같은 호응을 얻었다. 마치 1980년대 한국 대학가의 이념서클처럼, 사숙 역시 세상에 불만 많은 젊은이들을 의식화시키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이 당대의 고문사학(古文辭學)을 비판하며 주자학을 추종하는 자신들이야말로 실학의 무리(實學黨)’라고 자부했다는 사실이다. 주자학은 중세고 고문사학은 근대라는 오늘날의 통념에 비추어볼 때 퍽 이상하게 느껴지지만, 애초에 주자학이 고루한 훈고학을 대신할 실학으로 등장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외려 이쪽이 정상에 가깝다.

 

  이처럼 사숙에서의 회독을 통해 소시민에서 지사(志士)로 거듭난 사무라이들은, 자신이 속한 좁은 박스를 벗어나 보다 많은 사람들과 교유하기 시작했다. 박훈이 학적 네트워크라 이름붙인, 느슨하지만 그만큼 끈끈하고 광범한 연대가 종적(縱的)인 일본사회를 횡적(橫的)으로 침투해 들어간 것이다. 비록 완전히 극복할 수는 없었을지언정, ‘학적 네트워크속에서라면 엄격한 신분제의 구속에서 벗어나 비교적 동등한 위치에서 학문을 논할 수 있었다. 심지어 하급 사무라이에 불과했던 아이자와 야스시(會澤安)가 미토번 가로(家老)의 적자 야마노베 요시미를 가르쳤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전통적인 신분관계가 역전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수직적인 위계질서에서 수평적인 동지애로의 이러한 전환은 사무라이들로 하여금 보다 너른 시야에서, 보다 거대한 공동체를 상상할 수 있게끔 북돋았다. 이에(), 그리고 무라()와 마치()를 넘어 번이라는 국가(國家), 그리고 마침내 일본이라는 천하(天下)로까지 지평이 넓어진 것이다. 다이묘와 사무라이, 사무라이와 백성, 도시와 농촌, 사숙과 향교, 번과 번을 이으며 점차 그 영역을 넓혀간 학적 네트워크가 국가와 천하의 대소사에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물론 아무리 사무라이들 사이에서 사대부적 정치문화가 형성되었다한들 최고지도자의 후원이 없다면 이는 찻잔 속의 태풍에 불과할 터였다. 그리고 다행히도, 미토번에는 희대의 풍운아인 도쿠가와 나리아키(德川齊昭)가 있었다.

 

  1829년 우여곡절 끝에 이복형인 도쿠가와 나리노부(德川齊彊)의 뒤를 이어 9대 미토번주가 된 나리아키는 당대의 기준에 비추어볼 때 여러모로 파격적인 행보를 선보였다. 우선 그는 정부제의 관례를 깨고 재임 기간 15년 중 3분의 1에 해당하는 53개월간 미토에 머무르는 취번(就藩)을 감행했다. 당시 대부분의 번주들이 에도의 화려함에 취해 정작 제 영지는 내버려두다시피 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실로 놀라운 일이었지만, 이는 앞으로 나리아키가 펼칠 정책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했다. 무려 고귀한번주께서 하찮은영민(領民)들을 친히 찾아다니셨던 것이다! 이를 순행(巡行)이라 한다.

 

  물론 도쿠가와 시대의 쇼군이나 메이지 시대의 천황 역시 사람들 앞에 자주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는 점에서, 나리아키의 순행은 그다지 대단치 않아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군사지도자로서의 압도적인 위용을 보임으로써(어위광, 御威光) 반란의 싹을 잘라내려 했던 쇼군이나 장엄한 의례를 통해 국민을 창출하고자 했던 천황(이라기보다는 근대권력)과 달리, 나리아키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교유(敎諭)를 통해 영민을 바른 길로 이끄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예고 없이 영민의 집을 방문하는 깜짝 쇼를 즐겼으며, 군봉행을 통해 수시로 영민에게 휘호나 수서(手書)를 내려 격려의 뜻을 전했다. 단순히 영민에게 자신의 의지를 전파하는데 그치지 않고 이들의 고충까지 하나하나 챙기고자 했다는 점에서, 나리아키의 행보는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을 자임한 조선의 정조와 닮아 있었다.

 

  ‘유교적 이상군주를 향한 나리아키의 열망은 미토번 중앙정치에도 반영되었다. 번주에 취임한 직후 그는 의견이 있는 자는 어떤 역직에 있는 자라도 서슴지 말고, 어떤 경로를 통해서라도 봉서를 제출해야 한다고 선언함으로써 언로를 개방할 가능성을 시사했다. 오로지 자신의 직분에 관련된 일만, 그것도 직속상사를 거쳐 간신히 보고할 수 있던 그간의 관례를 생각했을 때 실로 놀라운 조치였다. 무능한 집정(執政)들을 몰아내고 바람직한 정치를 구현하고자 했던 미토번의 사화(士化)된 사무라이들은 주군의 선언을 허투루 넘기지 않았고, 이내 이를 시험해볼 좋은 기회를 잡게 된다.

 

  1831, 대표적인 개혁세력이었던 후지타파는 번의 요직인 오쿠유히쓰부(奧右筆府)에서 자파 인사들이 대거 잘리자 이를 상대 정파의 전면공격이라 판단, 적극적으로 반격을 개시했다. 이른바 역체소동(役替騷動)’이라 불리는 인사파동의 시작이었다. 특기할만한 점은, 후지타파의 무기가 이 아닌 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집정의 손이 닿지 않는 에도통사(江戶通事)를 거쳐 번주 나리아키에게 직통으로 봉서를 올렸고, 직분의 벽을 뛰어넘어 후지타파로서의 횡적인 연대를 도모했다. 심지어 군봉행 가와세 교토쿠(川瀨敎德)의 경우 정론(正論)을 펼친다면 그간 일본에서 금기시된 도당(徒黨)을 결성해도 문제될 게 없다는 위험한인식을 내비치기까지 했다.

  마치 조선에서나 볼 법한 맹렬한 키배, 나리아키 역시 일반적인 봉건영주로서 대응할 수만은 없었다. 그는 자신에게 올라오는 봉서에 일일이 직서를 내리고 번사들의 수령확인이 늦다고 불만을 터뜨리는 등, 친히 정치논쟁의 한복판에 뛰어들었다. 이에 대한 번 중역들의 견제가 잇따르자 나리아키는 아예 비밀서한이라는 대담한 방법까지 시도하기에 이른다. 비록 연명상서(連名上書)가 허용되지 않는 등 종래의 수직적인 의사결정구조에서 완전히 탈피하진 못했을지언정, 상서라는 미디어를 통한 자유로운 토의정치가 형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일련의 남상운동(南上運動, 미토의 서남쪽에 위치한 에도로 올라갔다하여 이런 이름이 붙음)을 거치며 미토번의 사대부적 정치문화는 최고조에 이른다. 1829년 나리아키 대신 쇼군의 아들이자 시미즈가(淸水家)의 당주(當主)인 시미즈 쓰네노인(清水恒之允)을 옹립하려는 번 중역들의 음모에 맞선 분세이기(文政期)의 남상운동만 해도 그 주체는 어디까지나 소수(49)의 개혁파 사무라이들이었다. 그러나 1844년 덴포개혁을 정력적으로 추진하던 나리아키가 돌연 막부로부터 근신, 은거의 처벌을 받고 실각(갑진국난, 甲辰國難)한 데 대한 반발로 일어난 고카기(弘化期)의 설원(雪冤) 남상운동은 이미 사무라이들만의 정치투쟁에서 한참 멀어져있었다. 농민, 상인은 물론이고 신관(神官)과 슈겐(修驗, 산중수행을 중시하는 불교의 일파)까지 참여하는 등, ‘()’이라 불릴만한 주체가 전면에 나섰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이 다양한 배경의 영민들은 번 곳곳에 퍼진 사숙과 향교(鄕校)를 중심으로 연결되어 서로 의견을 개진하고 정보를 주고받았다. 본디 사무라이들만의 참여가 허용되었던 학적 네트워크가 일부 상층 영민까지 받아들이며 외연을 확장한 것이다. 박훈의 표현을 빌리자면, ()의 사화(士化)가 일어난 셈인데, 실제로 미토번의 군봉행들은 이들을 유지(有志)의 백성이라 일컬었다. 군봉행들이 그간 교화의 대상에 불과했던 영민을 정치적 주체로 인정했음을 알 수 있다. 남상운동 이후 미토번의 사무라이()와 영민()이 곧잘 미토사민(水戶士民)’으로 엮여 불렸다는 점도 이들이 학적 네트워크를 매개로 강한 일체감을 형성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1844년의 설원 남상운동으로 절정에 오른 미토번의 사대부적 정치문화, 그러나 이내 자체적인 모순을 드러내며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한다. 미토사민의 노력으로 복권된 나리아키가 자신의 실각을 주도한 게 집정인 유키 도라쥬(結城寅壽)라고 판단하여 그가 이끌던 문벌파를 배척했기 때문이다. 반면 1831년의 역체소동 당시 문벌파를 맹렬히 비판했던 후지타파의 영수 후지타 도코(藤田東湖)의 경우 외려 이 사건을 계기로 당파 간 대립의 자제를 촉구했지만, 한 번 돌아선 주군의 마음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누구보다 탕평을 추구해야 마땅할 군주가 한 쪽 당파를 노골적으로 편듦에 따라 미토번의 당쟁은 점차 심각해졌고, 185510월의 대지진으로 도코가 사망하며 갈등을 중재할 수 있는 최후의 인물마저 잃고 말았다.

 

  급기야 18562월 나리아키의 아들이자 당시 번주였던 도쿠가와 요시아쓰(徳川慶篤)는 번을 정론(正論)과 간물(奸物)로 구분하여 자신은 정론에 속한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이때의 정론이란 후지타파가 급진화된 텐구당(天狗黨)이요, 간물이란 유키가 속한 문벌파였으니 번주가 당쟁의 한 쪽 당사자에 속함을 천명한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결국 같은 해 4월 미토번청은 적절한 절차 없이 명문가 출신의 유키를 처형하는 이례적인 조취를 취했고, 당파 간의 반목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닫고 말았다. ‘유교화가 지나쳐 조선화된 결과였다.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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