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 혼자도 결혼도 아닌, 조립식 가족의 탄생
김하나.황선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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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Y는 이우학교가 망한 건 공동체 없이도 잘 살 수 있는 사람들이 구태여 공동체를 이루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했다. 열아홉 살 때 처음 듣고 지금까지 계속해서 주석을 달고 있을 만큼 소중히 여기는 말인데,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에도 이 금언을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싶다.

책의 주인공 김하나와 황선우는 잘 나가는 고급 지식노동자다. 자신과 타인을 돌보는 능력 역시 뛰어나다. 요컨대, 이 둘은 굳이 누군가를 만나지 않고도 혼자서 잘 살 수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물론 그런 둘이 함께 살게 된다고 해서 이우학교처럼 망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야기가 굉장히 재미없어질 뿐.

책을 읽는 내내 참 부럽고 행복한 삶이다 싶으면서도, 나의 부러움이 김하나와 황선우가 함께살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님 그냥 두 사람의 쩌는 능력에서 비롯된 것인지 헷갈렸다. 역시 함께 살아가는 일의 아름다움(그리고 비루함)은 절박함에서 나오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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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편집장
고경태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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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0페이지가 넘어가는 두꺼운 책인데도 앉은 자리에서 다 읽었다. 저자 고경태는 <한겨레 21><한겨레> 토요판(별도의 주말섹션이 아닌, 주간판과 구분되는 토요판으로는 한국 언론 최초라고 한다)을 성공시킨 베테랑 편집자다. 파격적인 기획을 대담하게 밀어붙이고, 이를 성공시키기까지 한 저자의 편집인생이 기자 특유의 간결한 문체에 힘입어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흥미로운 점은, 저자의 기획이 하나같이 그 매체에 어울리지 않는 무언가를 끌어들임으로써 성공을 거뒀다는 것이다. 예컨대 <한겨레> 토요판 1면은 전날 일어난 최신의 사건을 보도하는 통상적인 신문과는 달리 편집장이 중요하다 판단한 주제 하나를 대문짝하게 실었다. 전형적인 주간지의 기법으로, <한겨레 21>에서 오래 일한 저자의 경험이 녹아들었다. 초창기 <한겨레 21>을 스타덤에 올린 김규항과 김어준의 쾌도난담 역시 술자리에서 오고갈 법한 대화를 그대로 주간지에 실은 것인데, 굳이 따지자면 활자화된 팟캐스트라 할 수 있다.

매체 A에 다른 매체 B의 형식을 도입함으로써 파격을 꾀한다. 퍽 일관적이라 할 수 있는 저자의 파격, 이 책이 증명하듯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신문이 신문 아닌 것을 끌어들여야만 겨우 살아남을 수 있다면, 굳이 신문이 존재할 필요가 있을까? ‘활자화된 팟캐스트를 읽느니 그냥 팟캐스트를 듣는 게 낫지 않나? 성격이 전혀 다른 매체를 슬금슬금 끌어들이다보면, 결국 신문과 잡지 고유의 성격까지 잃어버리는 건 아닐까? 활자의 종언을 더 이상 호사가의 공담으로 치부할 수 없게 된 지금, 신문과 잡지 고유의 방식으로 혁신을 꾀할 방법은 무엇일지 고민하게 된다.

저자의 이야기가 주로 아이템 개발이나 외부 필진과의 에피소드에 치중된 점은 아쉽다. 편집이란 결코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큰 가이드라인은 편집장이 정할지언정 결국 그 속을 채우는 건 기자들이다. 자신의 구상을 팀원들에게 설득하고, 때로는 그들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 그럼에도 저자의 화려한 편집장 역사에는 명민하고, 오만하며, 고집 센 기자들과 실랑이한 기록이 전무하다시피하다. 별로 아름답지 않은 모습이라 일부러 뺀 것일까, 아니면 애초에 저자가 실랑이를 벌일 여지 자체를 주지 않았던 걸까. 책을 읽다보면 어쩐지 후자일 것만 같은 생각이 자꾸만 든다.

PART 5 내가 만난 편집장에 등장하는 편집장들은 한 명을 제외하고 캐릭터가 겹친다. 좋게 말해 추진력 있고, 나쁘게 말해 오만하고 독선적이다. 편집장의 역할은 조율보다는 지휘인 걸까. 저자의 다른 책인 유혹하는 에디터를 읽으면 편집장의 또 다른 모습을 접할 수 있을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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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 현재의 탄생 - 오늘의 세계를 만든 결정적 1년의 기록
엘리사베트 오스브링크 지음, 김수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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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유대계 스웨덴인인 저널리스트의 논픽션. 마치 세계를 훑을 것만 같은 제목과는 달리, 책에서 다루는 현재란 어디까지나 서구세계의 오늘에 불과하다. 물론 이슬람세계가 비중 있게 다뤄지긴 하나, 이는 어디까지나 이스라엘의 탄생이라는 더 큰 문제의 일부로서 스쳐 지나갈 뿐이다. 그 외에는 인도와 동서 파키스탄의 분단이 곁다리로 등장하는 정도.

19471월에서 12월까지, ‘세계각지의 국가와 도시를 훑으며 현재를 만든 중요한 사건들을 훑는 저자의 시야에 서울과 평양, 도쿄와 베이징, 하노이와 자카르타는 들어와 있지 않다. 과연 병들어 죽어가는 조지 오웰이나 미국인 작가와 사랑에 빠진 시몬 드 보부아르, 새로운 패션을 창조한 크리스티앙 디오르보다 이들 도시에서 일어난 일들이 덜 중요한가 싶지만, 비서구를 일종의 악세사리로 다루느니 깔끔하게 들어내기로 한 저자의 판단은 퍽 현명하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꿀꿀함은 남는다. 어째서 서구, 구체적으로는 홀로코스트와 이스라엘 문제만을 천착한 이 책은 별다른 수식어 없이 현재라는 이름을 버젓이 달고 나올 수 있었을까. 만일 배경이 동아시아였고, 사건이 한반도의 분단이었다면 저토록 당당하게 현재를 선언할 수 있었을까. 서구는 자신을 구태여 보편이라 천명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다. 반면 비서구는 자기네 특수성을 이야기할 때조차도 서구를 의식해야만 한다. 차크라바티의 말마따나, 유럽의 지방화가 절실하다. 아주 어려운 일이겠지만.

스웨덴어로 쓴 글의 영어 번역판을 다시 한국어로 옮긴 중역본임에도, 문장은 유려하고 우아하다. 슈테판 츠바이크와 조금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잠시 동아시아나 한반도의 현재를 만든 인물과 사건들을 엮어 이런 책을 써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에 잠겼다가, 너무나 자연스레 서구 명저동아시아/한국판을 상상하는 나를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랐다. 역시 비서구는 결코 서구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인가.

어디까지나 사족이지만, 유대인 문제에 올인한 이 책에서 가장 매력적인 인물이 전후 나치의 재편을 도모한 스웨덴인 페르 엥달이라는 점은 퍽 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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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시대의 사람들 한길그레이트북스 161
한나 아렌트 지음, 홍원표 옮김 / 한길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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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나 아렌트의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상징되는 20세기 전반기를 살아간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이야기하는, 일종의 인물평전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아렌트는 20세기 전반을 어두운 시대로 정의한다. 공적인 삶을 상징하는 밝음의 대척점에 있는 어둠은, 모두가 사적인 것에 매몰된 상황에 대한 은유다. 역자 홍원표에 따르면 아렌트에게 어둠이란 가치판단이 배제된 중립적인 표현이다. 하지만 공적인 삶을 최상의 가치로 여기던 고대 그리스로부터 지대한 영감을 받은 아렌트가 과연 어둠에 대해 일말의 부정적인 평가도 남기지 않았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특히나 그가 유대인으로서 홀로코스트라는 인류 최악의 범죄를 마주했고, 전후에는 뉴요커기자로서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을 취재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이러한 어두운 시대에 아렌트가 집중한 건, 다름 아닌 사람이다. 사람이 백만 명 단위로 죽어나가던 시대에 사람이라니, 지나치게 한가해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아렌트가 조명한 사람들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온 세상이 사적인 것에 얼굴을 박고 있던 때, 이들은 용감하게 공적인 것을 향해 목소리를 냈다. 가톨릭의 개혁을 추구한 보수적인 리버럴 발데마르 구리안부터 자신의 이름을 딴 좌파 시인 그룹을 이끌었던 위스턴 휴 오든까지, 사상도 행적도 가지각색인 아렌트의 사람들은 세상을 향해 이야기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가뜩이나 어려운 내용에 역자의 섬세하지 못한 번역까지,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을 읽어가는 과정은 고난과 좌절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쓴 약을 먹어가듯 두꺼운 책을 꾸역꾸역 읽어가며, 어둠으로 가득 찬 20세기를 비추었던 등불과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에 많이 위로받기도 했다.

어디까지나 20세기 전반 유럽의 이야기인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을 읽으며, 난 엉뚱하게도 20세기 후반 한국을 떠올렸다. 최인훈이 광장에서 이명훈의 입을 빌려 이야기했듯, 허울뿐인 민주공화국의 간판을 내건 신생국 대한민국 역시 광장()은 없고 밀실()만 빼곡한 사회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20세기 전반의 유럽과 마찬가지로, 20세기 후반의 한국에도 밀실을 젖히고 나와 기꺼이 광장을 만들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문학인 최인훈과 김수영, 종교인 함석헌과 문익환, 정치인 장준하와 김대중, 언론인 한창기 등이 바로 그들이다. 한국의 어두운 시대를 밝혀간 이들의 역사 역시, 누군가가 써주었으면 싶었던 건 지나친 욕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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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 - 훈련된 외교관의 시각으로 풀어낸 에도시대 이야기
신상목 지음 / 뿌리와이파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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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고등학생 시절, 18세기 조선사를 공부할 때면 언제나 나를 당혹스럽게 만드는 존재가 있었다. 바로 박지원과 박제가를 위시한 북학파. 교과서의 설명대로라면 조선의 발전을 대표해야 마땅할 이들 북학파, 정작 발전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은 교통이 시망이라 국토가 쬐깐한데도 물자가 널리 유통되지 못한다거나, 청은 변방의 어염집도 이리 삐까번쩍한데 조선은 수도인 한성조차 땟국물이 줄줄 흐른다거나 하는 식의 이야기를 접하다보면 교과서의 설명에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북학파가 열렬히 사모해 마지않았던 청은 강건성세((康乾盛世)의 끝물을 지나며 서서히 썩어 들어가고 있었고, 결국 1840년 한 줌의 영국 함대에 무력하게 패배했다. 그러니깐 교과서는 조선의 낙후성을 극딜했을 뿐 아니라, 기껏해야 느그 청이나 보며 감탄했던 북학파발전의 상징으로 자랑스레 추켜세웠던 것이다. 물론 교과서도 바보는 아닌지라, ‘북학파의 현실비판은 조선의 개혁을 위해 일부러 말을 쎄게 한 것이라고 애써 변명하긴 했다. 하지만 아무리 중학생일지라도 그런 궤변에 속아 넘어갈 정도로 어수룩하진 않았다.

고작 청나라나 부러워해야 했던 18세기 조선의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일단 한국사 공부는 답이 아니다. 한반도 역사만 들입다 파봤자 우리의 잘나고 멋진 모습밖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남는 건 이렇게나 멋진 한국을 세계는 왜 알아주지 않느냐는, ‘국뽕이 가미된 열등감과 자기연민뿐이다.

한반도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이러니하게도 바깥으로 눈을 돌리는 것이다. 오직 자기밖에 모르던 어린이는 유치원이라는 보다 넒은 세계 속에서 비로소 자신의 자리를 찾아간다. 마찬가지로 한반도의 역사도 다른 지역·국가와의 비교를 통해서만 보다 차분하게,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신상목의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는 미우나 고우나 한국의 가장 가까운 이웃인 일본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한국사를 이해하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저자가 주목하는 건 다름 아닌 에도시대(1603~1867)의 일본이다. 폐쇄적이고 자족적인 농경사회를 지향했다는 점에서, 이 시기의 일본은 일견 이웃나라 조선과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비록 나라의 빗장은 닫아걸었을지언정, 일본의 에도시대는 결코 침체와 퇴보로 점철되지 않았다. 오히려 에도시대는 일본이 근대로 나아가는 포텐을 착실히 쌓아가던, ‘축적의 시간이었다. 전근대엔 한반도나 일본이나 도긴개긴이었으리라는 (어디까지나 한국인의) ‘통념, 이 책 앞에서 와장창 부서지고 만다.

 

이 책의 백미는, 단연 저자가 타임머신(!)을 타고 19세기 에도의 소바집을 취재한 가상 르포가 실린 1장이다. 현대 한국인에겐 지극히 평범한 대도시에서의 길거리 외식이, 실은 고도의 문명적 행위임을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일단 대규모의 수요를 창출한 대도시가 존재해야 하며, 물자를 원활히 조달받을 수 있는 도로와 수도시설 등의 인프라가 마련되어야 한다. 또 도시민들 사이에서 쌀이나 면포가 아니라 작고 가벼운 화폐가 널리 유통되어야 한다. , 손님을 끌어오기 위한 마케팅 기법도 빠질 수 없다.

놀랍게도, 에도시대의 일본은 이 까다로운 조건을 모두 만족하는 보기 드문 비서구 국가였다. 드넓은 뻘밭이었던 간토는 대규모 치수사업을 통해 풍요로운 옥토로 거듭났고, 막부의 거점인 에도는 인구 100만의 초거대 소비도시로 등극했다. 각 번()의 다이묘는 막부에 세금을 내지 않는 대신, ‘천하보청(天下普請)’이라는 이름으로 각종 공공사업에 동원되었을 뿐 아니라 참근교대(参勤交代)라 하여 격년으로 에도와 영지를 오가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 인프라가 정비되고 낙수효과가 발생하며 일본의 경제는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막부와 다이묘라는 관()이 깔아준 에서 마음껏 기량을 발휘한 건, 다름 아닌 상인과 서민이라는 민()이었다. 포르노와 광고 전단지를 시작으로 온갖 종류의 인쇄물이 거리에 휘날렸고, 하다못해 목욕용 수건에도 섬세하고 화려한 무늬가 수놓아졌다. 민간의 여행이 활성화되어 변방인 도호쿠(東北)의 평범한 백성일지라도 정기 여객선과 잘 정비된 도로를 통해 전국의 명승지를 얼마든 둘러볼 수 있었다. 조선에 비유하자면, 함경도 경성(鏡城)의 호농이 여객선을 타고 원산까지 내려온 뒤, 거기서 다시 임진강과 연결된 운하를 통해 한성, 개성, 평양을 유람하는 일이 일상화되어 있던 셈이다. 이 어찌 대단하다 아니할 수 있겠는가!

 

이처럼 저자가 풀어놓는 일본 이야기는 입이 떡 벌어질 만큼 놀랍고, 또 흥미진진하다. 물론 누군가는 근대에 집착하는 저자의 관점이 지나치게 편협할뿐더러 이미 그 수명을 다했다고 태클을 걸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책 곳곳에서 이건 좀 아니다싶은 설명이 등장하곤 하는데, 에도시대의 고문학자 오규 소라이에 대한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저자는 소라이를 탈주자학의 기수이자 근대정신의 발현으로 여기는 마루야마 마사오의 해석을 충실히 따른다. 하지만 최근 학계에서는 소라이학이 탈주자학이라기보다 주자학의 일본적 변용에 가까웠고, 그의 개혁안 역시 지극히 복고적이었으며, 그의 문파는 아카데믹한 문헌학에 치중함으로써 현실정치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해석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 하긴 일본에 주자학이 들어온 게 빨라야 17세기고, 소라이가 활동한 건 18세기 초반이다. 한 사상의 전파와 수용, 극복이 일어나기에 100년이란 시간은 너무나 짧지 않은가!

(소라이학이 과연 얼마만큼 탈주자학인지에 관심이 있다면 와타나베 히로시의 일본정치상사를 참고하라. 부끄럽지만 나 역시 이에 대해 짧은 글을 썼다. 소라이학은 과연 탈주자학인가?https://brunch.co.kr/@msg2012/8)

비단 소라이학에 대한 해석만이 아니다. 에도 시장의 등장을 중세 유럽의 자유도시와 곧바로 연결시키는 서술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고, 르네상스를 서구 근대 문명의 원점으로 이해하는 관점은 이젠 너무 낡았다고 느껴진다. 요컨대, 저자의 관점은 지극히 클래식하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클래식함이야말로 이 책이 갖는 최고의 장점이라 확신한다. 현재 한국에서는 근대가 뭔지, 이로 인해 인간에게 어떤 가능성이 주어졌고 또 박탈되었는지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조차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제1세계의 말석에나마 앉을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많은 한국인은 근대 서구가 이룩한 성과를 아주 우습게 아는 경향이 있다. 한술 더 떠 이제 곧 동아시아가 서구에게 빼앗긴 세계의 패권을 되찾으리라는 주장은 한국에선 아예 상식으로 자리 잡았다. 정작 그 근거란 굉장히 빈약한데, 역사적으로 동아시아는 18세기 후반에서 20세기 후반까지의 찰나를 제외하고는 항상 서구보다 앞서나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꼭 중세유럽의 파리와 런던이 인구 몇 만을 겨우 헤아릴 때, 북송의 카이펑(開封)은 백만을 바라보는 대도시였다는 이야기를 빼놓지 않는다.

하지만 인구가 특정 도시, 나아가 문명의 발전수준을 가늠하는 유일한 지표라면 현재 세계에서 가장 문명화된 지역은 인도와 방글라데시여야 한다. 물론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은 그 어떤 동아시아예찬론자라도 잘 알고 계시리라.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건 인구와 같은 단순한 수치라기보다는, 서구문명의 정신과 가치, 제도다. 세속주의, 개인주의, 합리주의, 모험심과 도전정신, 이윤추구 등 서구문명을 구성하는 가치들은 진지한 고민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하다.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가 소중한 이유는 그래서다. 저자는 서구, 정확히는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의 관점에서 일관되게 일본사를 서술해간다. 욕망을 컨트롤하는 우아하고 세련된 관행의 발전, 국가로부터 독립적인 시민사회, 자유로운 탐구정신의 고양을 문명화의 척도로 여기는 스코틀랜드 계몽주의는 대다수 한국 독자에게 어색하고 거북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낯설음이야말로 우리가 근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아닐까? ‘근대를 잘 알지도 못하는데 과연 이를 제대로 비판이나 할 수 있을까?

 

“B급 좌파를 읽느니 A급 우파를 읽게

 

대학 새내기 시절 들었던 <서양사개론> 수업에서 교수님이 건네신 이야기다.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포스트모던 역사가였던 교수님은, 비록 동의는 되지 않을지라도 A급 우파의 관점이나 논리전개를 따라가다 보면 분명 도움이 될 거라며 무려 이영훈의 책을 추천하셨다. 식민지근대화론의 거두이자 위안부를 부정하는 이영훈을 읽으라고?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훗날 이영훈의 한국경제사를 접한 뒤에야, 나는 비로소 교수님께서 왜 그리 말씀하셨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이영훈이 학자로서의 자아와 계몽가로서의 자아를 쪼개 각기 다른 얘기를 하는 모습은 여전히 아쉽다. 위안부의 존재를 부정하는 그의 태도 역시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럼에도 내가 일말의 죄책감을 느낄지언정 여전히 이영훈의 책을 읽는 이유는, 그로부터 근대를 이해하는 중요한 통찰을 얻었기 때문이다. 한국사를 바라보는 시야 역시 넓어졌고 말이다.

신상목 역시 이영훈과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에서 보기 드문 ‘A급 우파. 사실 요즘 나는 과연 서구의 역사조차 근대성이 발현된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을지, 조금 의문스럽긴 하다. 그렇지만 난 여전히 저자와 마찬가지로 서구, 정확히는 영미(英美) 근대성의 가치를 긍정한다. 설령 그것이 18세기 이후의 영국과 미국이라는, 지극히 특수한 시공간에서만 나타난 성격이라 할지언정 일종의 모델혹은 이상으로서의 중요성은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책의 주제가 주제이니만큼, 저자는 한반도에 대해선 거의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영미 근대성, 스코틀랜드 계몽주의라는 프리즘으로 바라본 일본사는 그 자체로 동시기 조선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참조점이 된다. 18세기 조선은 분명 발전했다. 인구는 1200만에서 1800만으로 50% 가까이 늘었고, 25만의 인구를 자랑하는 수도 한성은 제법 도회지 분위기를 풍겼다. 구리 동전인 상평통보가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쓰였으며, 바야흐로 전국시장이라는 게 막 생길락 말락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조선의 발전을 일본과 비교한다면 어떨까? 나아가, 같은 시기 서구와 비교한다면? ‘(영미) 근대성이 전 인류가 추구해야 마땅할 필연이자 보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당장 폐기처분해버릴 만큼 무가치하지도 않다. 사실 영미 근대성이 좋다 나쁘다 왈가왈부하기 전에, 일단은 그게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친애하는 우리의 적, 일본이 묻는다. ‘근대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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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아빠 2019-06-30 07: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재미읽게 잘 읽었습니다. 어설픈 좌파보다는 세련된 우파를 더 읽어 보겠습니다 ^^

유찬근 2019-12-13 18:13   좋아요 0 | URL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