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 좋아요, 알림설정까지 - 유명해지고 싶은 2030 인류학 보고서
정연욱 지음 / 천년의상상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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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플루언서에 대한 탁월한 비평이라기보다는, 그러한 비평의 재료로 (가령 "비평적 픽션"의 형태로!) 쓰임직하다. "이런 식으로 문화기술지 쓰면 교수님께 혼 안나요?"라고 묻고 싶었으나, 한편으론 이 납작함과 투명함이 작가가 일부러 의도한 것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동자동 사람들》이나 《부동산은 어떻게 여성의 일이 되었나》처럼 '전형적인' 연대 문화학 협동과정틱한 글과는 거리가 있는데, 오히려 사람들이 생각하는 '전형적인' 연대 출신의 이미지에는 부합하는 희한한 텍스트. 《대학내일》이나 장류진의 소설(공교롭게도 이쪽 또한 '전형적인' 연대생 멘탈리티!)과 비슷한, 일종의 '풍속도'로 읽으면 될 것 같다. 그래도 몇몇 대목은 꽤 뼈때렸어, 가령 이런 식으로.

"게다가 돈 많고 몸 자랑하는 사람들은 그 자체로 완결된 사람들이다. 이미 행복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정신파는 결핍에서부터 출발한 매서운 반골들이다. 단단한 정신으로 무장하여, 세상의 인정을 받아내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내보인다."(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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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새해가 찾아온 지도 벌써 사흘이 지났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어느 때보다 책에 빠져들기 좋은 환경이었음에도, 올해 읽은 책은 작년보다 줄어 총 124권입니다. 제가 책을 고르는 안목이 없어서인지, 출판계가 예년보다 부진했는지, 둘 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단순히 읽은 책의 양뿐 아니라 질 역시 떨어진 느낌입니다. 그래서 잘못하면 2020년에 나온 책만으로는 올해의 책 열권을 추릴 수 없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12월 들어 반짝이는 신간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습니다. 조금 더 일찍 읽었더라면 오랫동안 그만뒀던 서평 쓰기를 다시 시작하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 들 정도로요.

 

  2020년도 역시나 주요 언론사가 꼽은 2020년의 책들은 경향신문정도를 제외하곤 그저 그랬습니다. (특히 동아조선처럼 감각 있는 외부 필진에게 자리를 마련해주지도 못한 한겨레는 정말 반성해야 합니다!) 그래서 작년처럼 2020년에 나온 책들로만 열권을 꼽아 봤습니다. 작년에 쓴 글을 보니, 2020년의 목표로 두 가지를 적었더군요. 하나는 매주 꾸준히 서평을 쓰는 것, 다른 하나는 저자를 기다리게 하는 서평가가 되는 것. 이 얼마나 오만한 목표였는지요. 올해는 그저 뜨문뜨문, 하지만 완전히 놓지는 않고 서평을 써보려 합니다. 늘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이하 반말)

 

1. 정의의 감정들 

조선의 법체계하면 사람들이 떠올리는 건 크게 두 가지, 원님재판과 저 놈의 주리를 틀라!”일 것이다. 공명정대한 성문법도, 독립적인 판관도 없이 고을 수령이 제멋대로 내리는 판결, 그리고 특히 사회적 약자에게 가혹했던 야만적인 고문과 처벌은 그간 조선시대가 법에 의한 지배가 전혀 관철되지 않는 사회였다는 유력한 증거가 되어 왔다. 그 연장선상에서 1912년 일제가 도입한 조선민사령이야말로 이 땅에 처음으로 뿌리내린 근대의 씨앗이라는 주장도 가능했다.

정의의 감정들은 조선의 법체계가 근대적이었느냐 그렇지 않았느냐는 고루한 논쟁을 우회해, 당대의 약자였던 여성들이 어떻게 법정이라는 무대에서 정의를 호소하는 퍼포먼스를 벌였는가를 실감나게 보여준다. 원통함()을 해결하고자 기꺼이 주체가 되어 목소리를 낸 다양한 신분의 여성들을 보노라면, SF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경이감(Sense of Wonder)은 비단 거대하고 웅장한 서사를 통해서만 느끼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임진전쟁 이후의 조선에서 21세기 대한민국의 기원을 찾는 건 이제 좀 식상하게 느껴지지만, 국민청원을 비롯해 오늘날 한국의 모습을 자꾸 떠올리게 만드는 책이기도 하다.

 

2. 거대도시 서울 철도 

  매일 밤, 서울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 6번 출구 앞에는 광역버스를 기다리는 긴 줄이 여럿 만들어진다. 하남, 성남, 용인, 수원 등 경기 동남부의 위성도시 거주자인 이들은, 낮 동안 서울 각지에서 분주히 일하다 지하철을 타고 을지로입구역에 집결해 각자의 보금자리로 가기 위한 긴 여정을 기다린다. 거대도시 서울철도의 저자 전현우는 이들이야말로 서울이란 거대도시의 통근 패턴을 보여준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 서울 내 이동에선 지하철이 앞서지만 시계(市界)를 넘는 먼 거리는 광역버스가 압도적인 우세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기후위기를 대비하기 위해선 자동차와 버스의 수요를 철도가 흡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 핵심은 신분당선과 같은 광역급행의 확충과 GTX를 연장한 광역특급의 대대적 준설이다. 북한과 중국까지 내다보는 호방함과 경기도 도농복합시 중 최약체인 광주를 배려해주는 세심함을 갖춘 동시에, 분석철학 전공자가 철덕이 되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결과가 탄생할 수 있는지를 실감케 한다.

 

3. 대표: 역사, 논리, 정치 

  정치사상은 흔히 현실과는 별 상관이 없는 상아탑의 고담준론으로 치부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최소한 대표(representation)에 관한 한, 정치사상은 여전히 현실을 보다 잘 이해하고 나아가 더 나은 방향으로 바꿀 수 있는 강력한 자원이다. 가령 총학생회가 학내 구성원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남혐강사를 초청했다며 전학대회에서 총학생회장 탄핵안이 발의된 모 대학을 살펴보자. 총학생회는 선출된 순간 나름의 자율성을 지니는가, 아니면 학내 구성원의 뜻을 철저히 모사(摹寫)해야 하는가? 만약 후자라면 이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대표: 역사, 논리, 정치는 이처럼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대표 개념의 역사와 그 논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미래를 위해 그 범위를 확장할 것을 제안한다. 얇지만 밀도가 높기에 후루룩 읽고 넘기기보다는 여러 번 정독하며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4. 연년세세 

 황정은이 2014년에 퍼낸 장편소설 계속해보겠습니다에서는 주인공 소라와 나나를 돌봐주는 이웃집 아주머니 순자가 등장한다. 그는 접경지대에 있는 할아버지의 묘에 매년 제사를 지내러 간다. 그리고 황정은이 2020년에 퍼낸 연작소설 연년세세의 첫 단편인 파묘破墓, 똑같이 순자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이 역시 접경지대에 있는 할아버지의 묘를 파버리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책이 나온 해를 기준으로 6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황정은은 연속보다는 단절을 선택하기로 마음먹은 것일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단절은 의식적인 결단이라기보다는 자연스레, 혹은 어쩔 수 없이 그리 되어버린 상황에 가깝다. 연년세세, 즉 여러 해를 거듭하며 계속 이어진다는 뜻을 담은 제목처럼 소설 속 인물들은 그간 해오던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기도, 가장 가깝지만 그래서 자신을 힘들게 한 이를 원망하기도, 혹은 전혀 뜻밖의 일을 마주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시간은 계속 흐른다. 그 무심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무엇은 끊길 수밖에 없고 무엇은 이어져야만 하는가.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던 질문이다.

 

 

5. SF 작가입니다 

  단언컨대 배명훈은 한국에서 가장 지적인 작가다. 그가 처음으로 낸 에세이집인 SF 작가입니다는 평행우주나 타임머신처럼 SF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SF하면 으레 떠올리는 주제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배명훈이 이야기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세계. 이때의 세계란 있는 그대로의 세상보다는 조금 작은, 그러니까 세상을 나름의 주관과 논리에 따라 재배열해 만든 작지만 질서 있는 소우주다. 배명훈이 생각하는 SF란 결국 세계에 대한 이야기, 즉 작가가 만들어낸 소우주가 주인공인 이야기이며, 그런 만큼 순문학과 SF의 독법은 달라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비단 작가 지망생이나 SF 애호가들뿐 아니라 대학원생이나 연구자, 좀 더 소박하게는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고 싶은 모든 이들이 읽으면 좋겠다.

 

6.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 

 하나의 유령이 출판계를 배회하고 있다, 유튜브라는 유령이. 구텐베르크 혁명을 통해 정보를 받아들이는 가장 중요한 매체로 등극했던 책은 이젠 유튜브 혁명으로 영상에게 그 자리를 내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떨고 있다. 머지않아 책은 박물관에서나 보게 될 것이라는 비관과 책은 결코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낙관이 횡행하는 가운데,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는 이러한 불안에 따뜻하고 진지하게 응답하는 흔치않은 책이다. 두 저자는 책의 존폐 여부보다 중요한 건 사람과 사람, 매체와 매체를 잇는 다리 놓기의 리터러시이며, 이를 가장 잘 기를 수 있는 방법은 읽기라고 이야기함으로써 결국 책을 다시 살려낸다.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을 향한 분노와 조롱이 유독 심했던 2020년이었던 만큼, 상대방을 존중하며 대화를 통해 앎을 확장하는 두 저자의 모습이 참 귀하고 소중하다.

 

7. 서울, 권력도시 

 이른바 근대는 한국사회가 아직도 풀지 못한 커다란 숙제다. 특히 일정기(日政期)에서 대일항쟁기까지 그 명칭도 다양한 식민지시대에 대한 평가 문제에선 더더욱 그렇다. 이 시기를 설명하는 유력한 관점들인 수탈론과 근대화론, 근대성론은 모두 근대의 압도적인 무게에 짓눌려왔다. 다만 근대가 조선을 철저히 털어먹었는지, 발전시켰는지, 아니면 규율권력을 창출했는지 정도의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반면 서울, 권력도시, 비록 의도하진 않았을지언정 총독부의 동화정책에 웃음으로 저항한 경성의 조선인들을 통해 근대란 기실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는 대담한 생각을 내비친다. 조선인들은 그 안에 담긴 총독부의 의도가 어떠했든 간에 오락을 오락으로 즐겼으며, 총력전이라는 엄중한 상황 속에서도 신사 앞에서 조선식 큰절을 했다. 그들은 근대의 폭력에 저항해야겠다는 거창한 사명감으로 움직인 게 아니다. 그저 근대를 의식조차 하지 않고 평소처럼 생활했을 뿐이다. 어쩌면 카터 에커트가 말한 제국의 후예란, 강력한 발전국가나 이에 기생하는 재벌 따위가 아니라 이처럼 권력의 선전에 웃음으로 저항하는 사람들인지도 모르겠다.

 

8. 사치와 고요 

 누군가에게는 동인문학상과 한국일보문학상 후보에 올랐으나 끝내 상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이 책의 전부일 수도 있겠다. 확실히 기준영의 소설은 심심하고, 밋밋하다. 요즘 출판시장 최대의 소비자인 2030 여성의 호응을 얻을만한 요소도 부족하다. 그러나 찬찬히 들여다보면, 독자는 이 책에서 때론 사치스럽다고 느껴질 정도로 과잉된 감정들이 모두 잦아든 뒤 찰나와도 같이 찾아오는 고요의 순간을 발견해낼 수 있을 것이다. 기준영은, 마치 섬세하고 정교한 유리 공예품 같은 그의 소설에서, 오해와 불신, 걱정과 두려움 속에서도 사람과 사람이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가능성을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다. 그는 장편보다는 단편이, 초기작보다는 나중 작품이 좋은 작가다.

 

9. 메이지유신과 사대부적 정치문화 

  그 성과에 부러움과 질시의 시선을 보내든, 그 불충분함에 야유 섞인 눈초리를 보내든, 그간 한국에서 메이지유신이란 기본적으로 서구화 운동이었다. 21세기의 나이토 고난이라 할 수 있는 박훈이 문제 삼는 건 바로 이러한 서구중심주의다. 그의 첫 한국어 학술서인 메이지유신과 사대부적 정치문화는 메이지유신의 원동력이 사대부적 정치문화였다고 이야기한다. 종적(縱的)인 박스형 사회였던 일본에서 하급 사무라이를 중심으로 성리학이 확산되며 횡적(橫的)인 네트워크가 형성되고, 이를 토대로 천하의 공론에 목소리를 내는 문화가 형성됨으로써 비로소 메이지유신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유교 없는 유신은 불가능했어도 유신 없는 근대는 가능하지 않았을지, 혹은 군현화가 시대적 대세던 일본에서 어떻게 봉건화의 핵심인 의회개설이 가능했을지와 같은 재밌는 질문거리를 안겨주는 책이기도 하다. 다만 편집이 조금 아쉬운데, 까치나 일조각에서 냈다면 훨씬 좋았을 것 같다.

 

 

10. 누가 백인인가? 

  조지 플로이드 사건과 의정부고등학교 학생들의 블랙페이싱 논란 등, 한국에서 2020년은 그 어느 해보다 인종차별에 대한 관심이 컸던 해일 것이다. 그럼에도 누가 백인인가?가 크게 화제를 모으지 못한 건, 조금 이상하게까지 느껴진다. 저자는 명료하고 깔끔한 문장으로 미국에서 백인, 흑인, 황인, 히스패닉을 비롯한 인종이 어떻게 발명되었는가를 보여준다. 때로는 그 명료함이 조금 아쉽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저자가 명료하게 정의내린 것이 과연 그렇게까지 명료한지 토론해볼 여지를 마련해준단 점에서 결코 나쁘진 않다. 가령 저자는 미국에서 히스패닉이 민족집단인지 인종집단인지 논란이 계속됐다고 하는데, 애초에 민족과 인종이 그렇게까지 상호배타적인 개념일까? 고등학교나 대학교 교양수업에서 이 책을 읽고 인종을 둘러싼 여러 쟁점들에 대해 한바탕 토론을 벌이는 모습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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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eg 2021-01-04 12: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 보았습니다. 덕분에 좋은 책을 알게 되었네요. 찾아봐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유찬근 2021-01-04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대운하와 중국 상인 - 희.양 지역 휘주 상인 성장사, 1415~1784
조영헌 지음 / 민음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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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냉전이 한창이던 1957년 미국, 예순을 갓 넘긴 유대계 독일인 망명객 카를 비트포겔(Karl August Wittfogel)은 곧 세상을 뒤흔들 한 권의 책을 내놓을 참이었다. 제목은 동양적 전제주의(Oriental Despotism). 소련 체제의 기원을 동양에서 찾음으로써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사실은 공산주의 비판보다도 막스 베버를 사사하고 그 자신 탁월한 중국연구자이기도 했던 비트포겔 평생의 연구를 집대성한 성격이 더 강한 책이었다.

 

비트포겔이 보기에 소련 공산당이 정통으로 공인한 단선형 발전론, 즉 세계의 모든 지역이 시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근본적으로 동일한 역사적 궤적을 그려간다는 가정은 완전히 틀린 것이었다. 고대 노예제-중세 봉건제-근대 자본주의로 이어지는 맑스의 도식은 사실상 유럽과 일본의 역사에만 적실성을 지니며, 중국과 인도를 비롯한 비서구는 수력사회(hydraulic society)라는, 영속적이고도 억압적인 체제를 건설했기 때문이다. 명칭에서 알 수 있듯 수력사회는 주로 대규모 치수(治水)가 필수적인 반건조지대에서 형성되지만, 몽골지배 이후의 러시아처럼 자연조건이 맞지 않을지라도 유목민이라는 감염원을 통해서 얼마든 뿌리내릴 수 있다. 비트포겔은 심지어 태평양의 도서지역인 하와이마저 수력사회로 분류하니, 수력사회란 사실상 봉건제를 거치지 않은 세계의 모든 지역에 해당하는 셈이다.

 

구체적으로 수력사회에선 무소불위의 지배자와 그를 보좌하는 관료집단에 의해 모든 것이 좌지우지된다. 사회는 국가에 완전히 종속되며, 상업과 수공업은 최소한의 수요를 뒷받침할 수준으로만 발전한다. 아무리 부유한 자라 할지언정 자식에게 균등하게 재산을 상속하기에 그 규모가 점점 영세해질 뿐 아니라 그나마도 약탈적 관료집단에게 수탈당해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때문에 수력사회에서는 사적소유권에 기초한 대의민주주의도, 자유로운 상거래를 통한 자본주의의 발전도 모두 난망한 일이다. 억압과 굴종, 가난을 영구히 이어가는 것만이 수력사회에 주어진 운명이며, 이를 유일하게 반전시킬 수 있는 건 오로지 선진적인 외세의 침략뿐이다. 물론 수력사회의 관성은 매우 강하기에 기껏 주어진 해방의 기회조차 도리어 더욱 억압적인 체제로 귀결될 따름이다. 1차 세계대전의 결과 러시아에 민주적인 공화국이 아니라 차르전제의 업그레이드판인 소련이 들어섰단 사실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외세의 침략이 없는 이상 비서구엔 꿈도 희망도 없다는 비트포겔의 이야기는 분명 고약하고 오만하다. 하지만 그에 맞서 비서구도 서구와 같은 역사발전과정을 겪었다고 주장하는 건 되려 비트포겔이 짜놓은 판에 놀아나는 꼴이다. 생각해보라, 그간 얼마나 많은 비서구 지식인들이 자국 역사에서 중세봉건을 발견, 혹은 발명하려 들다가 끝내 주화입마에 빠지고 말았는가? 따라서 정말로 비트포겔에게 한 방 제대로 먹이고 싶다면, 오히려 그의 동양적 전제주의와 수력사회론을 받아들이되 그 실상을 조금은 다르게 그려내는 것도 좋은 방법일 수 있다. 그리고 조영헌의 대운하와 중국 상인, 전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비트포겔에 대한 가장 탁월한 전유(專有)처럼 읽히는 책이다. 수력사회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대운하를 둘러싼 우여곡절과 이를 이용해 부와 명성을 거머쥔 휘주상인의 흥망사를 따라가다 보면, 동양적 전제주의란 꼭 일방적인 지배와 굴종, 그리고 가난으로 점철되지만은 않았음을 깨닫게 된다.

 

황하를 다스림으로써 순() 임금의 뒤를 이었다는 우() 임금의 전설에서 알 수 있듯, 치수는 중국에 문명을 꽃피운 가장 중요한 요인이자 제국을 지탱하는 원동력이었다. 물을 다스리려는 노력은 천명이 바뀔지언정 면면히 이어졌고, 마침내 수나라 양제(煬帝)는 화북과 강남을 연결하는 대운하를 건설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당시의 대운하는 그 북쪽 종착점이 고작해야 낙양이었던 데다, 황하, 회하, 장강이라는 자연하천을 연결한 데 지나지 않았기에 한계가 뚜렷했다. 북경과 항주를 잇는 총연장 1794km의 대운하가 완공된 건 원대에 이르러서다. 그나마도 몽골 조정은 유목민답지 않게(?) 운하를 통한 하운(河運)보단 바다를 통한 해운(海運)을 선호했던지라 중요성은 그리 크지 않았다. 대운하가 천하를 다스리는 중요한 인프라로 부상한 건 한족 왕조인 명이 원을 북쪽의 고비사막으로 쫓아내고 중원의 지배자로 등극하면서부터다.

 

다들 알다시피, 명조의 첫 수도는 유서 깊은 한족의 도시 남경이었다. 그러나 명태조 주원장의 4남인 연왕(燕王) 주체가 쿠데타(정난의 변)를 통해 황제의 자리에 오른 후 남경의 수도 지위는 매우 위태로워졌다. 북경 천도가 공공연히 논의되기 시작한 것이다. 황제가 된 주체, 아니 이젠 영락제로서는 불순분자들이 득시글대는 남경을 떠나 자신의 홈그라운드에서 마음 편히 포부를 펼치고 싶었으리라. 하지만 단순히 영락제 개인의 선호로 치부하기엔 문제가 조금 복잡했다. 사실 명은 중국사를 통틀어 이전 왕조를 완벽히 소멸시키지 못한 유일한 왕조였다. 천명이 자신들에게 완전히 넘어오지 않았다는 명분상의 약점은 물론, 막북(漠北, 고비 사막 이북)의 몽골이 언제든 중원을 위협할 수 있었다는 보다 실제적인 위협도 안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영락제는 과감하게 오랑캐가 건설한 식민도시인 북경으로 천도, 북방의 군권을 직접 통솔하며 북으로는 몽골을 견제하고 남으로는 중원을 다스리고자 했던 것이다.

 

물론 북경이 수도로 확정되기까지의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북경 천도를 지지하던 신하들은 송의 수도 개봉이 의지할 험요함이 있으나 막힘없는 수로가 없고(有險可依而無水通利也), 당의 수도 장안이 막힘없는 물길이 있으나 의지할 험요함이 없는 반면(是有水通利而無險可依也) 북경은 이 둘을 모두 갖추었으니 새 수도로 손색이 없다며 황제의 뜻을 옹호했다. 하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북경은 의지할 험요함도, 막힘없는 수로도 쉬이 확보하기 힘든 곳이었다. 어느 쪽이든 국가의 인위적인 개입을 통해 보강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기에 명은 북으론 만리장성을 쌓아 험요함을 더했고, 남으론 대운하를 뚫어 수로를 마련했다. 이후 북쪽의 장성과(정확히는 장성이 상징하는 북방경비) 남쪽의 대운하, 그리고 양자를 연결하는 수도 북경은 명과 그 이후의 청대까지 제국의 성격을 규정짓는 근본적인 특징으로 자리 잡는다. 저자가 북경 수도론을 내세우는 이유다.

 

문제는 장성도, 운하도 한 번 쌓거나 뚫는다고 해서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둘 다 자연을 거슬러 만든 인공물인 만큼 꾸준한 유지·보수공사가 필수적이었다. 특히 운하의 경우 명왕조가 바다를 걸어 잠그고 조운을 비롯한 모든 물류를 대운하로 일원화했기 때문에 막대한 부담이 가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곳이 이른바 회·양 지역이었다. 회하(淮河)와 홍택호를 끼고 있는 회안(淮安)에서 시작해 장강을 마주보는 양주(揚州)까지를 일컫는 이 지역의 문제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로 대운하의 상류에서 황하의 막대한 물이 쏟아져 들어오고, 둘째로 중류에서 택국(澤國)이라 불릴 정도로 많았던 이 지역의 호수들이 걸핏하면 대운하에 간섭해 수심이 일정치 않았으며, 셋째로 하류에서 하수(河水)를 양자강과 바다로 배출하기 쉽지 않았던 데다 자칫하면 전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양회염전에 영향을 줄 수 있었다.

 

요컨대, 풍요로운 강남의 물류를 화북으로 실어 나르는 초입에 위치한 회·양 지역은 조운과 염정(鹽政), 그리고 하공(河工, 운하 공사)의 삼대정(三大政)이 마치 이 지역의 수로마냥 복잡하게 얽혀 있는 곳이었다.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의 말마따나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지만 어떠한 부족함도 없는도시인 북경의 풍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회·양의 삼대정을 해결해야 했고, 아무리 전제적일지언정 이는 국가가 단독으로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자연히 국가는 북경을 수도로 유지하는데 들어가는 막대한 부담을 나눌 수 있는 상대를 찾아 나섰고, 이에 기꺼이 응한 자들이 바로 상인, 그중에서도 휘주(徽州) 상인들이었다.

 

휘주는 안휘성(安徽省)의 한 부(), 산지가 많아 예로부터 농사로 먹고살기는 어려운 곳이었다. 이 궁벽한 동네가 천하를 쥐고 흔드는 상인들의 고장이 될 수 있었던 건 일차적으로는 소금, 보다 근본적으로는 북경이라는 돈 먹는수도 덕분이었다. 예로부터 소금은 철과 더불어 중국 역대 왕조의 가장 중요한 관리대상이었는데, 명 왕조는 개창과 함께 개중법(開中法)을 제정해 소금을 국방과 연결시켰다. 개중법이란 상인에게 북방 변경의 지정된 장소로 곡물을 운송하면 양주의 염운사에서 소금의 운송·판매권인 염인(鹽引)을 지급하는 법으로, 수도 북쪽의 방비를 탄탄히 하고자 고안된 것이었다. 원칙적으로 곡물의 운송부터 소금의 판매에 이르는 전 과정을 동일 상인이 부담해야 했으므로, 당시 소금으로 부를 거머쥔 건 지리적으로 변경과 가까웠던 산서(山西)와 섬서(陝西)의 상인, 곧 산섬상(山陝商)이었다.

 

하지만 북방에 곡물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다는 걸 감안해도 지나치게 비효율적이었던 개중법은 결국 1492, 양주의 염운사에 은을 납부하는 것만으로 염인을 부여하는 운사납은제(運司納銀制)로 바뀌게 된다. 이로써 소금의 유통과정 역시 분업화되기 시작했는데, 이 틈을 비집고 들어간 이들이 바로 휘상이었다. 이들은 전당업에 주로 종사했기 때문에 국가의 화폐인 은과 민간의 화폐인 동전의 환전에 유리했다. 또한 이전부터 장강을 따라 목재를 유통했던 만큼 어디까지나 북쪽 출신인 산섬상과 비교해 영업망도 결코 꿇리지 않았다. 여기에 강력한 가족·종족 결속력이 더해지며 휘상은 소금을 유통하는 수상(水商)으로, 일부는 양주의 염운사와 직접 소금을 거래하는 내상(內商)으로 활동영역을 조금씩 넓혀갔다.

 

이처럼 16세기를 거치며 휘상은 염운계의 슈퍼루키로 성장해갔지만 부자는 망해도 삼년은 간다고, 아직까진 산섬상의 영향력이 여전히 강했다. 그러나 1598, 몽골의 보바이 난, 조선의 임진왜란, 묘족의 양응룡 난(일명 만력 3대정)을 진압하는데 들어간 막대한 전비를 충당하고자 태감(太監) 노보가 파견되며 휘상에게 새로운 기회가 열린다. 노보는 충분한 고민 없이 세금 징수를 위한 염인인 부인(浮引)을 남발했는데, 이 과정에서 정규 염인인 정인(正引)을 유통하던 산섬상이 큰 타격을 입었기 때문이다. 반면 휘상에게 부인은 수상을 넘어 내상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매우 좋은 사다리였다. 이들은 기존 질서가 와해되는 과정에서 간상(奸商, 간사한 상인)이란 소리까지 들어가며 세력가들의 필요를 채워 주었고, 그 결과 산섬상을 몰아내고 회·양 염상계의 지존으로 등극할 수 있었다.

 

물론 휘상의 약진은 어디까지나 명말의 혼란기를 틈타 이루어진 만큼 언제든 신기루처럼 사라질 수 있는 불안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하늘은 여전히 휘상의 편이었다. 1617년 등장한 강운법(綱運法)은 기존의 산발적인 내상들을 강()이라는 10개의 조합으로 재편성했는데, 이 과정에서 강책의 권리인 염와(鹽窩)에 대한 배타적 세습권을 인정한 것이다. 휘상으로서는 치고 올라가야 할 시점에는 질서가 흔들리더니 정점에 오른 뒤에는 질서가 그대로 굳어져버린, 이보다 좋을 수 없는 결과였다. 게다가 강에 속한 상인들은 할당량에 대한 세금만 납부하면 나머지 염운 과정에선 국가로부터 재량권을 위임받았기에 휘상은 상업활동에서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자유까지 얻은 셈이었다. 결국 명에서 청으로 천명이 교체된 뒤에도 강운법이 계속 유지됨으로써 휘상은 회·양 최대 상인집단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굳힐 수 있었다.

 

휘상의 이러한 약진은, 당연하겠지만 주변의 질시와 경멸을 한 몸에 받았다. 특히 상업을 천시하는 사대부의 고장인 강남에서 휘상은 어디까지나 권세가에 빌붙고 경쟁자를 잔혹하게 제거하여 부를 일군 모리배에 불과했다. 휘상으로서도 간상 딱지는 사업에 좋지 않았으므로 어떻게든 이미지를 개선할 필요가 있었을 터, 고심하던 이들의 눈에 들어온 게 전란으로 황폐화된 회·양 지역, 특히 양주의 참상이었다. 휘상의 기반인 이곳은 남명군과 청군의 연이은 침략으로 삶의 기반이 모조리 파괴되었을 뿐 아니라, 안 그래도 말썽이던 대운하의 기능 역시 정지되어 국가적으로도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에 휘상은 양주, 나아가 천하의 근심을 기꺼이 떠맡음으로써 자신들이 그저 이익만을 탐하는 천한 장사치가 아님을 몸소 증명해보이기로 한다. 그중에서도 잠산도 정씨(程氏)의 사례는 전근대 중국에서 상인이 차지한 독특한 위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특기할 필요가 있다.

 

안휘성 휘주부 흡협에 위치한 향촌인 잠산도(岑山島) 출신인 정씨 일족은 본래 유학을 공부하는 문인 가문이었으나 가세는 조금씩 쇠락해갈 뿐이었다. 결국 17세기 초, 11세손 정필충은 휘주에서 회안의 안동현(安東縣)으로 이주해 소금장사에 뛰어든다. 정필충은 사람들 사이의 분쟁을 원만히 처리하고 빈민구제에도 힘써 정옹(程翁)이라는 존칭을 얻을 정도로 지역사회의 신망을 얻었고, 그의 아들 정재는 염상계의 대표로서 관과 교섭하는 좨주(祭酒)로 추대된다. 좨주가 된 정재는 소금의 원활한 유통을 위해 국고를 빌려 운하를 준설했을 뿐 아니라, 이미 안동을 떠나 회안에 살고 있었음에도 당시 황하의 범람으로 고통 받던 안동에 제방을 쌓는 등 치수에 힘썼다. 이에 감읍한 읍민의 요청으로 관부는 정씨 가문에 안동적(安東籍)을 부여했다. 천한 상인에다 외지인이기까지 한 정씨가 비로소 지역 신사(紳士)에게 내부자로 인정받는 순간이자 그 자신도 신사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린 순간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정조선의 조카 정증 대에 이르러 정씨 가문의 영광은 극에 달했으니, 무려 강희제를 알현하는 은총을 입은 것이다. 정증은 독서를 즐기던 엘리트이자 회·양 지역 염상의 대표자인 총상으로, 하공·조운·염정의 삼대정을 마치 손바닥을 가리키듯 손쉽게 해낸다는 평을 듣는 인물이었다. 그는 당시 강희제를 가장 골치 아프게 했던, 양주와 장강을 잇는 길이 약 10km의 망도하(芒稻河) 준설에 필요한 재원을 뚝딱 마련했을 뿐 아니라 실제 공정도 진두지휘했다. 감격한 강희제는 1705년 그의 다섯 번째 남순(南巡)에서 정증을 행궁으로 초대해 정로(旌勞, 노고를 위로하고 표창함)라 쓴 어서를 하사하고 종7품인 중서사인(中書舍人)의 직함을 제수했다. 상인으로는 유일무이한 명예요, 영광이었다.

 

황제가 안겨준 명예는 단순히 명예에 그치지 않았다. 관직을 제수 받았다 함은 곧 지역사회의 현안에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신사가 되었음을 의미했다. 정증은 돈 많은 상인에서 지역사회의 각종 현안을 처리하는 지역 엘리트로 부상했고, 그의 자식들은 대부분 관직을 역임했다. 경제적인 특혜도 있었다. 남순 2년 뒤인 1707년 강희제가 호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정증을 비롯한 30여 명의 총상에게 다른 상인들이 담당하던 식염(食鹽) 판매권을 준 것이다. 새로 얻게 된 사회적 영향력과 한층 두터워진 경제적 영향력을 바탕으로, 정씨 가문은 각종 공익사업에 활발히 참여했다. 정증의 넷째 아들 정종은 강희제의 손자인 건륭제 시절 회안의 자선단체인 육영당에 운영 자금을 보탰고, 아예 보제당이라는 별도의 자선단체를 건립하기까지 했다. 나아가 그는 회안에 수재가 발생했을 때 수재민을 위한 구호 시설인 서류소 건립에 참여하고 운영을 주도해 10만여 명의 수재민을 구하기까지 했다. 아버지가 그러했듯 정종의 선행은 황제를 감동시켰고, 건륭제는 그에게 의돈임휼(誼敦任恤, 정의가 돈독하여 진심으로 다른 사람을 돕는다)이라 쓴 어서를 내림으로써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비록 잠산도 정씨 가문이 유달리 튀는경우이긴 하지만, ·양 지역의 최대 현안인 삼대정의 해결에 적극 참여하고 공익사업에 헌신함으로써 관부, 나아가 황제의 신임을 얻는 건 당시 휘상들의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특히 강희제와 건륭제가 각각 6번씩 행한 남순은 휘상에게 자신들이 이렇게나 신사적인상인임을 어필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이는 하공을 중시했던 강희제보다 강남의 고급문화 향유가 목적이었던 건륭제 때 두드러졌는데, 휘상은 그야말로 영혼을 끌어모아 천자의 남순에 필요한 각종 공무와 연회 준비에 앞장섰다. 상인들의 이와 같은 자발적인헌신에 건륭제는 각종 사여와 의서로 보답했고, 양자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졌다. 저자의 말마따나 휘상이 아쉬워했던 건 황제의 잦은 방문도, 남순에 따른 경제적 부담도 아니었다. “오히려 1784년 이후 기세등등한 황제가 다시는 양주로 내려오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p.292.) 황제는 회·양의 지역 경제와 도시 문화에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가장 중요하고도 근본적인 원인이었던 것이다.

 

대운하를 둘러싼 우여곡절과 이를 이용해 부와 명성을 거머쥔 휘주상인의 흥망사는, 우리로 하여금 비트포겔의 입론을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보게끔 북돋는다. 다시 말해 중국의 전제주의(Despotism)’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상상하게끔 만든다는 것이다. 명과 청은 거대한 장성을 쌓고 기다란 운하를 뚫을 능력을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분명 동시대 유럽이나 일본의 국가들보다는 강력하고, 또 총체적인 권력이었다. 하지만 이를 실제로 시행한 건 휘상을 비롯한 상인들이었다. 이들은 국가의 명령을 받들어, 혹은 자발적으로 공공사업에 헌신했으며 그 대가로 관직을 얻고 경제적 이익을 누렸다.

 

물론 비트포겔 역시 중국에 대해서만큼은 수많은 예외를 인정하고 있다. 가령 그는 중국이 수력사회 중 사적 소유권이 고도로 발달한 거의 유일한 지역일 뿐 아니라, 신사계급의 구성원들이 때로는 백성을 대변하여 통치자에게 일정 수준의 합리성을 갖출 것을 요구했다고 이야기한다. 스승 막스 베버가 제정 중국의 중앙정부가 비교적 허술한 방식으로 지방관료기구를 지휘감독 해나갔다는 점에 놀랐다고도 적고 있다. 그럼에도 비트포겔은 중국의 노역이 여타 동양과 달리 세금으로 대체되었다는 사실이 그 강제성과 예속성을 지워주진 못한다며, 끝내 중국에 대한 비관적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앞서 살펴보았듯 곡물을 북방 변경까지 직접 운송하는 대신 은을 지불하는 식으로 염운법을 바꿈으로써 중국 경제에 어떠한 변화가 일어났는가를 떠올린다면, 적어도 비트포겔처럼 이를 부수적인 것으로 치부할 수는 없으리라. 특히 명대 조세의 은납화가 비단 중국경제뿐 아니라 동아시아, 나아가 세계경제마저 쾌락의 혼돈”(티모시 브룩)에 빠뜨렸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은 경제만이 아니다. 잠산도 정씨가 보여주듯 운하 정비와 공공사업에 힘써 황제의 인정을 받은 유력 상인 가문의 존재는, 명청대 국가와 상인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요구한다. 저자의 말마따나 황제는 허함(虛銜)에 가까운 직함과 9품 관원이 착용한 모자를 하사하는, 자신에겐 결코 어렵지 않은 일을 통해 상인들을 길들이려했지만(p.292.), 상인들은 상인들대로 황제의 후광을 이용해지역사회의 신망을 얻고 특권을 따냈다. 이 점에서 저자의 박사논문에 유용한 논평을 해주기도 했다던 피터 볼의 통찰을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볼은 명청대 중국의 인구가 크게 늘어났음에도 관직 수는 거의 변하지 않았음을 상기시키며, 이를 성리학의 전파에 따라 스스로를 도덕적 실천의 주체로 자임하는 사() 계층이 두텁게 형성되었기 때문이라 설명한다. 즉 만인의 성인됨을 긍정하는 성리학이 사회에 점차 뿌리내리며 정부 바깥에서도 이상을 추구하고 공공선에 복무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중앙보다는 지방에서, 정부조직보다는 자발적 결사체를 통해 각종 현안에 참여하지만 끝까지 천하에 대한 관심의 끊은 놓지 않는 사대부, 볼은 이들이야말로 송 이후의 후기제국을 당까지의 전기제국과 구별지어주는 특징적인 존재라고 여긴다. 그리고 휘상의 사례는 조선과 달리 중국에선 이들 사대부의 범주가 상당히 탄력적이었음을 보여준다. 비록 상인일지언정 유교적 교양을 익히고 공공선에 헌신한다면 국가로부터 사대부로 인정받을 수 있었고, 국가는 이를 통해 재정 부담을 최소화하면서도 지배력을 관철시킬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잠재적 불순분자들을 체제 내로 포섭함으로써 모반의 위험도 미연에 방지했다. 이해관계자를 최대한 늘려 체제에 충성할 수밖에 없게끔 만드는 것, 이것이야말로 중국적 제국시스템의 핵심이었다. 만일 비트포겔의 말마따나 중국의 전제주의가 영속적이라면, 그건 제국을 저버릴 경우 잃을 게 너무 많은 사람들이 결코 적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비단 경제사나 사회사뿐 아니라 정치사와 사상사, 심지어 과학기술사의 맥락에서도 유용한 통찰을 안겨주는 건 물론이요, 학술서임에도 소설처럼 흥미진진하게 읽히는 이 책에도 단점은 있다. 바로 중국이 바다를 저버리고 운하로 모든 물류를 일원화한 이유가 뚜렷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저자는 바다에 대한 중국의 근원적인 공포, 조운 관료와 하공 관료의 입장차 등을 그 이유로 들지만 이 역시 석연치 않다. (이 책의 출간 즈음에 동아일보와 한 인터뷰에서는 중국 왕조가 북방민족을 집중적으로 경계하기 위해 해금정책을 실시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는데, 이쪽이 오히려 설득력 있게 느껴진다)

 

책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대운하는 결코 안전하고 효율적인 운송 시스템이 아니었다. 건조한 화북의 특성상 겨울철엔 운하가 자주 가물었고, 구간별로 고도차도 커서 수위가 다른 지역을 연결하는 방죽인 패()에선 밧줄로 배를 끄는 수부(水夫)가 항상 대기하고 있었다. 상인들을 노리는 수적(水賊)들도 군데군데 도사리고 있었으며, 고용된 운송업자들은 언제 무뢰배로 돌변할지 몰랐다. 그럼에도 중국이 끝끝내 대운하를 고집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저자는 올해 출간될 대운하시대에 그 답을 준비해놓은 듯하다. 대운하와 중국 상인이 나온 지 어언 10, 그 사이에 저자는 해양사로 관심을 넓혀 바다에서 본 역사셀던의 중국지도를 번역하는 등 육지가 아닌 바다에서 동아시아의 역사를 새로이 이해하려는 작업을 계속해왔다. 바다처럼 깊고 넓어진 저자의 연구가 대운하시대에 어떻게 반영되었을지, 독자로서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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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
구범진 지음 / 까치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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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축년(丁丑年) 정월 30(양력 1637224), 조선 국왕 인조는 남한산성을 나서 삼전도(三田渡)로 향했다. 병자년(丙子年) 128(163713) 압록강을 건넌지 채 일주일도 되지 않아 수도 한성을 접수하고, 끝내 최후의 보루인 강화도마저 점령한 청에게 항복하기 위해서였다. 몸소 군대를 이끌고 조선을 찾은 청 태종 홍타이지에게, 인조는 세 번 무릎을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의 예를 올렸다. 오늘날까지 널리 회자되는 삼전도의 굴욕이다.

 

문명국 국왕오랑캐 추장에게 신하의 예를 표한 이 초유의 사건은, 연하겠지만 조선 지배층의 정신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계승범의 말마따나 조선후기 정치·지성사의 흐름은 이 충격을 벗어나고 상쇄하기 위한 자기몸부림에 다름 아니었다.”(계승범, 삼전도항복과 조선의 국가정체성 문제허태구, 병자호란과 예, 그리고 중화(소명출판,2019)에 대한 종합비평, 조선시대사학보91. 2019) 지위와 당색을 막론하고 일단 위정자의 지위에 있는 자라면 병자호란에 대한 해석과 평가로부터 자신의 입론을 전개할 수밖에 없었다.

    

병자호란의 엄청난 무게에 짓눌린 건 이들만이 아니다. 사건으로부터 400년 가까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병자호란은 여전히 한국사회에서 가장 뜨거운 논쟁거리 중 하나다. 아무리 조선시대에 대한 평가가 현대 한국인의 이념적 좌표를 파악하는 중요한 리트머스 시험지라고 해도, 이러한 과열은 의아하게 느껴질 정도다. 심지어 명과 청 사이에 놓인 병자호란 당시의 조선을 미국과 중국 사이에 놓인 21세기의 대한민국과 섣부르게 유비하며 어떠한 교훈이나 지혜를 구하려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국제 관계에 전문성을 갖춘 인재 양성을 목표로 하는 모 국제중학교의 초대 면접고사가 병자호란 당시의 척화파와 주화파 중 한 쪽을 고르라는 것이었다는 사실은 그 점에서 퍽 시사적이다.

 

역사학자 구범진이 문제 삼는 것은 바로 이러한 병자호란 해석과 평가의 과잉이다. 사건의 엄청난 임팩트야 부정할 수 없지만, 이로 인해 정작 그 진상을 파악하려는 노력엔 소홀했다는 것이다. 그의 책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 아주 오래 전 역사학에서 폐기된 줄 알았던 진실 탐구가 여전히 유효한 가치임을 보여주는 흔치않은 역작이다. (물론 이건 내가 이야기로서의 역사를 중시하는 학교에 다녀서, 혹은 그런 선생님들께 배운 탓이겠지만) 한문에 만주어 사료는 물론, 첨단 과학기술까지 동원하여 끝끝내 진실을 포획하는 저자의 치밀함을 보노라면 서울대 동양사학과란 이런 것인가!”하는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다. 문장도 구성도 엉망진창이라 도저히 재밌게 읽어주기 어려웠던 저자의 초기작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라 할 만한 단정한 문장과 정연한 논리, 탄탄한 구성 역시 인상적이다.

 

(여담이지만, 지금은 중국 근세사 연구자로 유명한 구범진의 박사논문 주제가 근대전환기에 해당하는 청말 북양신정(北洋新政)이었다는 사실은 퍽 흥미롭다. 반대로 대만사 연구의 권위자인 문명기는 역시 근대전환기 대만의 건성(建省)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이후 일제의 대만 식민통치기 쪽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남겼다. ‘근대전환기로 박사를 받고 근세근대로 넘어간 두 연구자의 궤적이 서울대 동양사학과의 학풍과 어떠한 관련이 있을지, 자못 궁금해진다.)

 

우선 구범진은 병자호란의 책임을 오직 조선에서만 찾는 경향을 비판하며, 전쟁이란 어디까지나 쌍방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임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 조선의 교전국인 청의 의도와 이를 관철하기 위한 전략을 파악해야 비로소 전쟁의 진상을 밝힐 수 있다는 것이다. 아니, 저자에 따르면 청, 구체적으로 홍타이지는 병자호란의 절반정도가 아니라 모든 것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링컨의 저 유명한 어록을 빌리자면 병자호란은 홍타이지의, 홍타이지에 의한, 홍타이지를 위한 전쟁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이해와는 달리, 병자호란은 마음 놓고 명을 치기 위해 배후의 조선을 정리한 부수적인 사건 따위가 아니었다. 일단 정묘호란 때 만천하에 드러난 조선의 보잘것없는 군사력은 결코 청의 중국정복을 위협할 수준이 아니었다. 게다가 홍타이지는 조선을 치는데 뒤탈이 없게끔 먼저 명의 수도권 일대를 들쑤셔놓을 정도로 이 전쟁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이유는 단 하나, 조선이야말로 홍타이지의 칭제(稱帝)를 완성시켜줄 인피니티 스톤이었기 때문이다.

 

병자년 411, 홍타이지는 심양(瀋陽)에서 성대한 황제 즉위식을 거행했다. 중원을 차지하지도 못했으면서 감히 천자를 자부할 수 있었던 근거는 세 가지였으니, 첫째가 몽고 통일이요, 둘째가 칭기즈칸의 옥새 획득이며, 셋째가 조선 정복이었다. 문제는 첫째, 둘째 이유와 달리 세 번째 이유는 순전히 홍타이지의 몽상에 불과했다는 사실이다. 조선에게 정묘년의 형제맹약은 당연히 칭신(稱臣)과는 별개였고, 얼떨결에 황제 즉위식에 불려나온 조선 사신 나덕헌과 이확은 목숨을 걸고 홍타이지에 대한 배례(拜禮)를 거부한다. 기껏 공들여 준비한 이벤트의 흥이 다 깨져버린데 분노한 홍타이지는 그 책임을 조선에 돌린다. 병자호란은 청이 조선의 오만방자함을 참다 참다 끝내 참교육에 나선 결과라는 일각의 이해는, 따라서 완전히 틀린 것이라 하겠다.

 

이처럼 조선을 굴복시켜 신하로 두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던 만큼, 홍타이지는 온 병력을 끌어모아 친히 원정에 나섰다. 가히 근대의 총력전에 비교될법한 위세였으나, 그 규모는 근래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여지는 ‘128000에는 크게 미치지 못했다. 당시 청의 인구와 가용 병력을 고려했을 때, 조선정벌에 동원된 군대는 많아야 34000명 정도였으리라는 게 저자의 추측이다. 수백만 단위를 우습게 넘나드는 삼국지 스케일에 익숙한 독자라면 애걔?”하고 실망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송도 고려도 아닌, 같은 유목민인 거란인 입에서 그 수가 1만이 넘으면 당해낼 자가 없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막강했던 전투종족이 바로 이들이었다. 3만이란 숫자는 능히 한 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는, 실로 무시무시한 규모였으리라.

 

물론 조선이라고 가만있지는 않았다. 평지에서 청의 강력한 기병을 맞닥뜨릴 경우 승산이 없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던 조선 조정은, 유사시 관민이 산성에 들어가 농성하며 적의 진을 빼놓는다는 산성 입보(入保)전략을 세워놓은 상태였다. 뿐만 아니라 평안도의 안주와 영변에 일차 방어선을, 황해도의 황주와 평산에 이차 방어선을 구축함으로써 한 쪽이 청군의 공격에 노출될 경우 다른 한 쪽이 원군을 보낼 수 있는 역삼각형() 방어지대를 형성했다.

 

이 모든 건 청군과 맞서 승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진격속도를 최대한 늦춤으로써 조정이 강화도로 파천할 시간을 벌기 위한 전략이었다. 수전(水戰)에 약한 유목민족에겐 난공불락의 요새인 강화도로 들어만 간다면 전쟁은 지구전으로 흐를 수밖에 없고, 결국 제풀에 지친 청군이 알아서 철수하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강화도 농성의 효용은 멀게는 고려의 대몽항쟁, 가까이는 정묘호란에서도 입증된 바 있으니 조선 조정의 대응은 꽤나 합리적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청은 결코 조선이 바라는 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최대한 빨리 왕을 사로잡아 무릎을 꿇리는 게 목적이었던 만큼 청군은 조선의 주요 방어거점을 내버려둔 채 한성으로 쾌속 진군했다. 여기에 평안도와 황해도의 조선군이 작전대로 관민을 이끌고 산성에 틀어박혔기 때문에 청군 입장에선 그야말로 톨게이트가 열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를 두고 광해군은 청군이 곧장 수도로 쳐들어오는 상황 역시 염두하고 있었는데 인조는 왜 그러지 못했느냐며 책망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두 왕 사이에 정묘호란이 놓여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다시 말해 아직 청군의 직접적인 침략을 마주한 적이 없었던 광해군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둘 수 있었던 반면, 서북 각지를 들쑤신 정묘호란을 겪은 인조는 다음 침략 역시 꼭 그렇게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과거의 교훈을 너무나 충실히 되새긴 나머지 상상력이 구속된 결과다.

 

게다가 청군은 그저 빠르게 내달리기만 한 게 아니었다. 정묘호란은 조선만큼이나 청에게도 중요한 교훈을 안겨줬다. 일단 조선 조정이 강화도에 들어가는 순간 전쟁은 자신들에게 매우 불리해질 뿐 아니라 여차하면 배후의 조선군에 역습을 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홍타이지는 시차 진군 작전양로 병진 작전을 구사했다. 쉽게 말해 청군을 둘로 나눠 각각 동쪽과 서쪽으로 진군케 했을 뿐 아니라, 그마저도 시차를 두고 전(), (), ()로 움직이게 한 것이다.

 

홍타이지의 전략은 실로 효과적이었다. 압록강을 건넌지 6일 만에 한성에 당도한 로오사(Loosa)의 선봉대는 300명에 불과했고, 후속 부대는 아직 뒤따라오는 중이었음에도 조선은 이들을 3만여 명에 달하는 청군 본대로 착각하고 말았다. 그토록 엄청난 규모의 군대가 역시 엄청난 속도로 진군하고 있다는 패닉에 휩싸인 결과, 조정은 한성을 뜰 타이밍을 잡지 못하고 고작해야 남한산성에 틀어박히고 말았다. 비록 국왕을 한성에 가둔다는 본래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홍타이지는 아주 적은 수의 병력으로도 조선 조정을 지레 겁먹게 만들어 강화도로 파천하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게다가 청군이 병력을 쪼개어 시차를 두고 이동했던 만큼 평안도와 황해도의 조선군은 청군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언제쯤 다 진군할지 파악할 수 없었고, 그 결과 근왕(勤王)을 위해 섣부르게 남하하지 못했다.

 

양로 병진 작전 역시 조선군의 허를 찔렀다. 앞서 설명했듯 조선군은 역삼각형으로 전력을 배치하고 한 쪽이 공격받을 경우 다른 쪽이 구원에 나선다는 전략이었는데, 청군이 양쪽으로 진군함으로써 발이 묶여버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늘날 지지리도 욕을 먹는) 황해도원수 김자점은 뒤늦게나마 청군이 통과한 서쪽 대신 동쪽 루트를 통해 남한산성으로 향했는데, 하필이면 토산에서 청의 동로군을 만나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으나, 결과적으로 홍타이지는 조선의 모든 대응을 철저히 무력화시킨 셈이다. 이윽고 남부 4도에서 올라온 근왕군마저 모조리 청군에 격파되었고, 남한산성에 갇힌 인조는 그야말로 고립무원의 상황에 놓였다.

 

하지만 비록 독 안에 든 쥐와 같은 신세일지언정 인조에겐 마지막 믿는 구석이 있었으니, 바로 강화도로 피신한 봉림대군(훗날의 효종)이었다. 강력한 수군이 지키고 있는 천혜의 요새인 강화도가 뚫리지 않는 한 끝까지 항전을 이어갈 심산이었던 것이다. 인조의 이러한 희망은, 그러나 청군이 강화도마저 손쉽게 접수해버림으로써 끝내 사그라지고 만다. 원정군답지 않게 강화도의 지형과 자연조건을 십분 활용한 결과였다.

 

정축년 정월 22(1637216) 오전 1030, 강화도와 김포 사이를 흐르는 염하수로의 조류가 밀물에서 썰물로 바뀌었고, 방향 역시 북에서 남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마치 이를 이미 알고 있던 것처럼 김포 북쪽 갑곶에서 대기하던 청군은 흥룡강에서 쓰이던 작고 날렵한 배에 올라 조류를 타고 손쉽게 강화도에 상륙했다. 만일 청군이 상륙할 경우 유빙이 어는 갑곶을 택할 리는 없다고 여겨 강화도 남쪽의 광성보를 지키고 있던 강도유수(江都留守) 장신의 함대는 뒤늦게 사태를 파악했으나, 조류의 방향도 방향이고 무엇보다 수심이 너무 얕아 북상하지 못했다. 조선의 무적함대가 할 수 있었던 건 그저 청군의 도해를 무력하게 바라보는 일뿐이었다. 저자는 청군이 이토록 기상천외한 작전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것은 조선에 귀화해 어업에 종사하던 여진인인 향화호인(向化胡人)들이 정보를 제공한 덕분이라고 추측한다.

 

마지막 보루인 강화도마저 함락되고 봉림대군이 인질로 잡힌 상황에서 이제 인조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단 하나, 무조건적인 항복과 자비를 베풀어달란 간청뿐이었다. 반면 남한산성을 손아귀에 넣은 홍타이지는 실제 역사처럼 조선국왕의 칭신은 물론이요 조선의 괴뢰국화와 직할화(直轄化)까지, 그야말로 원하는 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저 가만히 기다리기만 해도 조선국왕은 알아서 기어나올 터였고, 실제로 홍타이지의 태도는 더할 나위 없이 느긋했다.

 

그러나 정축년 정월 16일을 기점으로 청의 태도가 일변하기 시작한다. 조선에게 빨리 강화협상에 임하라고 다그치는 것은 물론 일단 출성만 하면 인조의 신변을 보장하겠다는 언질도 주는 등, 홍타이지는 승자답지 않게 몸이 달아 있었다. 이러한 급작스러운 태도 변화의 이유를, 저자는 당시 조선에서 유행하던 천연두(마마)에서 찾는다. 천연두에 대한 면역이 없는 생신(生身)이었던 홍타이지는 부대 내에 마마가 창궐했다는 소식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본래 220일로 계획되어 있었던 강화도 점령이 정월 22일로 급히 당겨진 점이나, 훗날 홍타이지가 자신이 마마를 피해 조기 귀국했다고(避痘先歸) 지나가듯 언급한 것이 그 증거다. 조선을 멸망의 위기에서 구해낸 건 김상헌의 절개도 최명길의 기지도 아닌, 마마라는 전염병이었던 셈이다.

 

이처럼 마마로 인해 급히 조선을 뜰 수밖에 없었지만 홍타이지는 자신이 원하던 바는 확실히 이루었으니, 바로 황제 즉위식의 완성이었다. 실제로 삼전도에서 거행된 의례는 일반적인 승전식과 달리 매우 엄숙하고 진지하게 치러졌으며, 대열을 벗어나거나 갑옷·투구를 풀고 있을 경우 지위여하를 막론하고 가차 없이 처벌받았다. 인조에 대한 예우 역시 패자답지 않게 극진했는데, 이는 그를 일국의 군주로 자리매김해야만 홍타이지 본인이 명실상부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요컨대, 삼전도 의례는 조선의 거부로 미완에 그친 황제 즉위식의 완성이었다. 그야말로 수미가 상응하는, 모든 것이 홍타이지의 의도대로 돌아간 완벽한 작품이라 아니할 수 없다.

 

텍스트 요약이나 발제문이 아닌, 어디까지나 서평인만큼 과감한 압축과 생략을 거듭했지만, (그럼에도 분량이 이렇게나 많은 건 전적으로 서평가의 능력부족 탓이다) 사실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사소한 날짜 하나도 온갖 사료를 교차검증한 뒤에야 조심스레 확정짓는 저자의 치밀함과 꼼꼼함이다. 혹자는 이를 두고 요즘 같은 시대 진실을 밝혀내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며, 그래봐야 결국 병자호란은 조선이 청에게 압도적으로 패배한 전쟁이 아니냐며 비아냥댈 수도 있겠다. (일단 나부터가 그런 생각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팩트는 생각보다 힘이 세다. 의미 없는 논쟁에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을 막아줄 뿐 아니라, 보다 나은 논의로 나아가게 해주는 디딤돌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가령 구범진은 작은 팩트 하나하나를 촘촘히 쌓아간 끝에, 병자호란이 청의 중국정복에 딸려온 부수적인 이벤트따위가 아니라 그 자체로 매우 중요한 사건임을 밝혀냈다. 병자호란의 의의를 과소평가해온 영어권 학계는 물론이고, 그것이 조선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에만 몰두해온 한국 학계에서도 지금껏 나오지 못한 새로운 해석이다. 이러한 해석은 자연히 청이 구축한 새로운 국제질서 속에서 조선이 어떠한 위치에 있었는가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제공한다. 실제로 저자는 일찍이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에서 청에게 조선은 류큐나 베트남처럼 명의 멸망으로 자연스레 접수한 유산이 아니라(동남 초승달 지대) 몽골과 티베트처럼 전쟁을 통해 획득한 전리품이었고(서북 초승달 지대), 이로 인해 여타 조공국에 비해 높은 지위를 점할 수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나아가 병자호란이 청의 중국정복과는 별개의 자기완결적인 사건이었다면, 우리는 중원과는 상관없이 유목세계만으로 이루어진 천하와 그 속의 조선을 상상해볼 수도 있다. 당시 그 누구도 명이 그토록 허망하게 무너지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만큼, 어쩌면 홍타이지는 중원정복은 먼 미래의 일로 제쳐두고 조선의 칭신으로 완성되는 독자적인 천하를 구상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중원 없는 천하혹은 유목세계의 천하는 어떻게 굴러갔을 것이며 남쪽에 위치한 중원의 천하와는 어떠한 관계를 맺었을 것인가? 그리고 유목과는 거리가 먼 삶을 영위해온 조선인들은 새로운 천하에서 스스로를 어떻게 자리매김하고 낯선 이웃들과 함께 살아갔을 것인가? 학문적으로는 무의미한 망상이겠지만, 소설이나 웹툰의 소재로는 더할 나위 없이 흥미로운 주제가 아닌가! 저자가 주춧돌을 놓은 병자호란에 대한 단단한 팩트를 딛고 피어날 보다 나은 논의,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만들어질 수많은 창작물이 기다려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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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그랑쥬 2020-07-11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관련한 웹툰으로 칼부림이 이미 있습니다. 추천하고 갑니다.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 - 삶을 위한 말귀, 문해력, 리터러시
김성우.엄기호 지음 / 따비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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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몰라도, 나는 무엇보다 읽는 존재. 주변에 꼭 한 명씩 있다는 천재들처럼 돌도 지나기 전에 한글을 뗐다는 전설적인 일화는 없지만, 글을 깨친 순간부터 읽기는 내 삶 자체나 다름없었다. 책과 신문은 말할 것도 없고 제품 설명서나 과자 포장지에 이르기까지, 일단 글자가 있다면 너무나 좋았기에 닥치는 대로 읽고 봤다. 그 결과, 나는 영화나 드라마 같은 영상매체마저 보지 않고 읽는 수준에 이르렀다! 실제로 내가 영화관을 찾는 횟수는 일 년에 많아야 두세 번이고 넷플릭스는 아예 가입조차 되어있지 않지만, 웬만한 영화나 드라마는 기사와 위키, 리뷰를 통해 해결한다. 그 유명한 데카르트의 경구를 빌리자면 나는 읽는다, 고로 존재한다. 보르헤스의 말마따나 천국은 도서관의 모습을 하고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고 말이다.

 

  이런 내가 요 근래 가장 걱정하는 건 단연 유튜브의 막강한 위세다. 단순히 사람들이 유튜브만 들여다보느라 책을 읽지 않아서가 아니다. 정보를 습득하는 주된 방식이 읽기에서 보기로 바뀌며 사람들의 사고나 심성마저 크게 달라지고 있다는 위기감이 도처에서 엄습해오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선생님들께선 너희들은 문단을 못 썼지만 지금 가르치는 애들은 문장도 못 쓴다며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신다. ‘구세대티를 팍팍 내는 것 같아 말하기 부끄럽지만, ‘요즘 애들은 카톡이 아닌 틱톡이라는 동영상 앱으로 소통한다는 이야기에 기함했던 기억도 생생하다.

 

  나 역시 유치원에서 아이들에게 종종 그림책을 읽어주곤 하는데, 그때마다 2010년대 중반생인 이 친구들이 서사(narrative)’가 있는 이야기책에 심각할 정도로 집중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퍽 놀라곤 한다. 아이들은 더 이상 존 버닝햄이나 앤서니 브라운, 이억배의 그림책에 빠져들지 않는다. 최근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상을 받아 화제를 모은 백희나 역시 어른들 사이에서나 인기 있을 뿐 유치원에선 찬밥신세다. 아이들이 앞다투어 빌려가는 최고의 인기작은 다름 아닌 내셔널지오그래픽 키즈. 이유는 간단하다, 다큐멘터리 캡쳐나 다름없는 만큼 리얼그 자체인데다 무엇보다 서사가 없기 때문이다. 이 얘기를 방과후 선생님들께 하니 그것도 몰랐냐는 듯 핀잔 한마디를 건네신다.

 

아유 찬근쌤, 그것도 몰랐어? 애들한테 WHY?시리즈 사주면 그걸로 책읽기는 끝이야!

 

  이처럼 유튜브가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이상의 변화를 몰고 올 것이 거의 확실시되는 가운데, 나 같은 활자중독자는 앞으로 먹고살 길을 고민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다. 일단 난 새 시대의 맏이가 되느니 구시대의 막내가 되는 길을 선택()했다. 속되게 말해 한국에서 그나마 글을 가장 많이 읽고 쓴다는 386X세대의 순장조가 되기로 한 것이다. 여러 모로 부족하지만 어쨌든 매주 서평을 올리는 것 역시 지금이 386X세대가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어쩌면) 마지막 시기라는 예감이 들어서다. 이들이 물러나고 유튜브 세대가 주류로 올라서기 전에 막차라도 타야겠다는 게 내 솔직한 심경이다. 그럼에도 마음 한켠에 남은 불안감은 사라질 줄 모른다. 과연 글 쓰는 일로 10, 20년 뒤에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아니, 그때 내가 읽을 글 자체가 남아있기는 할까?

 

  김성우와 엄기호의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읽는 존재들의 이러한 두려움에 응답하는 훌륭한 책이다. 오랜 시간 말과 글의 문제에 천착해온 두 사람의 대담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비단 유튜브 시대의 문해력을 고민하는데서 끝나지 않고, 이를 보다 다양한 층위의 미디어를 오고갈 수 있는 리터러시의 문제로 확장한다. 교양서, 그것도 대담집이지만 내용 역시 가볍기는커녕 무척이나 충실하고 밀도가 높다. 요새 한국어 화자가 한국어로 쓴 교양서의 수준에 새삼 놀라곤 하는데, 그중에서도 이 책은 유달리 돋보인다. 단언컨대 올해 한국출판문화상 교양부문 수상, 못해도 최종심에는 들어갈 것이라 확신한다.

 

  우선 저자들은 제목처럼 유튜브가 책을 집어삼킬 것인지, 다시 말해 정보를 보는시대의 도래로 전통적인 읽기쓰기가 소멸 혹은 쇠퇴할지를 묻는다. 다행히도(?) 저자들의 대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읽고 쓰는 행위만이 갖는, 대체 불가능한 장점이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저자들이 생각하는 텍스트 최대의 장점은 유연성경제성’, 그리고 추상성이다. 텍스트는 언제 어디서든 펜과 종이, 혹은 스마트폰만 있으면 무한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연하고, 또 경제적이다. 과거 웹툰 작가 주호민은 여기는 우주다하고 말만 하면 그냥 우주가 되는 라디오 드라마처럼 만화 역시 손쉽게 그런 상황을 표현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지만, 사실 손가락 한 번 퉁겨서 우주를 만들기엔 글만큼 싸고 편한 게 없다.

 

  무엇보다 텍스트는 오늘날 인류가 가지고 있는 모든 미디어 중 가장 압도적인 추상성을 자랑한다. 글은 인간 앞에 놓인 세계의 다양한 층위를 이해하고 이를 적합한 개념에 담아내어 길고 촘촘한 서사나 고도로 정교한 논리를 구축하는데 가장 적합한 도구다. 적어도 추상화에서만큼은 말과 영상이 아직까진 글을 따라갈 수 없다는 게 저자들의 생각이다. 따라서 유튜브 시대가 도래했다며 섣불리 텍스트 중심 교육을 놓아버리기보단, 보다 읽을 수 있게끔 학생들을 독려하는 교육과정을 계발하는 게 중요하다.

 

  이처럼 저자들은 유튜브 시대 전통적인 문해력의 위기를 점검하는 한편, 이와는 전혀 다른 방식의 리터러시에 대한 감각을 요구한다. 문해력이 높은 탑을 쌓는 능력이라면, 리터러시는 다리를 놓는 능력에 가깝다. 구체적으로 사람과 사람, 매체와 매체를 오가며 함께살아갈 수 있는 역량, 그것이 바로 넓은 의미의 리터러시다. 이 때 중요한 건, 다리를 놓는다는 것이 결코 공감의 동의어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오는 폭로나 고백글에서 숱하게 찾아볼 수 있는 공감합니다란 댓글은, 사실 굉장히 위험할 수 있다. 상대방의 구체적인 맥락을 읽지 못한 채 무턱대고 내가 그와 같다고 전제해버림으로써 엄연히 존재하는 차이를 소거해버리기 때문이다. 결국 청자 혹은 독자에게 남은 건 대체 불가능한 존재로서의 타자가 아니라, ‘슬픔혹은 분노라는 원초적이고 납작한 감정뿐이다. 화자 혹은 글쓴이 역시 자신의 감정을 섬세하게 읽고 이해해줄 사람을 찾기 못하고 페이스북의 따봉이나 다름없는 공감을 추수하며 위안이나 얻게 되고 말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감정은 차분하게 성찰되기보다는 격하게 증폭되기 일쑤다. 이것이 바로 저자들이 이야기하는 리터러시의 위기다.

 

  역설적이지만, 사람과 사람, 매체와 매체 사이에 다리를 놓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건 다름 아닌 차이를 인지하는 능력이다. 다르기 때문에 다리를 놓을 수 있고, 또 놓아야 한다. 언제나 미세하게 끝이 흔들리는 나침반처럼 나의 생각과 경험을 일반화하지 않고, 섣부르게 나와 남의 같음을 발견하기보다는 다름을 받아들이는 것. 나아가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매체가 무엇인지에 따라 그에 맞는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함으로써 이해의 폭을 넓히는 것. 그것이야말로 저자들이 이야기하는 다리 놓기의 리터러시다.

 

  그리고 이러한 역량을 가장 잘 기를 수 있는 건, 당연하겠지만 읽기. 다른 매체와 비교할 수 없는 촘촘한 내러티브를 지닌 글을 읽어내는 훈련은 역시 두껍고 복잡한 맥락을 지닌 사람이란 텍스트도 읽어낼 수 있게끔 도와주기 때문이다. 이로써 얼핏 따로 노는 것처럼 보였던 문해력과 리터러시는 사람에 대한 이해아래 하나로 합쳐진다. 정말이지 탁월한 솜씨라고밖에 이야기할 수 없는 구성이지만, 동시에 몇 가지 의문도 남는다. ‘읽기란 단순히 두꺼운 내러티브를 이해하는 것으로 환원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책에서 김성우와 엄기호는 글을 크게 두 가지 종류로 구분한다. 하나는 복잡한 논리와 증명으로 이루어진 (광의의) ‘과학(김성우)’ 혹은 천문(天文, 엄기호)’이고, 다른 하나는 흔히 이야기라 불리는 내러티브(김성우)’ 혹은 인문(人文, 엄기호)’이다. 저자들은 내러티브/인문에 대한 문해력이 다리 놓기의 리터러시를 함양하는데 도움을 준다고 이야기함으로써 전통적인 읽기와 쓰기의 중요성을 되살려낸다. 하지만 이러한 엮기는 글을 이루는 나머지 절반인 과학/천문에 대한 문해력을 (의도했든 그렇지 않았든) 도외시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실제로 저자들은 책 전반에 걸쳐 과학/천문을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암기식 교육을 비판한다. 뿐만 아니라 학습을 통해 지식의 총량을 늘리는 일을 바벨탑 쌓기의 리터러시라 정의하고 이를 다리 놓기의 리터러시와 대비하며 은근히 전자보다 후자가 낫다는 인식을 내비치기도 한다. 물론 저자들의 말마따나 누가 더 많이 아느냐, 혹은 어려운 글을 잘 읽어내느냐를 잣대로 남을 평가하고 깔보는 태도는 잘못되었지만, 그렇다고 과학/천문에 대한 문해력과 이를 위한 지식의 습득 자체가 꼭 나쁜 건 아니지 않을까?

 

  오늘날 자유로운 비판정신의 대명사처럼 일컬어지는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주의자들을 키운 건 8할이 지독한 암기식 교육, 2할이 가혹한 매질이었다고 한다. (반면 중세의 스콜라 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 의거해 진리에 대한 자유롭고 비판적인 토론을 벌였다고 알려져 있다) 아무리 검색 한 번으로 세상의 모든 지식을 알 수 있다 하더라도, 머리에 든 게 있어야 검색어라도 끼적여볼 수 있다. 그 점에서 암기식 교육,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과학/천문텍스트의 독해는 여전히 중요하다. 문제는 암기식 교육 자체가 아니라, 이에 대한 평가(구체적으론 오지선다형). 저자들 역시 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음에도 문해력다리 놓기의 리터러시라는, 상당히 이질적인 역량을 하나로 엮어내려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빠뜨렸다고 생각한다.

 

  유튜브가 몰고 올(?) 변화에 대한 저자들의 지나친 낙관 역시 퍽 의아하게 느껴진다. 사실 책을 읽는 내내 선생님들 유튜브 안 보시죠?”라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는데, 그도 그럴 것이 저자들이 이런 건 결코 영상으로 대체할 수 없다고 단언하는 것들이 이미 초보적인 형태로나마 실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들이 텍스트만의 장점으로 꼽은 유연성(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음), 경제성(값이 쌈), 추상성(현상을 간단한 개념으로 압축)은 점점 영상에서도 구현가능해지는 추세다.

 

  가령 요즘 10대들은 더 이상 카톡이 아닌 틱톡이라는 동영상 앱으로 소통하며 너도나도 유튜브에 개인 채널을 개설하려 든다. 영상을 찍고, 가공하고, 공유하는 게 그만큼 쉬워졌기 때문이다. 편집 역시 전문 방송국 뺨치는 수준으로 기깔나게 뽑아내는 능력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게 잘 실감이 안 된다면 요즘 유튜브 최고의 화제작인 종로스타를 추천한다) 심지어 텍스트 최고의 강점이라 일컬어졌던 추상성도 이젠 현란한 인포그래픽에 밀려 조금씩 위협받고 있는 형편이다.

 

  요컨대, 저자들은 당분간 글의 위세는 여전할 것이란 전제하에 논의를 시작했다. 하지만 이제 그 전제 자체를 의심해봐야 한다는 건 너무도 자명하다. 그 점에서 차라리 엄기호 대신 이쪽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전문가와 김성우의 대담으로 책을 구성했다면 좋았을 것 같다는 아쉬움도 든다. (물론 난 예나 지금이나 엄기호 키드고 그의 수업을 들은 제자이기도 하지만, 이번 책은 그간 엄기호가 해왔던 이야기들의 반복에 불과하다는 아쉬움을 지우기 어렵다)

 

  이처럼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는 그 장점만큼이나 한계도 뚜렷한 책이다. 문해력과 다리를 놓는 리터러시를 엮어낸 건 좋았지만 그 결과 과학/천문에 대한 문해력과 이를 위한 밑바탕으로서의 암기식 교육이 도외시되었다. 뿐만 아니라 유튜브가 몰고 올 변화, 구체적으로 유튜브라는 미디어가 만들어낼 새로운 인간상에 대한 고민 역시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다. 그러나 난 이 책이 바로 그 한계 때문에 오히려 가치를 갖고, 널리 읽혀야한다고 생각한다.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저자가 혼자 북치고 장구치는 책은 좋은 책이 아니다. 독자로 하여금 더 이상의 생각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그냥 저자가 하는 말을 순응적으로 받아들이게 만들기 때문이다.

 

  반면 저자가 의도적으로 몇 개의 허점을 만들어놓을 경우, 독자는 (자신이 저자의 의도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건 생각지 못하고) 신나게 저자를 비판하며 자신만의 생각을 만들어낼 여지를 갖게 된다. 따라서 완성도의 측면에선 전자가 후자에 비해 압도적이겠지만, 사회적 영향력의 측면에선 후자가 전자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게 내 생각이다. 특히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을 목표로 삼는 교양서의 경우, 일부러라도 모든 걸 얘기해서는 안 된다고까지 생각한다.

 

  그 점에서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는 독자에게 비판의 여지를 열어 주는 훌륭한 책이다. 단언컨대 저자들은 이 책에 딸려 나올 비판, 가령 과학/천문에 대한 등한시나 유튜브에 대한 과소평가 등을 충분히 예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비판으로 끝나지 않고 더 나은 논의로 이어지는 마중물이다. 암기식 교육이 여전히 중요하다면 이를 어떻게 평가할지, 유튜브의 도래로 새로운 인간형이 출현했다면 이들에게 맞는 리터러시 교육은 어때야 할지를 이야기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책의 외연은 오히려 풍성해진다.

 

  아마 이 책은 전국의 교사, 강사, 교수, 그리고 여러 독립서점과 독서모임 사이에서 널리 읽힐 것이고, 그만큼의 호응과 비판 역시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리고 이는 아마도 한국사회로 하여금 처음으로 읽는 것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제공할 테고 말이다. 저자들은 이제 굉장히 바쁠 일만 남았다. 전국 각지의 학교와 서점, 독서모임에 불려 다니게 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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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02-11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꼬마들이 이야기 많은 그림책에 집중하지 못한다니 충격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